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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지하철 참사 17주기, 안전한 공공교통을 위한 여정

[르포] 대구 철도지하철 노동 현장 답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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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로역 화재참사 현장을 보존한 기억 공간에서 오열하는 유가족 [출처: 연정]

여러분의 사업장은 안전하십니까?

2월 17일 오후, 대구광역시 1호선 중앙로역 인근. 전국철도지하철노동조합협의회가 주최하는 ‘2.18 대구지하철 화재참사 17주기 철도지하철 노동자 추모집회’가 진행됐다.

“대구지하철 화재참사가 발생한지 17년이 흘렀습니다. 17년 동안 우리가 무엇을 바꾸어야할지 항상 고민하면서 왔습니다. ‘안녕하십니까?’라는 말 대신 ‘안전하십니까?’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동지 여러분, 여러분들의 사업장은 안전하십니까? 17년 전 대구지하철은 안전하지 못했습니다. 안전하지 못해 192명의 사상자와 151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자본의 논리와 이윤추구에 앞장선 불쏘시개(불에 잘 타는 자재로 만들어진) 전동차의 도입과 열차 운행 중 열차 전체를 책임져야 하는 1인승무제가 그 원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수직적이고 권위적이고 억압된 노동현장이 문제였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1인승무가 바뀌었습니까? 조직문화가 바뀌었습니까? 바뀐 건 없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 발언자인 대구지하철노동조합 윤기륜 위원장은 화재참사 이후 일부 시설물 보완이 이루어졌을 뿐, 궤도 노동자들이 요구하는 안전인력 충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이야기했다.

“안전 인력과 안전에 대한 교육 훈련은 거의 잡히지 않았고 더 나빠졌습니다. 1인승무가 무인운전으로 바뀌고 많은 역들이 1인 역과 무인역으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돈보다 안전, 국민 생명을 우선하겠다는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정말 그렇게 철도와 지하철 운영이 바뀌고 있나요?”

전국철도지하철노조협의회 조상수 상임의장은 문재인 정부 역시 인력운영 효율화의 고삐를 쥐고 있다며 비판했다. 또, 대구지하철 화재참사 이후 제정된 철도안전법은 노동자와 시민을 철도 안전의 주체로 세우지 않고 통제와 책임 전가의 대상으로 만들어 오히려 철도 안전을 위험하게 만들고 있다고 했다.

대구지하철 화재참사에서 희생된 시민·노동자를 추모하고 철도지하철 안전 문제를 노동자 입장에서 고민하기 위해 전국에서 철도지하철 노동자 2백여 명이 대구에 왔다. 이들은 이 집회를 시작으로 화재참사 현장답사와 교육, 다음날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에서 진행되는 2.18 화재참사 17주기 추모식까지 1박2일 일정에 참여할 예정이다.

노동자는 같은 희생자 최급을 못 받았어요

추모집회가 끝나고 철도 지하철 노동자들이 대구지하철 화재참사 현장 답사를 위해 중앙로역으로 이동했다. 대구지하철에서 역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정성기 씨(2003년 대구지하철노조 전 정책실장)의 안내로 중앙로역으로 가는 계단을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내딛는다. 중앙로역은 대구에서 가장 번화한 곳으로 승객이 가장 많다.

2003년 2월 18일 오전 9시 53분. 대구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 하행선 승강장에 정차한 1079호 1호차에서 김 모씨의 방화로 화재가 발생했다. 약 3분 뒤 반대 방향으로 운행하던 상행선 1080호 열차가 중앙로역에 정차하고 순식간에 불길이 옮겨 붙었다. 비용 절감을 위해 불연재가 아닌 값 싼 자재를 사용해 만든 전동차는 엄청난 유독가스를 배출하며 불에 탔다. 차량이 정차한 상태에서 방화가 발생했던 1079호의 경우 승객들의 대피가 신속하게 이루어져 희생자가 적었으나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지 못한 상태로 진입했던 1080호 열차에서는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다. 대구지하철 화재참사로 인해 사망 192명 부상 151명 총 343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지하 3층으로 돼있는 중앙로역은 지하상가와 연결된 복잡한 구조여서 평상시에도 지상으로 가는 출구를 찾기가 쉽지 않다. 화재참사 당시에는 역사 3개 층 전체의 전기가 나가 깜깜하고 유독가스가 가득 찬 상황에서 대피로를 찾는 것이 굉장히 힘들었다. 답사 참가자들이 지하 1층에 도착한다.

