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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워싱

[워커스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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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 환경주의’로 번역하는 ‘그린워싱’이란 말 그대로 ‘녹색으로 세탁하기/칠하기’다. 왜 세탁하는가? 감출 것이 있어서다. 무엇을 감추려고 하는가? 자본주의가 저지른 자연과 인간에 대한 범죄 행위다. 그린워싱은 단순히 기업 이미지를 좋게 포장하는 기술이 아니라 기업, 국가, 국제기구, 환경단체, 지식그룹에 의해 광범위하게 진행되는 ‘은폐의 기술’이다. 에쓰오일 주유소에 도착하면 오일 방울을 형상화한 귀여운 마스코트가 고객을 맞이한다. ‘구도일’이란 마스코트 이름은 ‘굿 오일’의 한국식 이름이다. 이 ‘착한 기름’은 석유에 묻은 피와 폭력의 흔적을 깨끗이 세탁한다. 세계적인 석유기업인 쉘의 상징인 조개껍데기는 시추선과 유조선이 오염시킨 바다에서 폐사한 조개껍데기를 감춘다.

《느린 폭력과 빈자의 환경주의》(1)는 이 조가비 로고를 붙인 시추탑이 나이지리아 오고니족의 삶터에 꽂혔을 때 어떤 재앙이 닥쳤는지를 오고니족 출신의 저항작가 켄 사로위와의 작품을 통해 전해준다. 조개껍데기 시추탑은 밤낮없이 석유를 불태우며 땅과 물과 밤과 생명을 빼앗았다. 원주민들과 함께 켄 사로위와가 쉘에 맞서 싸운 대가는 교수형이었다. 쉘은 최근 유럽 해상풍력과 태양에너지 발전 및 그린수소 사업에 투자하면서 ‘친환경 에너지 기업’으로 변신했다. 그러나 이 악명 높은 기업은 온실가스 배출 삭감 약속에도 여전히 자본금의 90%를 화석연료에 투자한다. 영국석유회사(BP, British Petroleum)도 BP의 뜻을 ‘석유를 넘어서(Beyond Petroleum)’로 바꾸고 로고도 노란색과 초록색의 자연을 상징하는 꽃모양으로 바꿨다. BP의 해바라기는 세계 곳곳에서 저질러진 오염사고, 노동 착취, 인권 말살, 토지몰수, 공동체 파괴 등의 환경 범죄를 말끔하게 지우면서 BP를 착한 기업으로 변신시켰다. BP는 이런 친환경 이미지를 만드는데 2억 달러를 쓰지만 해양오염사고에 대한 주민 보상에는 기나긴 재판으로 저항한다.

그린워싱은 기업만 하는 것도 아니다. 녹색은 내셔널리즘도 세탁하고, 인종주의도 세탁하고 식민주의도 세탁한다. 쉘의 공식 명칭은 ‘로열 더치 쉘’이고, BP는 ‘영국 석유’다. 이 회사들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석유개발은 국가적 프로젝트였고, 석유개발의 역사는 곧 전쟁과 폭력으로 만들어낸 식민주의 역사였다. 화석연료는 네덜란드와 영국 같은 근대 자본주의 선도 국가에 발전의 핵심 동력과 금융의 원천을 제공했다. 탄소배출 면에서 보자면 근대 이후 지구에 이산화탄소를 가장 많이 뿜어낸 주범 국가들이란 뜻이다. 그런데도 네덜란드는 지금 금융 산업과 지식·문화·정보 산업의 중심지로서, 하이테크 녹색기술을 선도하며, 탈탄소 경제를 모범적으로 실천하는 나라가 돼 있다.

초국가적 단체와 비정부기구들도 그린워싱에 앞장선다. 최근에 지난 35년간 북극 빙하권이 녹는 모습을 초고속 시뮬레이션으로 보여주며 기후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놀라운 것은 자료의 화면 상단에 나타난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y Forum)’이라는 글씨였다. 매년 세계의 부자들이 비행기로 스위스 다보스에 모여 비싼 숙소를 점령하고 파티와 포럼을 열어 ‘다보스포럼’이라고 불리는 이 자본가 동맹은 지구온난화의 주범 중의 주범이다. 그런데 이런 영상을 제공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문제유발자에서 문제해결자로 은근슬쩍 바꿔치기한 것이다.

