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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로프 팔메’ 스웨덴 총리 암살사건은 종결 됐나

[1단 기사로 본 세상] 팔메 총리가 막판에 뛰어든 무기산업과 걸프전 중재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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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주요 언론사가 단신 처리한 작은 뉴스를 곱씹어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려고 한다. 2009년 같은 문패로 연재하다 중단한 것을 이어 받는다. 꼭 ‘1단’이 아니어도 ‘단신’ 처리한 기사를 대상으로 한다.

1993년 복학해 ‘스웨덴 식 사회민주주의’를 읽으며 큰 충격을 받았다. 우리가 개량적 사민주의로 욕했던 스웨덴이 1919년부터 1986년까지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딱 2년 반을 제외하곤 모두 사민당이 집권했다. 오늘날 스웨덴 식 사민주의는 시민들의 이런 강고한 믿음으로 세워진 왕국이었다. 물론 문제점도 많지만.

그 중심에 올로프 팔메(1927~1986) 총리가 있다. 올로프 팔메는 사회민주당 소속으로 1969~1976년, 1982~1986년 두 차례 총리에 올랐다. 베트남전에 반대하고, 인종차별 정책을 펴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정권을 강하게 비난하고, 미국과 소련 모두를 비판했던 팔메는 주말 저녁 시내에서 영화 보고 되돌아가다가 괴한의 총격에 숨졌다.

팔메는 아내와 함께 1986년 2월 28일 금요일 저녁 집에서 지하철을 타고 스톡홀름 시내 한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다시 지하철역까지 걷다가 밤 11시 21분쯤 총에 맞았다. 주말이라 경호원은 낮부터 돌려보냈다. 현직 총리가 수도 한복판에서 총격으로 숨지자 세계가 놀랐지만 정작 경찰은 미적댔다. 스웨덴 경찰은 2년이 지난 1988년 한 마약 중독자를 용의자로 체포했지만 결정적 증거가 없어 항소심과 대법원이 무죄판결을 내렸다. 경찰은 공소시효 25년이 끝나가는 2011년 중간발표를 했다. 정부는 특별법을 적용해 시효를 연장하고 2016년 수사를 재개했지만 범인을 잡지 못했다. 34년간 100여 명이 넘는 사람이 “내가 범인”이라고 주장했지만 스웨덴 경찰은 이유 없이 수사에 소극적이었다.

스웨덴 검찰 34년 만에 종결 발표

  매일경제 2020년 6월11일 12면

스웨덴 검찰이 지난 10일 34년간 미제로 남았던 팔메 암살사건을 종결한다고 발표했다. 11일 매일경제신문이 12면에 ‘34년 만에 밝혀진 스웨덴총리 암살범’이란 제목으로 이를 단신 보도했다. 다음날인 12일엔 동아일보가 18면에 ‘팔메 스웨덴 前 총리 암살사건, 34년 만에 미제 종결’이란 제목으로 역시 짧게 보도했다. 매일경제는 암살범이 밝혀졌다는 쪽에 비중을 뒀지만, 동아일보는 ‘미제 종결’에 방점을 찍었다.

스웨덴 검찰은 지난 10일 “유력 용의자로 현장에 있었던 당시 52살 스티크 엥스트롬이 범인인 게 분명하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검찰은 “엥스트롬은 2000년 자살해 추가 취조나 수사, 기소가 불가능하다”고 덧붙였다. 검찰은 엥스트롬이 당시 보험회사 그래픽 디자이너였지만 군인 출신으로 사격에도 능했고, 팔메가 추진하는 적극적 복지정책에 반대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했다. 사건 초기 경찰은 엥스트롬을 용의선상에 올렸지만 “총 맞은 총리를 도와주려 했다”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체포하지 않았다. 경찰은 엉뚱한 사람을 계속 쑤셔댔다. 스웨덴 검찰이 사건 종결을 발표하면서 엥스트롬을 범인으로 단정했지만 의혹은 여전히 계속된다.

  동아일보 2020년 6월12일 18면

팔메는 단 한 번도 노동자 생활을 하지 않은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나 1950년대부터 국회의원을 거쳐 1969~76년까지, 1982~86년까지 총리를 지냈다. 그가 암살됐을 때는 다시 4년의 총리 임기를 막 시작한 때였다.

우리는 팔메 총리를 스웨덴 복지의 아버지쯤으로 평가한다. 지금도 스웨덴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인 팔메는 ‘남녀평등을 보장’하고 ‘보편적 복지’를 확대했다. 연대 임금제도의 부작용을 개선하고 ‘노동자 권리’를 강화하기 위한 제도를 잇달라 도입했다. 팔메는 이미 반세기 전에, 우리가 지금 맞닥뜨린 ‘남녀평등’ ‘보편적 복지’ ‘노동인권’ 등을 강화했다.

팔메는 미국과 소련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제3세계 국가를 지원했다. 여기서 머물지 않았다 늘 전운이 감도는 중동 평화를 위한 중재자로 직접 뛰어들었다.