“승강장에서 한층 올라오면 B2(지하2층) 대합실이 있고, 다시 올라가면 B1(지하1층) 대합실이 있어요. B1에서 지상으로 나가는 출구는 4개가 있고, 지하상가로 빠지는 데가 2군데가 있습니다. 지하상가는 전기가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승객들 대부분이 그쪽으로 향했어요. 밖에 빛이 있으니까. 바깥 출구들은 계단이 길다보니 빛이 들어오지 못 하잖아요. 그랬는데, 방화셔터를 내려놓은 거죠.”

정성기 씨는 화재참사 당시 승강장을 탈출해 지하2층 대합실을 거쳐 지하1층 대합실까지 어렵게 올라와 살 수 있었던 승객들이 상가 쪽 방화셔터 때문에 많이 희생됐다는 이야기를 한다. 당시, 상가 보호를 위해 방화셔터를 고의로 내렸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기도 했었다.

지하2층 대합실 안쪽에는 대구지하철 노동자들이 근무하고 있는 역무실과 통신기계실 등이 있다. 통신기계실에서 정성기 씨가 다시 설명을 이어간다. 지하2층 가장 구석에 있는 통신기계실은 역무실 문을 열고 들어간 뒤에 복도를 지나 다시 철문을 열고 들어가게 되어 있다.

“통신 기계실에 두 분이 점검 차 나와 계셨거든요. 그 안에 계시다보니까 그때 당시에 연락을 못 받았습니다. 여기는 안쪽이라 불이 났는지 모르고 있었던 거죠. 뒤늦게 알고 나갔을 때는 이미 연기가 역무실 복도를 통해 계속 유입 돼 탈출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그 두 분은 여기서 질식으로 돌아가셨고요.”

통신 노동자 두 명은 각 역을 이동하면서 통신 점검 업무를 하는데, 화재참사 당시 중앙로역 통신기계실에서 업무를 하고 있다가 희생을 당했다. 당시 청소용역 노동자 3명과 통신·차량 검수 업무를 하던 노동자 4명 등 총 7명의 대구지하철 노동자가 화재참사로 사망했다. 지하철노동자 사상자 수는 총 20명(사망 7명 부상 13명)으로 전체 사상자 수의 6%에 해당한다. 하지만, 화재참사 직후 대구지하철 노동자는 희생자와 부상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지하철 노동자로 돌아가셨으니까요. 그때는 지하철 노동자는 죽어서도 같은 희생자 취급을 못 받았어요. 장례도 조촐하게 치러야 했고, 가족들도 어디 가서 이야기를 할 수가 없는 거죠. 마땅히 죽어야 될 사람이 죽은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으니까요. 보상 얘기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쟈들은 지하철 직원인데, 가해자가 죽었는데 왜 우리가 해줘야 되는데?’ 이런 반발이 있었죠. 부상자들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지하철 다닌다는 말도 못했어요. 했다가는 그 당시 분위기로는 맞아죽기 십상이었으니까. 살아난 거 자체가 죄인이었으니까.” (정성기)

역에 근무하는 사람은 근무복을 못 입었어요

부상자들은 병원에서 치료와 보상은커녕 사법처리를 먼저 걱정해야 했다. 승객들을 구조했는가의 여부도 중요하지 않았다. 승객들을 구하다가 죽었거나 부상을 당했어도 지하철 노동자는 의인이 될 수 없었다.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대구지하철 노동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두 죄인이고 가해자이고 살인마였다. 지하철 노동자들에게 침을 뱉고 뺨을 때리는 시민들도 있었다. 유가족들은 참사 초기부터 ‘1780호 기관사 살인마를 처벌하라’는 현수막을 걸어놓고 농성을 했다.

