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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는 곧 하느님께 손을 뻗을 것이다

[워커스] 힙합과 급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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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6년 자메이카를 방문한 하일레 셀라시에
http://imanblak.com/content/commemorating-50th-year-visit-emperor-haile-selassie-jahmekya

“한 인종이 우월하고 다른 인종이 열등하다는 철학이 최종적이고도 영구적으로 배척되고 폐기될 때까지, 어떤 나라에서도 일등 시민과 이등 시민이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사람의 피부색이 눈동자의 색보다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을 때까지 아프리카 대륙은 평화를 알지 못할 것이다.”

래퍼 루페 피아스코가 2014년 발표한 곡에서 인용한 이 연설은 마치 반인종주의 운동가의 말처럼 보인다. 사실 이 연설은 레게 음악인 밥 말리가 1976년 발표한 노래 ‘War’를 통해 이미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이었다.

1963년 유엔에서 진행된 이 연설의 주인공은 에티오피아의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였다. 흥미로운 점은 항상 사려 깊고 진보적인 입장을 지켜 온 피아스코가 이 ‘Haile Selassie’라는 곡에서 황제를 정의로운 반인종주의자로 묘사했다는 점이다. 20세기 전제군주라는 지위,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한 협력, 경제적 실패에 대한 책임 등 황제를 비판적으로 그려내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지만 어쨌든 피아스코는 이런 문제들을 뛰어넘어 하일레 셀라시에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했다. 이런 태도는 다른 힙합 음악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그런데 에티오피아와 그곳의 지배자에 대한 존경심은 북아메리카와 카리브 해 지역의 아프리카계 이주민들 사이에서 적어도 백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다.

에티오피아는 이집트와 더불어 아프리카의 찬란한 고대 문명을 상징했다. 그곳은 솔로몬 왕과 시바 여왕의 후손인 황제, 독자적인 문자, 고유한 기독교 전통을 가진 국가였다. 아프리카의 대부분이 식민지로 전락한 19세기 말 이탈리아군을 무찌르고 독립을 지켜낸 국가이기도 했다. 에티오피아가 특별한 장소라는 증거는 또 있었다. 킹 제임스 성경의 시편 68장 31절이다. “이집트로부터 왕자들이 나올 것이다. 에티오피아는 곧 하느님께 손을 뻗을 것이다.” 두 지역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양한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이 구절은 억압받던 대서양 양쪽의 아프리카계 주민들에게는 자신들이 신에게 선택받았다는 희망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이 구절은 20세기 초 중부와 남부 아프리카에서 예수의 재림을 식민통치의 몰락으로 해석하며 크게 일어난 ‘에티오피아 교회’ 운동에 근거를 제공했다. 자메이카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던 흑인 민족주의자 마커스 가비도 대담한 해석을 내놓았다. 1921년 그의 조직에서 발간한 ‘세계흑인교리문답’에 따르면 이 구절은 “흑인들이 아프리카에 자신들과 같은 인종이 다스리는 정부를 세울 것”이라는 증거였다.

1935년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 소식이 전해지자 전 세계의 흑인들이 들고 일어나 자원병으로 참전하며 에티오피아를 아낌없이 지원했다. 실제 에티오피아는 1930년대에도 노예제가 존재한 드문 국가였고 약속의 땅이라기에는 황폐한 곳이었지만 그런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그 자체였고 그곳의 운명은 곧 세계 흑인들의 운명이었다.

1930년 에티오피아의 황제로 즉위한 하일레 셀라시에의 생애는 좀 더 복잡했다. 그는 의회를 설립하고 에티오피아를 국제연맹에 가입시키는 등 나름대로 근대화를 추구했다. 하지만 독가스와 같은 현대식 무기로 공격해 오는 이탈리아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영국으로 망명을 떠난 그는 1941년 아프리카의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이었던 영국과 프랑스, 벨기에 부대의 힘으로 권좌를 되찾았다. 전후 냉전 시기 그는 서방 세력의 동맹자 역할을 수행하는 한편 1963년 두 편으로 갈렸던 아프리카의 신생국들을 중재해 아프리카통일기구(OAU)를 출범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는 암살 시도와 쿠데타, 농민반란 등의 위기를 겪으면서도 오랫동안 제위를 지켰으나 1970년대 초 기근에 따른 민심 이반과 1974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내세운 군부 쿠데타로 폐위됐다. 그는 유폐된 상태에서 1975년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궁전 지하에 유기된 황제의 유해는 대량학살로 악명 높았던 군사 정권이 붕괴한 후인 1992년에야 발견됐다.