IMF와 세계은행 같은 초국적 금융기구들도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나서서 경고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기후위기가 자본 축적에도 커다란 위기이기 때문이다. 녹색 자본주의는 자본의 출구전략이지 노동자 민중과 지구 생명들을 위한 전향적 결단이 아니다. 당면한 기후위기는 전 지구적 차원의 문제지만 그래서 좌도, 우도, 기업도, 노동자도 공동운명체라고 하는 것은 상반된 이해관계와 권력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순진하고 위험한 생각이다.

‘인류세’ 같은 성찰적 개념도, 결과적으로는 ‘기후위기는 전 인류의 탐욕 탓’이라는 상징조작을 수행한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구분 없이 ‘탐욕적인 모든 인간’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용어를 바로잡고, 당면한 기후위기를 자본주의적 환경재난으로 규정하기 위해 좌파 생태주의자들은 ‘인류세’란 용어를 ‘자본세’로 정정한다. 그래야 우리의 목표가 ‘기후가 아니라 체제를’, 인간 본성이 아니라 정치와 경제를 바꾸는 것으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투자자 관점과 시장 프레임을 환경단체들도 그대로 가져와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화석연료산업은 더 이상 투자할 가치가 없으니 재생에너지에 투자하라고 기업을 설득하는 전략이 대표적인데, 이런 투자 유인은 상당히 위험하다. 1990년대 이후의 기후위기 가속화는 금융자본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최근 삼성은 베트남 석탄화력 발전소에 투자했다가 국제 환경단체들로부터 큰 반발을 샀다. 국제 환경단체들은 삼성 스마트폰에만 초록 배경으로 나타나는 검은 발전소를 포스터에 담아 “삼성은 석탄을 걸러낼 수는 없다”는 문구로 범죄 은폐 기업을 고발했다. 반면 국내 환경단체들은 손실 투자를 재고하라는 기업가적 조언을 하고 잇었다. 어디서 투자수익이 나올지는 자본이 가장 잘 안다. 모르는 것은 그것이 가져올 파괴적 결과와 그에 대한 책임과 윤리의식일 뿐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과거 후진성의 증거로 간주되던 석탄사용량은 1995년에서 2005년 사이 35%나 증가했다.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이와 함께 가파르게 상승했다. 탄소배출량 대가속화의 시대는 21세기의 기이한 ‘석탄 르네상스’와 맞물려 있다. 세계화와 금융화가 분명한 배경이다. 2008년 금융시장 붕괴 후에야 자본은 기후위기와 경제위기를 연결시켜 대안을 모색한다. 녹색성장론은 당시에도 대중적 위기감을 이용한 자본의 출구전략이었다. 당시 IEA는 석탄수요가 2030년까지 75% 정도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2) 석탄은 에너지원일 뿐 아니라 철강산업의 주원료이기 때문이다. 전기자동차, 녹색 건설, 스마트주행도로, 풍력발전동체 등 녹색시장이 커질수록 철강 수요도 늘어난다. 유럽 석탄 철강 산업동맹을 모태로 출발한 EU는 이제 유럽 그린딜(EGD)을 통해 새로운 탄소-에너지 동맹과 녹색 자본주의를 만들어내고 있다.

유럽의회가 채택하는 기후 에너지 정책들은 역내 산업 보호 및 세계 시장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목표와 연결돼 있으며, 그런 점에서 그린딜 역시 문제가 많다. 우선 대중이 알아듣기 힘든 개념적 조작이 첫째 문제다. ‘넷제로’라고 불리는 탄소중립 개념은 마치 탄소를 줄여 발생량이 영(0)이 되도록 하는 것 같지만 실은 발생량(+)과 상쇄량(-)을 계산해 계산값이 제로(0)가 되도록 하는 방식이다. 탄소를 아무리 배출해도 그만큼의 상쇄량을 맞추면 넷제로는 달성된다. 석탄발전소를 돌려도 그만큼 나무를 심거나 탄소포집을 하거나 배출권을 구입하면 탄소제로 기업이 되는 이상한 셈법이다. 지금 뱉어내는 탄소를 앞으로 나무가 흡수할 양으로 상쇄해주는 것은 일종의 눈속임이다. 그래도 탄소를 뿜으며 나무 한 그루 심지 않는 것보다는 그게 나은 것일까?