“그때 역에 근무하는 사람은 근무복을 못 입었어요. 회사에서 지침이 내려와서 사복 근무를 했었어요. 당장 살인마 소리를 들었으니까. 손가락질만 받는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위협을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해서 되도록 시민을 대면하지 않는 방향으로 지침이 내려왔었어요. 노동조합에서 유족들하고 관계를 풀지 않았으면 아마 지금도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할 겁니다.” (정성기)

대구지하철노동조합이 유가족들과 관계를 잘 풀고 투쟁에 함께 하면서 지하철 노동자들도 희생자와 부상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원준 (대구지하철노조)위원장하고 저하고 간부들 몇몇이 갔었는데, 실제로 맞아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갔어요. 위협감이 엄청났어요. 유족들 앞에 선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 엄청났던 거죠. 유족들이 물청소 건으로 격앙되어 있기도 했고요. 이원준 위원장이 유족들 앞에 섰을 때, 돌이 날아오고 물병이 날아오고 ‘끌어내라’ ‘살인마 새끼’ ‘죽인다’ 부터 시작해서 난리도 아니었죠. 그때 노동조합이 관계자로서는 처음으로 사과를 했습니다.”

당시에 정부와 대구시, 대구지하철공사 그 누구도 유가족들에게 사과하지 않았고, 처벌도 받지 않았다. 대구지하철 화재참사 관계자로서 유가족들에게 가장 먼저 사과하고 함께 싸우겠다고 손을 내민 것은 대구지하철노동조합이었다.

여론은 희생양을 찾고 있었어요

이날 오선근 공공교통네트워크 운영위원장은 대구에 온 궤도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안전한 철도와 지하철을 위한 제안> 강의에서 대구지하철 화재참사 원인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오선근 운영위원장은 불에 잘 타는 전동차(경비절감 이유로 전동차 내장재 불연재 사용 안함), 종합적인 재난(방재)관리 시스템의 부실, 교육원 폐지와 교육훈련 부족, 현장 안전인력 부족 등을 그 이유로 지적했다. 또, 안전운행보다 정시운행을 우선하는 잘못된 안전문화, 상명하복의 수직적인 조직문화 등 잘못된 안전(조직)문화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화재참사 당시에도 전동차 내장재로 불연재가 아닌 자재를 사용한 점과 소방설비 미비 등 시설이나 자재, 시스템 등에 대한 언급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를 해도 결국 모든 책임은 현장 노동자들 책임으로 귀결됐다. 그 당시 모든 여론의 화살은 화재참사의 원인으로 대구지하철 노동자들, 특히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던 1080호 기관사에게 향하고 있었다. 특히, 1080호 기관사가 전동차의 전원을 공급하는 마스콘 키를 뽑고 탈출해서 열차 문을 못 열게 돼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언론보도가 시민들에게 각인되면서 노동자를 향한 비난은 더욱 거세졌다. 나중에 재판 과정에서 마스콘 키가 문제의 핵심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기존의 인식을 바꾸기는 어려웠다.

많은 사람들이 기관사의 초기대응 미숙과 중앙로역을 무정차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비난했다. 그러나 대구역에서 중앙로역 간의 선로 높낮이 차이가 심해 중앙로역까지 오는 동안 연기가 보이지 않았다는 점과, 당시 열차가 자동운전이라 전 역을 출발할 때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다음 역에 정차하고 문이 열린다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야기 하지 않았다. 자동화 될수록 현장 노동자가 주체적으로 자신의 업무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줄어든다.

