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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도달하게 될 ‘뉴노멀’?

[녹색 스트라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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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이전’을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렇게 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지금의 일상을 ‘뉴노멀’로 삼아 살아가야 하는데, 이 뉴노멀의 모습이 어떨지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코로나19로 처음 경제침체를 맞았을 때 경제학자들은 U자 곡선의 회복이 있을 것이냐, L자로 침체가 계속될 것이냐 말도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포스트코로나 경제가 K자 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진단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자산을 가진 소수의 경제 상황은 나아지지만 없는 자들의 경제는 계속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경제의 K자 곡선은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이미 뚜렷이 목도되고 있다. 실업자가 늘고 청년들의 미래는 더욱 암담해졌다. 일자리를 가진 이들은 그나마 이를 놓칠까 더없이 숨죽이며 고용주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다. 영세 사업자들은 방역 조치의 일환으로 영업 금지를 감당해야 했으나 월세는 꼬박꼬박 내야 했다. 얼마 전 소상공인연합회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이들 중 73%가 폐업을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한국의 최상위 부자들의 자산은 늘어만 간다. 연이은 부동산 조치에도 아파트값은 계속 오르고 주식시장의 가치는 코로나19 이전보다도 상승했다.

뉴노멀은 포스트코로나 맥락에서만 제기되지 않는다. 52일이라는 역대 최장기 장마와 훨씬 잦아진 슈퍼 태풍, 폭염, 따뜻해진 겨울을 살아남은 매미나방 등 벌레들의 창궐, 90년대보다 10배 늘어난 산불 발생 등 이미 현재진행형인 기후위기는 또 다른 뉴노멀의 상황을 만들어냈다. 모두가 그 영향에 노출된다고 하지만 기후위기로 인한 피해 또한 평등하지 않다. 폭우나 태풍 상황에서 주로 피해를 보는 것은 가난한 서민과 농민들이며 폭염은 에어컨 없이 여름을 나야 하는 가난한 이들과 아스팔트 위에서 더위를 맨몸으로 견뎌내야 하는 노동자들에게 가차 없다. 이미 존재하는 사회적 위기는 기후위기 상황에서 코로나19보다 더한 양극화의 양태를 드러낼 것이다.

그러기에 UN 등의 국제기구들과 전 세계 기후활동가들은 지구 기온상승을 섭씨 1.5도 이내로 막아야 한다고, 온실가스를 획기적으로 감축해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외치고 있다. 이와 더불어 국제 사회에서의 기후 논의, 그린뉴딜이나 그린딜 등 해외의 기후위기 대응 정책, 재생 에너지로의 전환과 관련된 온갖 정보들이 넘쳐난다. 대통령은 부정하지만,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기후악당국’으로 낙인찍혔다는 사실도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우리가 접하는 정보만 놓고 보면 국제적으로—혹은 적어도 북미와 유럽의 선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에너지 전환이 많이 진척되었을 것만 같은 느낌이 강하다. 그러나 이는 착시다. 지난 2~30년 동안 국제 재생에너지에 대한 투자와 설비 용량은 많이 증가했으나 전체 에너지원 중 재생에너지 비율은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다. 석탄과 석유, 가스 등 화석연료에 대한 투자와 생산도 그만큼 증가했기 때문이다. 화석연료를 대체하지 못한 채 이루어지는 재생 에너지 확대나 전기 자동차 증가로 에너지 전환이 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에너지 전환이 지체되는 것은 화석연료가 여전히 돈이 되기 때문이다. 자본은—아무리 겉으로 녹색 치장을 한다 해도—돈이 되는 쪽으로 몰리기 마련이다. 엑슨모빌이나 BP(British Petroleum) 등 전통적인 화석연료 기업들만 그런 것은 아니다. 미국의 뉴스 사이트 복스(Vox)는 지난 1월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등 실리콘 밸리 IT 기업들이 어떻게 화석연료 기업들과 합작해 프래킹(fracking)을 통한 화석연료 추출을 쉽게 하기 위한 AI 기술을 개발하고 제공하는지를 폭로했다. 재생 에너지 100%를 실현하고 녹색전환의 선두 주자를 자임하는 기업들조차 이윤의 논리가 우선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녹색금융이나 ESG(환경 사회 거버넌스 원칙) 투자에서도 겉 다르고 속 다른 모습은 비일비재하다. 일례로 미국의 대표적인 주류 기후운동 단체인 350.org에 백만 달러를 기부하고 파리 기후협약에도 참석해 화석연료 기업들에 대한 투자비 회수를 공개적으로 선언했던 록펠러형제재단은 뒤로는 굴지의 석유기업인 할리버튼이나 코크 형제가 소유한 석유 수송기업 인터파이프라인 등에 대한 투자를 계속해왔다. 그러나 화석연료 기업으로부터의 투자비 회수를 선언한 덕에 지난해까지 매년 7.8%의 자산 증식을 기록했다.


