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언론 참세상

노동정치

[워커스 사전]

메뉴보기: 클릭하세요. V


“인종주의자냐, 자본주의자냐(racist or capitalist)?” 2017년 프랑스 대선 당시, 마린 르펜과 에마뉘엘 마크롱이 결선투표에 올라갔을 때, 파리 시내의 선거 벽보는 이런 낙서로 훼손됐다. 한 사람은 아버지로부터 정치적 자산을 세습 받은 극우 정당의 당수이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자신이 금융자산가이자 자본가다. 결선 투표제도는 매우 합리적이고 보다 민주적인 제도라고 평가된다. 하지만 그 민주적인 선거 제도가 만들어준 선택지 앞에서 파리의 인민들은 대체 둘 중에 누구를 찍으란 말이냐고 묻고 있었다. 2016년 트럼프와 힐러리가 미국 대선에서 맞붙었을 때도 비슷했다. “파시스트냐, 금융업자냐(fascist or financier)?”

선거에서 정당과 후보들이 구사하는 전략은 정치적 이념이나 계급성보다는 정체성에 호소하는 것이다. 르펜은 ‘여성으로서’ 여성의 지지를 호소했고, 마크롱은 ‘젊은 사람으로서’ 세대의 지지를 호소했다. 이런 구도와 전략은 2016년 힐러리와 트럼프의 미국 대선에서도 똑같이 나타났다. 실리콘밸리의 벤처 기업가들과 월가 금융자본의 지지를 받으면서도 힐러리는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포장했고, 인종주의적 차별과 혐오를 선동하던 트럼프는 소외된 미국 노동계급의 대변자로 자신을 포장했다. 인종주의자를 막으려면 자본주의자를 찍어야 하고, 자본주의자를 막으려면 인종주의자를 찍어야 한다. 그러나 양당의 친기업 반노동 정책은 대동소이하다. 한국 상황도 이와 다르지 않다. 지난 21대 총선에서 리버럴 중도우파 세력인 더불어민주당과 위성정당은 과반 이상의 의석을 차지하며 대승을 거뒀다. 극우의 정치적 부상이라는 전 세계적 경향 속에서 극우 정당의 참패와 리버럴의 압승은 이례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인종주의자 대 자본주의자의 구도는 동일하며, 마크롱이 마린 르펜을 이긴 것처럼 더불어민주당은 미래통합당을 이겼을 뿐이다. 이 승리는 누구의 승리였을까? 극우보수당도 103석을 차지했다. 민주당과 통합당을 합친 의석은 283석이다. 여기에 무소속까지 합치면 21대 국회는 극우와 중도우파가 완전히 장악했다. 이번 선거는 범진보 진영의 압승이 아닌 범보수 진영의 압승이었다. 기득권층은 승리했고, 패배한 것은 인민이다.

이러한 ‘보수 대 진보’라는 구도는 정확한 것이 아니다. 보수 대 진보는 서구 의회정치의 오랜 문법이다. 한국에서 이것은 독재 대 반독재, 친일 대 반일, 산업화 세력 대 민주화 세력 같은 구도로 재생산돼왔다. 그러나 현실의 다수는 보수에 있거나 진보에 있지 않다. 실제 사람들의 위치는 정규직 대 비정규직, 임대인 대 세입자, 채권자 대 채무자, 자산가 대 무산자, 취직자 대 실업자 등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이들을 가르는 계급적 구도는 지배와 피지배의 정치적 관계로 드러나지 못하고, ‘보수 대 진보, 독재 대 반독재, 친일 대 반일, 산업화 대 민주화 세력’ 등 부르주아 시민 정치가 만들어낸 왜곡된 구도 속에서 계속 은폐된다. 이런 상황은 ‘노동정치’의 필요성을 긴박하게 호소한다.


우리는 노동정치를 어떻게 개념적, 실천적으로 재구성해야 할까? 일반적으로 노동정치는 노동자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치 세력의 형성, 즉 노동자정치세력화와 그것을 위한 실천 행위로 이해된다. 노동자정치세력화라는 말에서 사람들은 보통 노동정치의 원내 진입을 생각한다. 1990년대 이후 선거 투쟁과 원내 진입이 노동자정치세력화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자 목표였기 때문이다. 선거와 의회는 노동문제를 쟁점화하고 계급적 이해를 제도 안으로 관철시키기 위한 중요한 정치적 장으로 인식됐다. 하지만 노동정치에 대한 의회주의적 해석이 강화될수록, 노동정치의 다른 장소들은 점점 사라지고, 노동정치의 주체도 흐릿해졌다.