당시 1080호 기관사가 중앙로역에 도착한 후 대피하기까지 10여 분 동안 운전실에서 사령의 지시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운전실과 가까운 1호실과 2호실에 와서 승객들을 대피시키고 다시 운전실로 와서 사령과의 교신하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실제 1080호 운전실에서 가장 거리가 멀면서 1079호 발화 지점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5호차와 6호차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그 때 여론은 뭔가 희생양을 찾고 있었던 것 같아요. 대구시나 지하철 공사가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고 현장노동자의 과실로 묵인하는 듯한 상황이 됐습니다. 그때는 안전에 대한 매뉴얼도 없고, 그런 인식들이 부족한 때였어요. 기계나 매뉴얼이 인간의 실수를 보완할 수 있는 쪽으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때는 순수하게 인간의 실수로만 그것을 치부하는 쪽으로 갔습니다.”

당시 대구지하철노조 위원장 이원준 씨는 결국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는 현장 근무자들이 제대로 근무하지 않아 발생한 것이 돼버렸다며, 그것으로 인해 화재참사의 제대로 된 진상 조사와 교훈을 되새길 기회를 잃어버렸다고 했다.

기관사가 잘못했다고 하면 모든 게 다 편해요

이원준 전 위원장은 당시 1079호 기관사가 직접 불을 끄기 위해 운전석을 비워 사령(관제)에 보고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3분 뒤에 반대편으로 들어온 1080호 기관사는 보고하고 사령 지시를 받는 데에 너무 충실하다 보니 현장 조치를 못하는 문제가 발생했던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중앙로역 화재참사 현장을 보존한 기억 공간을 둘러보고 있는 철도지하철 노동자들 [출처: 연정]

“하지만 1인 승무인데 기관사가 운전도 해야 하고, 출입문도 여닫아야 하고, 승객도 감시해야 하고, 사령과 교신도 해야 하고, 응급조치도 해야 합니다. 이걸 혼자서 다 해야 되는데 이 두 기관사가 각각 놓여있는 위치에 따라서 그 역할 중에 몇 가지만 하고 나머지는 수행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구조적으로 이미 기관사가 사고 줄이는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거죠.”

대구시장도 대구지하철공사 사장과 간부 그 누구도 화재참사와 관련해 처벌 받지 않았다. 1080호 기관사 금고5년, 1079호 기관사 금고4년을 포함하여 대구지하철 노동자 8명만 유죄 판결을 받았다.

1박2일 행사에 참여했던 궤도노동자들은 철도지하철에서 사고가 발생했을 때, 가장 먼저 하는 게 '노동자 한 사람 죄인 만들기'라고 했다. 특히, 기관사 실수가 확인되면 다른 건 다 문제없는 게 된다고 했다.

"사고는 절대 한 가지 요인으로 일어나지 않아요. 그런 조사를 해야 관리자나 사용자가 처벌 받을 수 있는데... 한 사람에 대한 책임 물을 수 있는 게 없으면 그때부터 골치 아파져요. 사람 한 명 자르면 되는데, 시스템 잘못된 게 판정나면 돈이 엄청 들거든요. 계속 붙잡아서 조사하는 거예요. '너 딴 짓 했지?' 기관사만 잘못했다고 하면 모든 게 다 편하니까요. 기관사는 책임이 위로는 안 올라가요. 기관사만 책임지고 끝나버려요."

이러한 안전문화 처리 시스템은 철도지하철의 수직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상명하복 조직문화와도 관련이 있다.

시민안전확보를 위한 특별단체협약’ 체결

노동자들이 근무했던 공간을 나와 화재참사 현장을 보존한 기억 공간(추모벽) 앞에 이르자 대구지하철 화재참사 유가족들이 통곡을 하고 있다. 5억 여 원의 국민성금 모금을 통해 준비한 이 공간은 설립과 공개여부 문제로 10년 만에 시민들에게 공개됐다. 17년이 흘렀지만, 아직 추모시설 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어렵게 부지를 마련한 팔공산 인근 추모공원은 현재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라는 이름으로, 추모탑은 ‘조형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대구시가 유가족들과 했던 추모공원 건립 관련 이면합의를 부정하고 유가족들을 불법암매장 혐의로 고소(무죄 판결)하는 일도 있었다.

