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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기후 운동, ‘우리’는 누구이고 ‘저들’은 누구인가?

[녹색 스트라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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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4일, 정부가 디지털 뉴딜과 그린 뉴딜을 축으로 하는 한국판 뉴딜을 공개한 후 시민사회의 반응은 싸늘했다. 발표 당일 나온 그린피스의 성명서는 “온실가스 감축 계획은 커녕 기본적인 기후위기 인식조차 결여”된 정부 계획을 일갈했다. 환경운동연합도 “탄소중립이나 생태계 복원 등의 과제들”을 간과한 채 “기존 사업들을 확대해 나열한” 정부 계획을 비판했다.

비판의 내용만 보면 정부의 그린 뉴딜 자체에 근본적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정부에 그린 뉴딜을 전면 폐기하고 제대로 된 계획을 재수립하라는 요구를 낼 법도 한데, 그런 목소리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린피스는 정부 정책에 “크나큰 실망을 표한다”는 말로 비판의 포문을 열었고, 환경운동연합은 정부 정책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조목조목 비판하면서도 이후 ‘보완’을 통해 “잘 추진되길 기대한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정부와 시민사회 간의 협력적 동반자적 관계가 이런 것일까? 마치 ‘정책이 엉망진창이라 우리가 비판은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너희 곁을 떠나진 않을 거야’와 같은 뉘앙스가 느껴진다.

논평만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정부의 한국판 뉴딜이 발표된 다음 날, 기후위기비상행동(비상행동)은 정부안에 기후위기나 “경제성장 중심주의와 사회적 불평등의 심각성” 에 대한 언급이 없다며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러나 논평을 통해 ‘구조적 변화’의 필요성까지 강조했던 비상행동의 피켓은 전 세계적으로 사용되는 ‘기후변화 말고 체제변화 (system change, not climate change)’ 대신 ‘기후변화 말고 사회변화’라는 애매한 문구를 담고 있었다. ‘체제변화’ 라는 표현은 너무 과격하다고 여긴 탓일까? 논평에 담긴 비판 정신과 피켓 문구 사이의 간극이 너무 또렷했다.

길지 않은 역사를 가진 한국의 기후 운동은 각종 교육 프로그램, 토론회와 더불어 공공장소에서의 피케팅, 기자 회견, 퍼포먼스를 주된 행동 전술로 삼아왔다. 언론 취재와 SNS를 매개로 한 메시지 전달에 집중하는 운동방식을 통해 기후 운동은 그나마 문제를 이슈화하고 대중적 공감대를 넓혀올 수 있었다. 그럼에도 ‘온건한’ 운동 방식을 답답해하며 보다 급진적인 기후행동을 갈구하는 기후 활동가들의 요구는 끊임없이 제기돼왔다. 우선 기후위기가 절박하고 급박한 문제라는 인식이 커지면서, 보다 비상하고 급진적인 행동의 필요성도 높아졌다. 정부나 기업이 기후 활동가들의 요구나 압력에 크게 위협감을 느끼지 않는 것 같은 분위기가 계속되다 보니 답답함이 쌓였던 측면도 있다. 여기에 해외에서 벌어지는 기후파업, 점거나 교통방해 같은 급진적 기후행동은 이런 문제의식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고민의 해결점이 잘 찾아지지 않는다. 온라인에서는 기후위기를 알리는 많은 정보가 공유되고, 공공장소 피케팅도 계속되고, 한국전력공사나 삼성 앞에서 해외 석탄화력발전소 투자를 규탄하는 행동들도 언론에 보도 되지만, 운동의 효능감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사회 운동은 많은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지만, 근본적으로 ‘우리’와 ‘저들’을 구분하는 현실 인식과 이 둘 사이의 적대적 관계를 동력으로 삼는다. 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이나 노동 운동에서부터 박근혜 탄핵 촛불시위나 최근의 급진적 페미니스트 운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활성화된 사회 운동에는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명징한 정체성 구분이 수반됐다.

정치적 정체성이 중요한 것은, 사회 운동이 사회적 갈등 조장을 통해 목표하는 바를 얻고자 하는 집단행위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갈등 상황은 예외 없이 진영 사이의 적대적 관계를 전제로 하는데, 여기서 사회 운동의 목표는 정당한 ‘우리’와 그렇지 못한 ‘저들’ 간의 싸움으로 사회적 의미화를 도모하는 것이다. 언론과 대중으로 하여금 ‘선과 악이 싸울 때, 어느 편에 설 건가’를 고민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야말로 사회 운동의 일차적 과제다.