정당과 의회정치를 중심으로 노동정치가 재편되면 선거와 득표가 중요해지고, 이것은 진보적 자유주의 세력과의 연대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변경시킨다. 이 과정에서 노동정치는 점차 진보정치의 하위 범주가 되고, 노동정치가 진보적 의제를 대변하는 것이 아닌 진보정치가 노동의제를 대변하는 형식으로 전도된다. 노동 문제는 노동, 환경, 인권, 평화, 페미니즘, 차별, 혐오 문제 등 진보정당이 수렴하는 ‘진보적 대안들’ 내의 한 영역으로 재배치되고, 정체성 정치의 일부가 된다.

노동정치를 재구축하기 위해서는 진보정치와 노동정치, 시민정치와 노동정치 간의 관계를 다시 정립할 필요가 있다.

노동정치는 노동자 대표를 의회로 보내는 것을 넘어, ‘자본 대 노동’을 지배와 피지배의 정치적 구도로써 생산하는 것, 즉 그것을 정치적 관계로 인식하고 드러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노동자정치세력화는 대의정치 내의 한 분파로서 노동계급의 지분을 확대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정치는 노동계급의 정치적 힘을 점점 강화하고 주체화하는 반자본주의운동의 한 영역이 돼야 한다. 진보정치와 노동정치는 연대적 관계를 가져야겠지만, 연대를 위해서는 상호 주체성이 전제돼야 한다. 지금처럼 노동정치가 약화된 상태에서 진보정치의 하위 범주에 있는 형태라면, 노동계급은 진보적 시민사회에 계속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엘리트 계급 내부의 친노동적 진보 인사가 노동정치를 대표하고 노동자들은 그들을 지지하는 상황이 계속 반복될 것이다. 진보정당을 자처하는 정당에서 ‘노동자를 위한 정당’ 또는 ‘노동과 정치를 잇는’ 정당이라는 표현이 스스럼없이 나오는 것은 그런 배경에서다. ‘노동자를 위한 정치’나 ‘노동 존중 정치’를 노동정치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노동자가 어떻게 노동정치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 신자유주의적 노동유연화 정책으로 노동자들이 고립, 분산, 파편화돼 이제 전통적으로 ‘노동계급’이라고 부를 수 있는 노동자 집단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노동자들이 어떻게 독자적 노동정치 또는 노동자정치세력화의 길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앞으로의 노동정치 재구성을 위해 고민해야 할 지점을 짚어보기로 하자. 그것은 노동정치의 주체, 장소(위치), 조건, 목표, 이념에 대한 것이다.

가장 우선적인 것은 노동정치의 주체를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의 문제다. 노동계급 내의 양극화와 위계화 및 그에 따른 갈등은 기존 노동계급에 대한 재정의를 요구한다. 주체의 형성은 결국 계급의 형성인데, 분쇄된 계급은 어디서 부터 재건될 수 있을까. 최근 코로나19 사태는 그에 대한 한 가지 암시를 준다. 코로나19는 ‘사회 유지를 위한 필수 인력’이란 개념으로 ‘가장 중요한 사람들’을 드러냈다. 그들은 농업노동자, 보건의료노동자, 청소노동자, 식료품 마트노동자, 택배노동자, 콜센터 노동자, 물류센터노동자, 항만하역노동자 등이다. 사회의 가장 중요한 사람이 곧 가장 중요한 노동자다. 그렇다면 그들을 중심으로 노동계급의 주체를 재구성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 노동자들은 다른 의미에서는 가장 ‘약한 노동자’이자 가장 주변화되고 외부화 된 경계선의 노동자이고, 그리하여 ‘노동 외부의 노동’을 구성하는 노동자다. 정치의 주체는 언제나 가장 간절한 요구를 가진 사람들로부터 나온다. 노동권이 가장 취약하고, 그래서 노동자의 권리와 노동자로서의 자부심이 가장 절실한 사람들이 정치적 요구도 가장 간절하다. 계급적 자각과 계급의식의 형성도 마찬가지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노동 주체가 존재하는 곳으로 정치의 장소가 이동해야 한다. 결국 이것은 어디서 시작할 것 인가의 문제다. 이와 함께 시간과 공간의 재구성을 생각해야 한다. 노동자와 생산단지를 한 곳에 집중시켰던 방식이 생산에 대한 통제와 관리의 효율성 때문이었다면, 반대로 생산을 분산시켜 파편화하는 것 또한 노동에 대한 자본의 새로운 착취 수단이다. 시간과 공간으로부터의 자본의 해방은 노동자들을 시간적·공간적으로 착취함으로써 가능하다.