답사 참가자들이 마지막으로 화재가 발생한 지하3층으로 이동했다.

“그날 진화되고 저녁 9시쯤 내려와 봤을 때, 승강장 상황이 거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어요. 열차 바닥이 유지가 안 되어 있더라고요. 바닥이 녹아서 울퉁불퉁한 형태가 되어 이 쪽 저 쪽 두 대가 서 있었어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열기가 엄청나게 느껴지는 상황이었고, 곳곳에 애기 신발이라든가 깨진 시계라든가 유류품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이런 상황인데, 대구지하철공사에서는 바로 열차를 이동 시키겠다, 물청소를 하겠다. 이렇게 나왔던 거고요. 유류품들을 마치 쓰레기 치우듯이 다 그냥 삽으로 떠서 열차에 실어 견인을 해서 가지고 갔어요. 현장 보존이 전혀 안됐죠. 범죄가 일어났다고 봐야죠. 근데 전부 무죄에요. 조해녕 대구시장은 아예 무혐의였고, 윤진태 (대구지하철공사)사장은 무죄판결 받았어요.”

대구지하철공사는 화재참사 당일 밤에 화재가 난 전동차 두 대를 월배기지와 안심기지로 옮기고, 다음날 군 병력을 동원해 물청소로 현장 증거를 인멸했다. 그리고 곧바로 중앙로역을 제외한 부분운행에 들어갔다. 유가족들은 중앙로역 찬 바닥에서 농성에 들어가고, 대구지하철노동조합과 함께 열차 운행을 막는 투쟁에 들어간다. 노동조합은 이때부터 유가족·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 화재참사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 재발방지를 위한 활동들을 해나간다.

“중앙로역은 그렇게 유족들과 우리 노동자들의 싸움으로 지켜낼 수밖에 없었던 상황 입니다. 우리 지하철노조는 화재의 원인과 안전대책 문제를 제기 하면서 그때부터 싸움을 했고, 그게 6.24 파업으로 진행됐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 공기업 최장기 파업이라고 얘기된 88일 파업도 이때 싸움이 그대로 연결 되서 간걸로 보시면 되고요.”

대구지하철노조는 기존에 하던 임금협약 등 단체교섭을 중단하고 지하철의 안전대책 수립을 목적으로 하는 ‘시민안전확보를 위한 특별단체협약’ 체결을 사측에 요구했다. 대구지하철공사가 이를 거부하자 노동조합은 2003년 6월 24일 새벽 4시 파업에 돌입했다. 화재참사를 경험하며 울분에 차있던 조합원들의 90%가 파업출정식에 참여했다. 그리고 6시간 뒤에 노조 측의 요구가 받아들여져 ‘시민안전확보를 위한 특별단체협약’이 체결됐다. 이 특별단체협약은 대구지하철공사의 공공성 확보와 안전인력 확보, 안전방제 설비의 확충, 안전 우선 경영체제의 확립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PSD(스크린도어) 설치 문제, 내장재를 불연재로 교체하는 문제, 통신 문제. 전기 문제, 소방 설비 문제 등 화재참사 관련한 안전 대책이 특별단체협약에 다 담겨있어요. 근데 그걸 언제까지 하겠다고 한 부분들은 전혀 안 지켜졌죠. 십 수 년이 지나면서 중앙정부의 재정적 지원으로 하나씩 보강을 하는데 기준이 된 건 맞아요.” (정성기)

화재참사 때 노동조합의 활동이 못마땅했던 것

안전 특별단체협약 투쟁은 그 다음 해에 진행된 88일 간의 파업으로 이어졌다. 사측은 주 5일제 근무 시행과 관련한 인원감축(안전 인력 문제)과 2005년에 개통 예정인 2호선을 민간위탁 외주화 하겠다는 안을 들고 나왔다. 대구지하철공사 측은 교섭 해태로 파업을 유도했고, 결국 노동조합은 7월 21일 파업에 들어가게 된다.