위선적 녹색 치장은 한국에서 더 뻔뻔스럽다. 한국에서 포스코 다음으로 탄소배출이 많은 사기업 현대제철은 부산물 재활용 설비를 갖춘 덕에 얼마 전 ‘녹색제품’ 인증을 받았는데, 이로 인해 공공기관 발주량이 폭증했다 한다. 은행권에서 처음으로 ESG 채권을 발행하며 각광을 받았던 수출입은행은 거친 반대에도 “금융지원 즉각 중단 시 경제적 파급효과가 큰 석탄산업 생태계에 타격이 우려된다”며 대놓고 해외 석탄발전소 투자에 앞장서고 있다. 지난 5월 인도에서 유독가스 누출로 11명을 죽이고 수천 명에게 피해를 줬던 LG화학은 두 달 후 RE100 선언을 하고 ‘지속가능성 전략 5대 핵심 과제’를 선보이며 이미지 세탁에 성공했다.

여기에 더해 정부의 그린뉴딜은 과거와 다를 바 없는 기업투자 중심 경기부양책의 모습을 띠며 현대자동차나 한화 같은 기후위기 원인 제공자들을 기후위기의 해결사로 등극시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후위기 시대와 그 이후의 뉴노멀이 어떤 모습일지는 불 보듯 뻔하다. 대기업은 또다시 최대 수혜자가 되겠지만 코로나19로 인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고용보험을 찔끔찔끔 확대하거나 단기 비정규 일자리 공급을 통해 상황 관리를 모색할 뿐이다. 이런 희망 부재의 상황은 서민들로 하여금 그나마 나았던 것만 같은 과거로 회귀하려는 욕망을 부추기고, 이는 다시 이명박이나 도널드 트럼프 같은 사기꾼들이 호출되기 쉬운 토양을 만들 뿐이다.

‘녹색’이 돈벌이의 수단이 돼버린 오늘 과연 녹색 자본주의가 기후위기와 사회적 불평등의 해결사가 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해외 기후정의운동은 “이윤보다 사람,” “이윤보다 지구,” “기후변화 말고 체제변화”와 같은 구호를 통해 응답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해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린뉴딜 운동도 공공투자를 통한 에너지 전환과 일자리 창출, 민주적 소유 확대, 풀뿌리의 정치적 역량 강화를 통한 대안 모색을 주장한다. 이 모두 이윤을 따라 돌아가는 자본주의적 사회경제체제를 갈아치우지 않고서는 온전한 기후위기 대응도 불가능하다는 인식에서 출발해 기후위기 시대와 그 이후의 뉴노멀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이런 시도들이 얼마나 성공적일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근본적 변화를 위한 싸움이 있다는 사실은 희망의 근거가 된다. 이에 비해 한국에서는 안타깝게도 뉴노멀이 어떤 모습을 띠어야 할 것인가를 놓고 논쟁하는 모습을 보기 어렵다. 주류 기후운동은 탄소배출 감소라는 기술적 문제에 관심을 집중하면서 녹색 자본주의와 결탁한 모양새까지 띤다. 사회정의나 환경정의와는 거리가 먼 재생에너지 사업자들의 이해가 기후운동의 아젠다로 둔갑하기도 하고 기후환경단체의 전문가가 방송에 나와 전기 자동차를 홍보하기도 한다. 노동 등 진보적 시민사회는 기후위기와 관련된 이슈들에 대해서는 아예 침묵하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한국의 ‘기후위기 대응’은 과거의 방식 그대로 녹색 치장만 더 두텁게 덧댄 정부와 기업들이 주축이 되어 추진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런 식으로 제대로 된 온실가스 감축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없다. 그래도 미친 척하고 기적처럼 획기적 탄소배출 감축이 이루어져 지구 기온상승을 섭씨 1.5도 이내로 제한하고 최악의 기후위기를 막았다고 가정해보자. 그렇게 도달한 세상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그게 우리가 바라던 ‘탈탄소 사회’ 뉴노멀의 모습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