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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말하는 ‘힙지로’는 도대체 어디입니까?

[레트로스케이프] 생산과 소비 그리고 금융의 전장으로서 을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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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트로 문화의 상징으로 부상한 을지로

을지로는 뉴트로 문화를 상징하는 지역으로 부상했다. 70년대 이후부터 도시와 산업에 필요한 생산활동이일어나는 서울의 대표적인 도시상공업 지역으로 명성을 떨쳐 왔지만, 몇 해 전부터 변화의 조짐이 눈에 띄게 나타났다. 임대료가 싼 공간을 찾던 예술가나 창업가들이 을지로 일대의 오래된 건물들에 입주해 작업실이나 상점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공간들은 일종의 하위문화 공간으로 주목을 받았다. 더불어 재개발과 재건축으로 명동과 종로 쪽에 고층 빌딩들이 세워지며 회사원들의 왕래가 잦아졌다. 서울시와 중구청이 청계천-을지로-세운상가 일대 도시재생 사업을 진행하면서 관심이 쏠리기도 했다.

을지로 일대에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는 건축물들 사이로 난 골목길이 주는 묘한 분위기. 그리고 곳곳에 숨어 있는 하위문화적 공간들이 풍기는 레트로한 미적 감각. 이는 구별 짓기를 추구하는 발 빠른 힙스터 대중들의 취향과 조응했다. 특히 연예인이나 인플루언서들이 을지로를 방문한 사진들이 인스타그램에 공유되면서 대중들 사이에서 을지로가 ‘힙하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리고 이제 을지로의 ‘힙’한 문화를 즐기기 위해 많은 사람이 을지로로 몰려들고 있다.

‘힙지로’는 무엇의 이름인가?

일상화된 여러 미디어를 통해 접할 수 있는 을지로는 말 그대로 ‘힙지로’로 한정된다. 언론뿐 아니라 유튜브, 인스타그램, 포털 등에서도 이 지역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난다. 하지만 이런 콘텐츠로 소개되는 곳들은 이미 미디어에 노출된 개성있는 식당이나 카페, 유명한 몇몇 노포와 노가리 골목 정도다. 미디어를 통해 유포되고 재생산되는 힙지로는 오래된 간판과 건축물 등 레트로한 미적 요소들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먹고 마시는 촉각적인 즐거움 누릴 수 있는 여가공간이자, 자신이 이곳에 있었음을 사진으로 남겨 SNS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과시할 수 있는 상징적인 놀이공간이다.

그렇다면 ‘힙지로’는 이런 점적인 공간들의 집합인가? 실제로 ‘을지로’라는 말은 시청에서부터 한양공업고등학교 앞까지 길게 뻗어진 선적인 길을 가리키는 용어다. 법정동으로는 을지로1가에서부터 을지로7가까지를 포함하는 공간이며, 행정동으로는 을지로3,4,5가 구역을 묶어 을지로동이라고 부른 지역이다. ‘힙지로’라고 언급되는 몇몇 업체들은 이 지역을 구성하고 있는 극히 일부의 점일 뿐이다. 게다가 이 지역의 대표성이나 상징성을 갖기에는 지역이 구축해왔던 장소성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곳들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힙지로는 을지로 본연의 모습을 장소 마케팅한 것이 아니라, 상업화하고 싶은 뉴트로라는 문화상품을 을지로에 가져다 씌운 것에 더 가깝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적 상상이 현재 을지로가 아니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 같은 상상을 현실화하려는 움직임이 강해지면서 지역의 정체성이 계속 변화하고 있고, 이 변화가 광범위하고 자발적인 대중들의 동의를 얻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축적된 지역의 고유한 정체성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고, 이를 만들어왔던 여러 힘들이 계속해서 충돌하고 있다.

재개발 압력에 맞서 싸우고 있는 전장

청계천과 을지로 일대에 형성된 도시상공업 공간은 생산과 소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거대한 시장이다. 정밀가공을 중심으로 기계금속, 전자전기, 부품 및 공구, 시계수리, 귀금속, 메달, 조명 및 타일, 인쇄, 봉제 등 소규모 제조업 공장들이 있고, 생산활동에 필요한 자원을 조달하거나 생산물을 유통하는 여러 업체들이 밀집돼 있다. 따라서 이 공간들은 생산활동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변화해왔고 이런 과정을 통해 현재의 도시상공업 지역이 형성됐다. 경제위기의 여파도 있었고 도시 계획가들과 정책결정권자들의 개입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지금의 지역 상권과 문화를 만든 건 생산활동을 둘러싼 뒤엉킴이다.

이러한 지역적 조건 속에서 지금의 을지로는 소비를 중심에 둔 문화적 상상을 현실화하려는 힘과, 청계천 을지로 일대를 재개발하려는 자본-정부 연합체의 압력에 큰 영향을 받고 있다. 지역 제조업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기계금속가공 지역의 일부가 철거됐고 이곳에 고층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다. 이 과정에서 오랫동안 일해 왔던 상공업노동자들은 비자발적으로 퇴출당했다. 지역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내쫓는 상황은 60년대 말 세운상가 건립 전후로 일어났던 청계천 판자촌 철거 사건이나, 삼일고가도로 철거, 청계천 복원 과정에서의 상공인들 강제 철거 사건과 유사하게 반복된다.

재개발 압력에 맞서 싸운 을지로의 상공인들과 시민들은 상인 이주 방안이 없는 한 재개발을 진행하지 않겠다는 서울시의 대책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일부 구역에 한해서 재개발이 해지될 예정이다. 하지만 정밀가공과 공구상가 지역은 그대로 주상 복합 개발이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재개발로 인해 대규모 자본이 들어오고 공간이 금융화되는 순간,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나면서 이곳의 정체성을 형성했던 물리적 도시조직과 고유한 문화는 그 뿌리부터 흔들릴 것이다. 이를 막고 산업 생태계로 도약하기 위해 상공인들과 시민들은 여전히 투쟁 중이다.

‘힙지로’ 현상은 오래된 공간의 변화를 추동하는 문화적 상상력과 그 실제적 힘이라고 말할 수 있다. ‘힙지로’라는 뉴트로 문화를 계기로 을지로에 도달했다면, 이제는 소비공간 만이 아닌 생산 공간과 투쟁 공간으로서의 을지로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힙지로’의 낡지만 새로운 뉴트로 문화를 새롭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재개발 압력에 맞서 상공업 노동자들이 지역의 장소성을 보존하고 산업 생태계를 활성화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전장이라는 의미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