오늘날 자본은 ‘세계화된 생산체제’를 구축함으로서 생산의 장소를 유령화 하는 공동화된 공장(hollow factory)을 도처에 만들어내고 있다. 이 모델은 생산 공정을 전 세계적으로 흩어놓음으로써 공장을 어디에도 없고 도처에 있는 형태로 만들면서 생성과 파괴를 반복한다. 장소성과 연결성을 상실한 노동자는 어떤 공정에 속하는지, 누구의 노동과 연결되는지도 모른채, 극단적으로 부품화되고 사물화된다. 생산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점유는 노동자 주체성의 중요한 조건이다. 과거의 조건을 다시 회복하는 동시에 변화된 환경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정치의 장소를 포착해야 한다. 최근 그 장소들은 주로 정보와 에너지와 물류의 ‘연결 지점’에서 나타나고 있다.

사라진 노동정치를 위한 조건(수단)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다. 고대의 노동자, 데모스가 발명한 정치로서 아테네 민주주의는 여기에 시사점을 준다. 아테네의 민중들이 귀족들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민회에서의 참정권을 얻어 토론과 의결에 참여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테네에서 민중(demos)의 정치세력화는 그들을 노예 상태로 예속시켰던 부채 탕감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토지와 무기의 소유가 끝까지 권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준 물적 조건이었다.

고대의 노동자들이 토지에 예속돼 있었다면, 현대의 노동자들은 화폐에 예속돼 있다. 특히 금융자본주의 시대의 노동자들은 부채에 의해 노예화된다. 주택공급, 의료와 교육 서비스의 제공 등은 노동자를 지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시장을 통한 공급의 이면에는 ‘대출’이라는 방식의 부채통치가 정교하게 개입한다. 양적완화는 기업과 금융시장을 살리고, 긴축재정은 국민에게 국가 채무 상환의 책임을 지운다. 금융은 가장 강력한 자본의 통치 기술이다. 고대 인민이 쟁취한 토지에 대한 권리는, 오늘날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나아가 금융자본주의 시대의 화폐에 대한 공적 통제의 필요성을 알려준다. 무기의 소유는 노동계급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파업권과 단결권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이런 단결의 무기는 폭력기구를 독점하고 있는 국가와 자본의 탄압에 맞서 위력을 행사할 수 있는 노동계급의 물리적 수단이다. 이런 조건을 확보하기 위한 정책, 입법에 대한 개입과 통제는 노동정치의 중요한 과제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정치의 목표가 원내 진입이라는 의회 정치로 협소화돼서는 안 된다. 제도정치 내의 힘도 필요하지만, 그 힘을 만들어내는 근본적인 동력은 아래로 부터의 운동에서 나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운동의 주체와 조건을 만들어내는 것이 노동정치의 목표가 돼야 한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이 있다. 노동정치는 자본의 통치에 맞서는 총체적 이념을 생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노동정치에서 필요한 것은 ‘연결’이다. 각자 고립돼 있는 주체도 연결돼야 하고, 각각의 노동 현장도 연결돼야 하고, 각각의 사안과 정책도 연결돼야 한다. 이것을 연결할 수 있는 것이 ‘총체적 이념’이다. 그것은 노동 내의 일부를 담당하면서도 전체를 볼 수 있는 상을 가질 수 있게 한다. 지금 노동정치는 이 총체성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것이 곧 정치적 좌표가 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자본에 대한 노동자의 힘이 아무리 약하더라도, 전체에 대한 인식과 목표의 정당성에 대한 신념이 있다면, 주체는 사라지지 않으며 운동은 무너지지 않는다. ‘우리가 옳다’는 구호는 그것에 대한 노동자들의 직관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현장과 결합하는 실천적 사유와 담론 투쟁은 그 직관에 답해야 한다.


  • 정점

    노사과연에서 나온 20세기 사회주의의 역사적 성격(3)을 보았다. 이 말만 전하고 싶다. 그렇게 "연구를 할라면 하지 마라"고 연구가 진보된 것이 거의 없다. 트로츠키주의, 레닌주의, 글쓴이의 생각까지 다 섞어서 무슨 내용을 전달하겠다는 것인지. 참, 한심하다. 이념과 역사의 카오스라도 만들 심산이었나. 에휴, 연구자가 몰매를 맞을 수준이다.

  • 정점

    그리고 한국노총에 대해서도 연구를 하려면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어야 하는 것인데 깡패조직으로만 몰아버리면 안됩니다. 대한노총은 공장에서 전평과 노조로 경쟁했던 노조조직입니다. 북에서 넘어온 청년단체들이 깡패였지 대한노총이 깡패였다고 하면 너무 과한 평가입니다.

  • 아저씨

    반동본색이 껄떡거리는 단체가 그렇지 뭐, 고시끼 이젠 자선냄비 든 것 아니가. 그것도 불알 차고 연애나 하는 물건이 되기 쉽지 세상살이 중심잡고 인물되기는 거의 틀렸더라. 지금도 인물한테 걸려가 불알 딸랑딸랑거리기나 하지 뭘 하겠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