적대적 관계에 기반한 정체성의 정치는 사회 운동 활성화에 필수적인 감정적 동원을 가능하게 해준다. 한국의 기후 운동은 과학적 지식과 정보의 유통에 많이 의존하는데, 각종 여론조사는 이미 한국인들의 기후위기 인식이 해외 어느 나라보다도 높은 수준임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기후 운동이 활성화되지 못했다면 그것은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지식과 감정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지 못한 탓이 크다.

멀리 찾을 필요도 없다. 87년 6월 항쟁은 박종철 고문치사와 이한열의 죽음을 거치며 정권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분노로 전환된 결과였다. 너무나 공고한 가부장제에 대한 절망과 분노, 그리고 같은 현실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공감과 연대는 많은 이들을 페미니스트로 만들기도 했다. 그전에는 정치가 어떻고 가부장제가 어떻고 하는 것을 몰랐기에 행동이 없었던 게 아니다.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던 현실이 감정의 역린을 건드릴 때, 행동은 폭발하고 지식도 사회 운동의 자원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이다.

많은 경우 분노의 동원은 급진적 사상 혹은 이념의 도움을 받는다. 국제 기후 운동의 급진적 행동을 보며 부러워한 적이 있다면, 이들의 행동 뒤에 어떤 이념이 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레타 툰베리가 UN 기후변화 회의에서 세계 지도자들을 향해 “당신들이 어찌 감히! (How dare you!)”라 일갈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기후위기의 절박성을 넘어 그 근본적 원인이 되는 성장 만능의 자본주의 체제와 이를 떠받치고 있는 정치체제에 대한 강한 불신과 분노가 자리 잡고 있었다.

예컨대 지난 7월 16일 툰베리를 비롯한 유럽의 학생 활동가들은 지금껏 권력자들이 단 한 번도 기후위기를 위기로 다루지 않았을뿐더러, 사회적 부정의와 억압으로 부터 눈을 돌리려 한다며 유럽 지도자들을 질타하는 공개 서한을 보냈다. 유럽 권력자들이 그린 뉴딜조차 단기적 경기부양책으로 삼으려 하는 것을 비판하며 이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는 존재론적 위기를 대하고 있고 이 위기는 무언가를 사거나 새로 짓거나 투자한다고 빠져나올 수 있는 위기가 아닙니다. 기후위기 극복을 위해 기후 위기의 근본적 원인을 제공해왔던 경제체제의 ‘회복’을 목표로 삼는 것은 너무도 부조리한 일입니다. 현 체제는 망가진 것이 아니라 애초의 디자인 그대로 잘 작동되고 있습니다. 고쳐 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에겐 새로운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이들의 관점에서 보면 기후위기는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도, 몇몇 화석연료 기업들만 탓할 문제도 아니다. 자연과 생태, 사람까지 체계적으로 착취의 대상으로 삼아왔던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위기의 원인이며 이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기후위기 극복도, 생태 다양성과 인간 공동체의 지속도 불가능하다. 그러기에 부정의와 억압의 피해를 받는 생태계와 대다수 인류를 포함하는 ‘우리’는, 이 체제에 기대 끊임없이 이득을 취하는 ‘저들’ 자본과 권력자들에 분노하며 맞서 싸우는 것이다.

이에 반해 한국의 기후 운동에서는 ‘우리’와 ‘저들’의 구분을 찾기 힘들다. 대신 기후위기 극복이라는 당위와 수치화된 탄소배출 감축이나 재생에너지 확대 목표가 주된 동력을 이룬다. 당위는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과학적 지식에 기반한 수치도 기후 운동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 그러나 수치화 된 목표만 부각되다 보면 기후위기가 사람의 문제라는, 사람이 겪는 부정의와 억압의 문제라는, 하여 사람의 문제가 기후위기 대응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기후정의 감수성이 들어설 자리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는 “돈 벌려고 열심히 하니까 지구가 지켜지는 정책” 이라며 그린 뉴딜을 홍보하는 국회의원이나, 경제적 이득에 따라 움직이는 태양광업자, 그리고 재벌그룹 임원까지 기후위기 전사를 자처하며 기후 운동의 틀 안에 들어와 있다. 이런 상황에서 꿈꿀 수 있는 급진적인 기후 운동은 무엇일까? 이런 상황을 해외의 기후정의 활동가들은 어떻게 볼까?
  • 허지운

    뒷통수를 한 대 맞은 듯 얼얼한 느낌이 드는군요. 정말 좋은 기사입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이런 문제점을 콕 찍어주는 기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