  2.18 대구지하철 화재참사 17주기 일정에 참여하기 위해 대구에 온 전국의 철도지하철 노동자들 [출처: 연정]

“화재참사 났을 때 노동조합이 했던 여러 가지 활동들이 못마땅했던 거죠. 회사에서는 노동조합을 손봐야 된다는 게 공유가 돼 있었고. 그때 당시 조해녕 대구시장은 노동조합이 사사건건 방해를 하고 수모를 줬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보수의 땅 대구에서 감히 노동조합이 참사를 빌미로 수습하는데 방해를 하다니’ 하는 생각이 있었을 거예요. 그 다음 해 파업에서 손을 봐주는 기회로 삼은 거겠죠. 파업 장기화는 지금 시각으로 보자면 예정이 돼 있던 거죠.”

88일 간의 파업 끝에 현장 복귀를 했지만, 사측은 기다렸다는 듯이 13명의 노조 간부들을 해고하고.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 30여 명을 대량 징계 했다. 이 과정에서 정성기 씨와 이원준 씨도 해고를 당했다. 이원준 전 위원장은 구속이 되기도 했다. 10년이 넘는 복직 투쟁 끝에 2015년~2018년 해고노동자들이 순차적으로 복직을 했고, 그사이 한 명의 해고노동자는 암으로 세상을 떠나 끝내 현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대구지하철로 돌아온 12명의 노동자들은 여전히 대구지하철 화재참사 문제와 관련된 일에 함께 하고 있다.

노동자가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안전 설계 필요

지금은 대구지하철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지 정성기 씨와 이원준 씨에게 물었다.

“지하철 화재참사 이후에 철도안전관리 대책이라고 해서 철도뿐만 아니라 지하철까지 온갖 매뉴얼들은 잘 만들어져 있어요. 내장재를 불연재로 바꾸는 것, 통신 설비와 소방 설비 보완, PSD 안전문 설치.. 그때 당시에 노동조합이 문제제기 했던 것들, 특히 화재와 관련된 보완이 잘 되어 있어요. 훈련도 많이 늘어났고요. 우리가 이렇게 평상시에 충분히 했다는 핑계를 만들려고 하는 건지 정말 대응능력을 키우기 위한건지 답을 내리기가 힘든데 저는 전자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그게 현실성 있느냐의 문제에서도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죠. 그 매뉴얼대로 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 인력 자체가 안 되거든요.”

정성기 씨는 예전에 비해 역사 근무 인원이 절반 이하로 줄었다고 했다. 역 운영 체계가 바뀌면서 역장도 사라졌다. 관리역이라는 운영체제가 도입되면서 지금은 역 5~6개 당 관리 역장이 한 명 씩 있을 뿐이다. 한 조 당 3명이 근무하는데, 휴무일에 따라 일주일에 3일은 2명이 근무를 해야 한다. 이때 사고가 발생하면 한 명은 보고하고 한 명은 현장에 뛰어나가야 하는데, 그러고 나면 승객들은 누가 어떻게 대피시켜야 할 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했다.

현재 안전 매뉴얼에는 사회복무요원과 청소노동자, 심지어 임대업자들까지 안전업무 수행자로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정성기 씨는 지하철 업무가 안전 중심이 아닌 서비스와 수익성 중심으로 가고 있다며, 안전 매뉴얼을 수행할 수 있는 인력 확충이 시급하다고 이야기했다. 이원준 씨도 2003년보다는 내장재 교체와 화재에 대비한 안전 설비 등이 많이 개선이 된 것은 맞지만, 다양한 형태의 사고에 대한 대비는 여전히 부족한 측면이 많다고 이야기했다.