브라질의 대규모 유칼립투스 숲을 토착민들은 ‘더러운 녹색’이라고 부른다. 다국적 기업들이 탄소상쇄를 위해 토지를 헐값에 매입해 원주민을 내쫓고 생태계를 파괴하면서 인공적으로 조성한 단작지대 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철강기업인 포스코도 탄소배출권 확보를 위해 2002년 우루과이에 여의도 면적의 약 70배가 넘는 경작지를 매입해 유칼립투스를 심었다. 탄소배출권 거래제는 하나의 탄소 시장을 만들어냈다. 골드만 삭스는 탄소를 ‘미래의 화폐’라고 부른다. 기업은 이런 거래를 하면서 ‘나무를 심는 기업’으로 홍보하고 그것을 ‘탈탄소 경제로의 정의로운 전환’이라고 선전한다.

‘탈탄소’라는 개념 자체도 진실을 은폐한다. 중립적 개념처럼 보이지만 이 개념은 기후위기 문제를 탈정치적, 탈계급적 문제로 만든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매우 정치적인 개념이 된다. 왜냐하면 탄소환원주의 관점은 당면한 기후위기로부터 사회적•역사적 원인과 맥락을 소거하고 정치적인 문제들을 탄소관리 문제로 치환하기 때문이다. 탈성장과 탈자본주의를 말하지 않고 탄소의 관점에서만 접근하기 시작하면 생태주의는 지구관리학으로, 기후정치는 기술주의적 녹색소비실천으로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

탄소를 줄이기 위해 에너지원을 바꾸는 과정은 새로운 광물에 대한 수요를 창출한다. 유럽연합은 2017년 ‘갈등유발 광물’에 대한 조치를 입법화했다. ‘갈등 광물’을 구매할 때 기업이 생산지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보고할 의무를 명시한 것이다. 갈등유발 광물이란 현지에서 분쟁이나 내전 같은 갈등과 폭력 상황을 유발하는 광물을 말한다. 주석, 텅스텐, 탄탈, 금이 여기에 해당한다. 컴퓨터, 휴대전화, 노트북 등 전자제품의 필수 재료다. 독일의 자동차, 전자, 기계 산업은 이런 1차 금속에 완전히 종속돼 있다. “콩고에서 들여오는 코발트는 유럽인의 자동차 에너지 계획에 농축돼 있다.”(3) 전기자동차는 어마어마한 양의 코발트를 삼킨다. 독일은 2030년까지 전기자동차 600만 대를 공급할 계획이다. 전기차를 구매할 때 400유로의 지원금과 함께 세금 감면도 해준다. 하르트만은 이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환경과 기후를 보호하는 기술이지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불이익과 해로움은 여전히 남반구로 전가되고 있다고 비판하며, 이런 국가적 차원의 정책 또한 ‘국가의 그린워싱’이라고 말한다.(4)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압도적으로 많은 유럽 국가들이 탄소배출을 저감하는데 불리할 것 같지만 이런 식의 탄소 셈법에서는 자금과 기술에서 압도적 우위에 있는 나라들이 탄소제로화에 오히려 유리해진다. 이런 계산법은 ‘탄소세’, ‘탄소배출권’, 그리고 ‘탄소국경세’ 등에 모두 적용된다. EU가 내년부터 도입하는 탄소국경조정은 탄소저감을 위해 노력하느라 유럽의 역내 산업들이 손해를 보기 때문에, 그만큼 감축비용을 환급해주거나 역외에서 수입되는 상품에 대해 탄소세를 부과하는 등의 방식으로 경쟁력을 조정해주겠다는 것이다.