  1968년 하일레 셀라시에 방한 기념우표
http://koreastampcollector.blogspot.com/2011/04/state-visit-of-emperor-of-ethiopia-1968.html

하일레 셀라시에는 신이 됐다. 1930년 그가 제위에 오르자 자메이카에서 그를 재림 예수로 보는 믿음이 생겨나 빠르게 퍼져 나갔다. 황제의 즉위 전 이름인 라스타파리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운동은 자메이카 흑인 민중의 종교이자 영국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사회운동이었다. 에티오피아 정교회 신자였던 그는 결코 자신을 신이라거나 세계의 흑인들을 대표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자메이카의 일에 관여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황제는 그에게서 아프리카와 흑인의 운명을 보고자 한 이들에 의해 숭배 대상이 됐다. 1966년 자메이카를 방문한 그는 자신들의 메시아를 맞이하러 나온 수많은 인파를 맞닥뜨렸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신자들의 믿음을 저버리는 언행을 하지 않았고, 에티오피아로 이주하길 원하는 이들에게 자메이카의 민중을 먼저 해방시키라는 지침도 주었다.

에티오피아와 그 황제의 직접적인 영향이 나타나는 음악은 밥 말리의 ‘드레드록스’ 머리모양과 함께 세계에 알려진 레게다. 그리고 힙합 음악인들은 가벼운 상업적 음악부터 사회의식을 강하게 드러내는 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음악에 레게와 라스타파리의 영향을 표현했다. 중요한 것은 황제와 말리가 사망한 이후 태어난 젊은 음악인들도 여전히 이들을 자신의 음악적 영감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메이카 출신 아버지를 가진 래퍼 조이 배드애즈는 2017년 발표한 ‘Babylon’에서 젊은 라스타파리 음악인 크로닉스와 함께 바빌론을 떠나 하일레 셀라시에가 있는 에티오피아로 떠나고 싶다는 열망을 표현했다. 바빌론은 라스타파리 운동에서 백인 억압자들의 문명을 의미하는 단어로, 조이는 경찰에 의한 흑인의 총격 사망 사건들을 보고 미국 사회에 느낀 절망을 표현하기 위해 오래된 저항의 단어들을 동원했다. 조금 더 창의적인 방식으로 에티오피아의 유산을 인용한 래퍼도 있다. 켄드릭 라마는 2015년 발표해 찬사를 받은 ‘i’에서 악명 높은 ‘검둥이(niggas)’라는 단어가 에티오피아의 군주를 의미하는 단어 ‘negus’와 동음이의어라는 점을 언급했다. 그가 이 곡에서 비하 표현조차 긍정적 의미로 전유할 수 있다고 보면서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흑인들이 자신과 타인을 더욱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과 에티오피아는 2차 세계대전의 추축국 세력으로부터 침략받았고, 냉전 시기에는 미국의 군사적 동맹국이었다는 공통점을 가졌다. 하일레 셀라시에는 한국전쟁에 군대를 파병했고, 그 대가로 미국은 유엔을 동원해 과거 이탈리아의 식민지였던 에리트레아를 에티오피아에 선물했다. 에리트리아에는 한국전쟁 참전 부대의 이름을 딴 카그뉴 미군 기지가 설치됐다. 황제는 1968년 한국을 방문해 박정희 대통령의 환대를 받았고, 오늘날까지도 많은 한국인들이 그를 ‘자유’를 지켜준 고마운 국가의 지도자로 기억한다. 한국인들은 라스타파리들과는 정반대의 이유로 같은 인물을 예찬하는 셈이다.[워커스 5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