“휴먼에러라고 하는 인적 실수가 있을 수 있는 전제 하에서 이런 것들이 이루어져야 되는데, 여기서 일하는 노동자를 일종의 부속품이나 객체로만 두고 안전문제를 자꾸 설계하다 보니까 ‘매뉴얼대로 해라. 법 규정대로 해라’ 하고 있는 거죠. 그거대로만 하면 현장의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없어요. 인적 실수는 교육을 반복한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거든요. 현장 노동자를 통제하고 인적 실수를 없애는 쪽으로만 가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지 요. 노동자의 인적 실수를 보완하면서 노동자가 적극적인 역할을 스스로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쪽으로 안전 설계가 되어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최소한 같이 흐르는 시간을 만들어주는 배려는 해야

이번 일정에 참여한 정상현(서울지하철 근무) 씨는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가 발생했던 2003년에 중학교 1학년이었다고 했다. 지하철에서 일을 하며 6년 동안 막연하게 들어온 현장에 직접 오니 마음이 무거워 사진 촬영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정상현 씨는 현장 상황이 통제 범위에서 돌아가는 게 아니다보니 현직자로서 경각심을 갖게 되면서 동시에 착잡한 느낌도 든다고 했다.

“저는 전기원으로 일하는데 화재 참사 때 전기 공급이 안 되는 걸 보면서 제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했어요. 화재 체험은 말 그대로 모의잖아요. 완전히 통제된 상황에서 하는 위험하지 않은 가짜의 상황. 실제 그런 상황에서 기관사에게 현장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모든 권한을 일임한다고 해도 부담스러웠을 것이고 온전한 정신에서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전혀 들지가 않아요. 나는 저런 상황이면 어떨까? 의인이 될 수 있을까? 그런 마음도 들더라고요.”

철도지하철 노동자들이 의인도 죄인도 아닌 안전한 공공교통의 주체가 되는 일은 가능할까? 오선근 공공교통네트워크 운영위원장은 “철도 지하철 같은 공공교통에서는 노동자들의 안전이 확보가 되면 승객들의 안전도 확보가 된다.”고 했다. 승객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안전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 운영위원장은 노사와 시민 모두 안전문화를 정시운행에서 안전운행으로 바꾸어야 하고, 중대재해기업처벌법(기업살인법) 제정도 해야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답사를 마무리 할 시간이다. 현장 안내를 한 정성기 씨는 17년이 지난 지금도 대구지하철노조에서는 모든 시간의 흐름이 그때를 기점으로 뻗어나가고 있다고 했다. 그건 정성기 씨 개인에게도 마찬가지다.

“제 모든 선택이나 행동, 제가 갖고 있는 도덕 윤리적인 의식... 무엇이든 그때 그 사건이 지배를 하고 있는 거죠. 제가 무엇을 하든 제가 해고가 돼서 10년을 있었든 아니면 복직을 해서 이렇게 있든 어떤 행동 하는데 규범이 되어 버린 겁니다. 제가 그걸 벗어날 수도 없는 거고. 내용이 얼마나 있든 간에 작가님도 저한테 이렇게 얘기를 듣고 싶어 하시잖아요. 어디를 가도 이 부분에서 못 벗어나는 거죠. 제가 직장을 그만둬도 그럴 테고. 보통 사람들이 쭉 일직선을 간다면 우리는 그걸 둘러싸고 그 속에서 계속 움직이고 있는 거죠. 저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 거기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제가 아직도 2003년 지하철에서 시간을 확장시키고 있는데, 유족 분들은 더더욱 거기에서 한 발 자국도 못나가고 계실 겁니다. 계속 거기에 머물러 있는 거죠. 시간이 같이 흘러갈 수 있게만 해줘도 치유가 될 거라고 보는데... 누구의 책임이라는 문제를 떠나 최소한 이 사회가 같이 흐르는 시간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정도의 배려는 해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 아저씨

    대구지하철 사고에 대해서 의문을 지니고 있었는데 좋은 기사가 나온 것 같습니다. 다음에 시간이 될 때 자세히 읽어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