암살은 팔메의 외교활동에서 출발

암살은 팔메의 외교 활동과 관련이 있다. 팔메는 걸프 전쟁에 개입했다. 팔메는 스웨덴의 주요 수출산업 중 하나인 ‘무기 수출의 걸림돌’이었다. 팔메의 결정은 스웨덴 무기 제조사의 영업에 큰 타격을 줬다.

사건 일주일 뒤 스웨덴 경찰은 빅토르 군나르손을 검거했지만 당일 풀어줬다. 군나르손은 특별한 직업도 없이 여러 극우단체에 소속돼 팔메를 극도로 증오했다. 풀려난 군나르손은 미국으로 이민 가 1993년 나이 마흔에 전직 경찰이 쏜 총에 죽었다. 그의 죽음엔 스웨덴 군부나 극우파가 연루됐다는 소문이 무성하지만 실체가 밝혀지지 않았다.

스웨덴으로 망명 온 이라크계 쿠르드노동자당도 용의선상에 올랐다. 팔레 암살 당시 스웨덴 거주 쿠르드계는 7천여 명이었고 지금은 10만 명에 달한다. 팔메는 1982년 총리로 재집권한 뒤 이란과 이라크를 오가며 전쟁을 중재했다. 쿠르드계에게 유리한 정책을 편 팔메는 그들에게 죽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2010년 스웨덴은 전 세계 무기 수출 9위의 나라다. 중립국인 스웨덴은 법으로 “전쟁 중인 나라와 전쟁할 위험이 있는 나라, 인권침해가 보고된 나라에 무기를 팔지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팔메가 이란과 이라크를 오가며 평화협상을 하는 동안, 노벨상을 만든 노벨 가문의 무기회사 보포르스는 이란에 계속 무기를 공급해왔다. 보포르스는 명백히 스웨덴 법을 어겼다. 팔메는 보포르스의 거래 내역을 조사했다. 솔직히 팔메가 보포르스가 불법으로 이란에 무기를 수출하고 있음을 정말 몰랐는지는 의문이다.

‘무기 수출국’ 스웨덴의 민낯

팔메가 죽기 24일 전 이란의 국방 담당 외교관이 스웨덴을 찾아와 팔메를 만나 주문한 무기가 도착하지 않았다고 공식 항의했다. 팔메가 암살당한 지 1년쯤 뒤에 무기 불법수출을 조사하는 알게르논 장군이 조사발표 일주일을 앞두고 지하철 승강장에서 떠밀려 의문을 죽음을 당했다. 죽은 알게르논 장군은 보포르스 사장과 개인적으로도 잘 알았다.

스웨덴 역사학자 얀 본데손은 “팔메가 암살당한 그날 낮에 주 스웨덴 이라크 대사를 만났고, 대사로부터 보포르스가 이란에 대규모로 무기를 불법 수출한 사실을 들었다”고 썼다. 그는 이 때문에 “보포르스가 자기 영업을 방해하는 팔메를 영원히 잠재웠을 것”이라고 썼다.

스웨덴 경찰이 의도적으로 무능하게 대처했거나 암살자와 협력 관계라는 소문도 무성했다. 사고 현장에서 차로 1분도 안 되는 곳에 순찰차가 있었지만 도착하는 데 4분이나 걸렸다.

스웨덴의 유명 범죄학자 페르손도 경찰 연루설에 힘을 싣는다. 그는 “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았지만 우리 사회 안에 있다”고 했다.

2006년 스웨덴 방송사는 마약 거래상에게 사기를 당해 화가 난 청년 페테르손이 팔메를 마약상으로 오해해 쐈다고 보도했지만, 아무리 마약 하는 청년이라도 몇 km를 미행하면서도 팔메 부부를 마약상으로 오해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인종 차별정책을 비판해온 팔메를 죽였을 것이란 소문도 있지만 증거는 없다.

전직 군인인 이반 폰 비어한은 2012년 3월 유튜브에 팔메 암살을 상세히 밝히며 양심 선언을 했다. 전투기 조종사였던 비어한은 미국 CIA가 자신에게 팔메 암살을 의뢰했다고 했다. 결국 미국 CIA가 스웨덴 내부 조력자의 도움으로 팔메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리비아 독재자 카다피의 부하였던 비어한이 팔메를 죽이면 미국은 팔메라는 장애물 제거와 함께 리비아 침공 명분도 챙기는 일석이조였다. 암살 현장에 출동했던 경찰 안티 아부산은 뒤에 판사가 되고 3선 국회의원까지 지냈다.

2012년 8월엔 스웨덴 재벌기업 상속자가 팔메 암살을 언론에 제보했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이렇게 34년간 복잡하게 얽혀 있는 팔메 암살사건을 스웨덴 검찰의 지난 10일 발표 한마디로 ‘엥스트롬이 진범’이라고 낙인찍는 우리 언론의 단정이 놀라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