탄소를 맘껏 배출할 수 있는 역외 지역으로 산업이 빠져나가는 ‘탄소 누출’을 막는다는 의도도 있다. 그러나 환경적 조정이라기보다는 경제적인 조정 의미가 더 크다. 그런데 지난해 유럽 의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8년 이산화탄소를 가장 많이 배출한 역내 기업 중 7개가 독일의 석탄화력발전소였다. 이 탄소의 셈법은 북구의 부유한 나라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남반구의 가난한 나라의 생산품에 환경부담금을 징수하는 이상한 방식이다. OECD 국가들은 이 표준을 따라가거나 WTO 위반 등으로 법적 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 기술과 자본 면에서 여력이 없는 빈국의 입장에서는 따라갈 수도, 문제를 제기할 수도 없는 처지다. 유럽의 관점과 자국중심주의 관점에서 그린뉴딜을 보면 이런 문제들은 보이지 않는다. 국내 환경단체와 전문가들은 이런 탄소국경조정을 ‘모범적’인 것으로 설명하면서 한국도 이런 추세에 대응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지구 환경의 어떤 부분을, 어떤 방식으로, 어느 정도 보호할지 결정하는 것도 북구의 자본주의 선진국들인데, 왜 유럽기준이 세계표준이 되어야 하는지는 묻지 않는다.

기후위기를 성찰하는 그린 뉴딜은 식민주의도 반성하고 있을까? 유럽에서 그린딜 논의가 구체적 협의에 도달했던 시점에 인도와 남아시아를 포괄하는 미디어 플랫폼 잠후어(Jamhoor)에는 “여기에 해로움이 없다면 여전히 그곳이 해롭다는 것이다 : 그린 뉴딜과 글로벌 사우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5) 그린 뉴딜이 북구와 남구의 불평등을 더 심화시키고 서구 중심의 세계자본주의체제에 종속시킨다면, 글로벌 착취의 사슬을 고려하지 않은 일국 차원의 그린 뉴딜은 결국 새로운 식민주의적 기획이 될 수밖에 없다는 비판 기사였다.

그린 뉴딜 자체가 ‘글로벌 그린워싱’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기사는 그린 뉴딜이 기후변화를 안보위기로 취급하며 ‘현상유지’를 ‘안전상태’로 여기는 안보협약 성격으로 전환되는 것에 우려를 표한다. 국가와 기업 투자자가 주도하는 그린 뉴딜은 결국 친자본•친시장적인 정책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으며 자본만이 자유를 누리며, 상품과 노동에 대해서는 국경을 통제하는 패권적 신보호주의 전략으로 나아갈 가능성도 충분하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 민중이 참여권, 주도권, 통제권을 갖지 못한 채로, 탈성장, 탈자본, 탈식민주의를 말하지 않고, 노동 운동과 사회 운동 및 민주주의의 확대 없이, 신자유주의 정부에 의해 수립되는 ‘기후위기 비상사태’는 어떤 위험을 초래할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지금 같은 세계적 불안정과 반동기적 정세 속에서 그와 같은 ‘예외상태’의 수립은 에코 파시즘으로 귀결될 위험성이 매우 크다. 그러나 모든 것이 에코와 그린으로 아름답게 포장되고 있다. 녹색 유토피아는 심리적 안정을 주겠지만 그것은 현실이 아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먼저 녹색칠을 벗겨내고 진실을 대면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각주>
(1) 록 닙슨 지음, 김홍옥 옮김, 『느린 폭력과 빈자의 환경주의』 에코리브르, 2020.
(2) 베른하르트 푀터 지음, 정현경 옮김, 『기후변화의 먹이사슬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이득을 보는 사람들』 이후, 2011. 47쪽.
(3) 카트린 하르트만 지음, 이미옥 옮김, 『위장환경주의』 에코리브르, 2020. 116쪽.
(4) 카트린 하르트만, 위의 책. 5장 국가의 그린워싱 참고.
(5) Vijay Kolinjiadi & Ashish Kothri, “No Harm Here is Still Harm There : Green New Deal and Global South” Jamhoor. May20. 2020.
  • 문경락

    사고는 성장하기 전까지는 나타나지 않는다 라는 말이 있듯이 지금의 기후변화는 지금의 인류가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것으로 나타날 것이며 그때에는 지금의 예방적 조치의 비용보다 수만 수억배의 대가를 지불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