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언론 참세상

KBS에서 재난방송이 ‘스페인어’로 나온다면?

[워커스 미디어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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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집에서 쉬고 있던 A씨. 테이블 위 커피잔이 약하게 흔들린다. 깜짝 놀라 TV를 켜니 지상파에서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예능 프로그램이 한창이다. A씨는 ‘큰일은 아닌가 보구나’ 한숨을 돌린다. 그런데 조금 뒤 진동이 강해지더니 창문이 쩍쩍 갈라지기 시작한다. A씨는 또다시 TV를 켠다. TV는 ‘특보’체계로 전환된 상태였다. 화면을 보니 상황은 심각했다. 주택 외곽이 무너져 내리고 대피소의 모습도 보였다. A씨도 서둘러 대피소를 찾으려 귀를 기울인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특보는 스페인어로만 방송되고 있었다.

지나친 망상일까? 강원 산불이 발생한 시각 피해지역 및 인근 청각장애인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TV화면에서는 강풍이 불고 그로 인해 산불이 산발적으로 번지는 장면이 반복됐지만, 청각장애인들은 상세한 정보를 알 길이 없었다. 그 당시 청각장애인이 느꼈을 공포는 짐작하기조차 쉽지 않다.

재난방송 주관사 KBS, 이번에도 ‘보도참사’

강원 산불이 번지고 있던 시간 SNS에서는 “고성에서 산불이 났는데 이제 속초까지 퍼지고 불을 못 끄고 있는 상태다” “그런데, 방송은 특보는커녕 예능이나 하고 있다” “산불 커지고 있는데 보도 좀 해라”라는 항의 글들이 쏟아졌다. 그럼에도 태연하게 예능이나 방영하던 방송사들. 강원 산불 재난방송은 총체적 부실로 기록됐다.

재난방송은 이번에도 늦었다.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방송이 강원 산불 관련 특보체계로 전환됐을 때도 문제는 여실히 드러났다. 수어방송이 제공되지 않고 있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긴급하게 SNS를 통해 “두 공중파 방송국은 재난 속보에 수어통역을 지원 하십시오”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수어방송은 4월 5일 오전에서야 시작됐다. ‘자막을 읽으면 되지 않느냐?’ 라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많은 청각장애인들에게 한글은 제2의 외국어나 다름없다. 그들에게 ‘국어’는 수어이기 때문이다.

김종훈 민중당 의원실에 따르면, 4월 5일 TV조선 6시 57분, JTBC 6시 59분, MBN 7시, KBS 8시, MBC 8시 30분, 채널A 9시 20분, SBS 9시 50분, YTN·연합뉴스 TV 11시에 수어방송이 제공됐다. 강원 산불로 인명피해가 발생한 급박했던 순간, 청각장애인들에겐 제대로 된 재난방송이 제공되지 못한 것이다.

무엇보다 〈방송통신발전 기본법〉에 따라 재난방송 주관방송사로 지정된 KBS의 행보는 더욱 참담했다.

제40조(재난방송 등)
(3) 미래창조과학부장관과 방송통신위원회는 <방송법>에 따라 설립된 한국방송공사를 재난방송 및 민방위경보방송의 주관기관으로 지정할 수 있다.

제40조의2(재난방송 등의 주관방송사)
(1) 미래창조과학부장관 및 방송통신위원회는 <방송법> 제43조에 따른 한국방송공사를 재난방송 등의 주관방송사로 지정한다.

KBS, 세월호 보도참사로 재난방송 주관사됐지만

KBS가 재난방송 주관사로 지정된 것은 5년 전 세월호 참사 때문이었다. 당시 언론들은 ‘기레기’로 불렸다. ‘전원구조’라는 오보, ‘해군, 탑승객 전원 선박 이탈, 구명장비 투척 구조 중’, ‘육·해·공 총동원 입체 수색’ 등 사실과 다른 내용들이 KBS를 통해 보도됐다. 참사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돌리기 위해 ‘유병언 찾기’에 나섰던 수사기관들. KBS를 비롯한 다수의 언론매체들도 그에 보조를 맞췄다. 세월호 침몰사고 진상규명을 위한 국회 국정조사 조사대상에 KBS가 포함됐던 이유다.

세월호 참사는 한국 사회에 ‘안전’을 화두로 던졌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에 대한 국정조사가 진행되면서 ‘재난방송 주관방송사’의 중요성이 대두됐다. 한국 사회에 재난이 발생했을 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정확한 정보를 신속하게 제공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KBS는 ‘재난방송 주관방송사’로 지정됐다. 사회 공공재인 전파를 사용하며 정부가 출자한 국가기간방송사 그리고 준조세격으로 거둬들이는 수신료의 대부분을 가져가는 KBS말이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 5주기가 지났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비슷한 시기에 강원 산불이 발생했지만 장애인들에겐 ‘또 다른 이름의 보도참사’였을 뿐이다. 특히, 재난방송 주관방송사인 KBS에 대해서는 더욱 혹독한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다. 신속한 보도는 이뤄지지 못했다. 피해 지역에 거주하던 청각장애인들에게 정확한 정보(=수어)도 제공되지 않았다. ‘재난 취약계층을 고려한 재난 정보전달 시스템의 구축’이라는 조치를 취했어야 했지만 KBS는 그러지 못했다. “가짜뉴스”라는 비아냥을 듣고 있는 TV조선보다 수어제공이 늦었다는 사실이 그 모든 것을 말해준다.

아쉬운 것은 KBS에도 기회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장애인권단체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KBS 메인 종합뉴스인〈뉴스9〉에서 수어를 제공해야 한다고 촉구해 왔다. 지난 3월 14일에도 관련 기자회견이 있었다. 만일, KBS가 전향적으로 수어제공을 검토하고 장애인들과 소통했더라면 최소한 보도참사는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이것도 뒤늦은 추정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KBS는 당시 “<뉴스 9〉는 청각장애인들의 방송접근권과 비장애인들의 시청권을 조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TV화면의 제약성으로 인해 수어방송을 실시하지 못하고 있다”고만 밝혔다. 그리고 이야기했다. 스마트 수어방송이 구현되는 유료방송을 신청하거나 UHD 초고화질 방송이 안착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이다. 한글자막을 읽을 수 없는 청각장애인들에게는 공영방송 KBS의 메인뉴스조차 접근하기 어려운 게 현재 한국방송의 수준이다.

〈방송법〉 제6조(방송의 공정성과 공익성) 제5항은 “방송은 상대적으로 소수이거나 이익추구의 실현에 불리한 집단이나 계층의 이익을 충실하게 반영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한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스스로를 보호하고 대변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미디어접근권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을 위해 필요한 게 바로 ‘방송’이다. KBS는 ‘비장애인들의 시청권’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 있지만, 이번 강원 산불 재난방송에서 수어 제공이 늦은 것에 대한 비장애인들의 분노는 다른 말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KBS가 있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질문하고 있다. [워커스 5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