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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피해자들은 그렇지 않다

[꿘 여성의 생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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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남성 중심적인 작품에 대한 문제의식과 여성 서사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들이 늘어나고 있다. 소재나 내용 면에서도 로맨스에만 국한되지 않고, 주인공의 성장 과정이나 여성들 간의 우정 혹은 사랑을 다루는 등 다양한 작품들이 많이 생겼다. 여주인공의 성격도 더 이상 수동적이지 않다. 문제를 해결하고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주체적인 모습이 부각되면서, 여성에 대한 고정된 상이나 편견도 많이 바뀌었다. 무엇보다 여성들도 공감하고 몰입할 수 있는 작품들이 많아졌다는 것이 가장 큰 의의일 것이다. 실제로 페미니즘적인 작품을 보며 용기를 얻었다는 사람들도 많다. 이는 분명 굉장히 고무적이고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페미니즘 성향의 웹툰이나 드라마 등으로 현실에서 일어나는 여성폭력을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사실 대부분의 페미니즘 성향의 작품들조차 해피엔딩을 원하는 대중 취향에 부합해, 여성 캐릭터들이 고난 끝에 성공을 거두는 결말로 끝나버리는 경향이 있다. 가볍게 보는 입장에서야 그편이 ‘사이다’이고 ‘꿀잼’이겠지만 오히려 이는 현실을 왜곡시킬 우려가 있다.

예로 들어 최근 즐겨보는 《화장 지워주는 남자》라는 네이버 웹툰이 있다. 이 작품에서는 주인공이 가스라이팅을 하는 남자친구와 비교적 빨리, 그리고 쉽게 헤어지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주인공이 애인보다 여러 사회적 자원과 권력을 더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개상 비현실적이거나 개연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웹툰 밖 현실에서 여성들은 연애 관계에 있는 남성보다 권력과 자원이 훨씬 적은 경우가 많다. 때문에 그나마 있는 자원이라도 유지하기 위해 폭력임을 알면서도 감내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놓이게 된다. 여성이 그 관계를 끊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와 용기가 필요하며, 매우 고통스럽고 지난한 과정들을 거쳐야만 한다.

물론 현실에서 여성/소수자들은 대부분 무력하고 현실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는 패배주의적인 생각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실적으로 강자와의 싸움에서 이기기까지는 매우 많은 자원과 고통이 필요하다.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굉장히 비효율적이며 지지부진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싸움에 임하는 이들이 결코 수동적이거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하지만 많은 페미니즘 작품들은 이러한 사실을 생략하고 있어, 독자들이 이를 간과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 이는 곧 현실의 폭력에 대한 몰이해와 피해자를 향한 비난을 심화시킬 수 있다.

필자의 경우만 해도, 최근 여러 운동단체가 필자에게 오랫동안 성폭력 2차 가해를 했던 조직과 연대 중단을 결정하면서 많은 사람이 축하를 보내왔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까지 무려 10년에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이뿐 아니라 만약 필자의 투쟁사를 소설로 쓴다면 단언컨대 모두에게 욕먹는 주인공, 소위 ‘민폐형 여주인공’이 될 것이다. 그리고 댓글 창에는 “더 이상 못 보겠네요. 하차합니다”라는 말들로 도배될 것이다. 실제로 그동안 나를 ‘더 이상 못 참아주겠어서’ 떠났던 동지들도 매우 많다. 필자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불의에 맞서 거침없이 싸우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필자 역시 창작물 속의 캐릭터가 아닌 현실 속을 살아가는 인간이다. 필자는 자주 징징댔고 엄청 찌질했으며 의존적이었다. 그래도 그 일에 대한 문제제기는 정당했기에, 결국 ‘이한’이라는 개인의 호불호를 떠나 많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 문제의식에 동의를 표하게 됐을 뿐이다. 물론 필자가 투쟁하는 이들의 대표가 될 수 없고, 서사가 보편적이라고 말할 수도 없겠지만, 현재 다수 존재하는 페미니즘 작품들만으로는 이런 싸움을 해석하고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작품과 현실은 구분해서 봐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고구마’ 같은 상황을 보여주는 피해자들을 비난하고 욕하는 것은 웹툰 댓글에서만이 아니다. 현실에서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매일 헤어지고 싶다느니, 데이트폭력으로 힘들다느니 하면서 대체 왜 안 헤어지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한다. 이들은 처음엔 선의를 가지고 피해자의 얘기를 들어주며 조언하지만, 피해자가 계속해서 그 조언을 따르지 않으면 자신이 ‘감정 쓰레기통’이 된 것 같다며 결국 피해자를 떠나고 만다. 그냥 떠나기만 한다면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다. 심한 경우, 이들은 피해자들을 미워할 뿐 아니라 오히려 가해자의 편에 서서 2차 가해에 동참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이들이 하는 말은 항상 대동소이하다. 자기가 본 피해자들과는 다르다고, ‘진짜 피해자’가 아닌 것 같다고. 그리고 이들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진짜 피해자’는 여성 폭력을 다룬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피해자들이다. 물론 이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의 얘기를 들어주고 피해자를 위로하는 것은 엄청난 감정노동이니까. 단지 이들의 문제는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뭘 해야 할지도 모른 채 그 감정노동에 뛰어들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문제의 책임을 페미니즘적인 소재와 주제를 담고 있는 작품들에 전적으로 돌리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런 작품들을 보고 피해자의 모습과 상황을 단편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최근 유행하는 많은 페미니즘 작품은 복잡하고 다루기 어려운 주제들을 대중적으로 풀어내기 위해 최대한 쉽고 간결하고 흥미롭게 스토리텔링한다. 그 결과 이러한 트렌드를 따라가는 페미니즘 작품들은 많은 이들에게 손쉽게 정의구현을 목도하게 하고, 부담 없는 방식으로 피해자를 지지할 수 있게 한다. 문제는 이런 방식에 익숙해진 사람들 중 일부는 현실의 문제도 그렇게 처리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에게는 페미니즘 작품들의 ‘사이다’ 장면이 더 이상 온전한 사이다로만 느껴지지 않는다.

분명 페미니즘 문화 콘텐츠들은 그동안 척박했던 남성 중심적인 문화에 단비가 돼 줬다. 아울러 사회·문화적으로 외면 받던 여성들의 욕구를 채웠으며,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폭력 등에 관심과 각성을 촉구하는 역할을 해왔다. 그럼에도 대중적인 페미니즘 작품들만으로는 보여줄 수 없는 현실의 문제와 오롯이 운동을 통해서 풀어가야 하는 영역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대중문화에서 보여주는 단상과 실제 현실 사이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