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언론 참세상

도시에서 공통적인 것을 뺏기고 지키며 산다는 것

[워커스 세 줄 요약]권범철, [도시 공통계의 생산과 전유-오아시스 프로젝트와 문래예술공단을 중심으로], 서울시립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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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예술을 한다는 건 정치적인 일이 됐다. 예술가들이 열심히 활동을 하면 그 지역의 공간이 시각적으로 주목을 받는데,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그들의 공간적 기여는 오늘날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들의 여러 발단 중 하나이기도 하다. 예술이 갤러리나 무대를 벗어나 거의 모든 도시 공간을 근거지로 삼으며 융합하는 시대에 이것은 불가피한 숙명과도 같은 것일까.

물론 이런 문제가 유독 예술가들의 탓이라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금융 위기 이후 부동산으로 몰린 유휴 자본의 운동과 부동산 불패 신화 속에서 건물주를 숭상하는 시민 문화야말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가의 뒤바뀐 운명을 헤아린다는 일은 무척이나 곤혹스럽다. 흔한 유행어처럼 그들은 도시경관의 미학화와 부동산 경기 부양의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가 돼 어느 순간 나타났다가도 바로 그 자리에서 흔적 없이 쫓겨난다. 도시에서 예술을 한다는 건 이렇게 정치적인 일이다.

때마침 나온 권범철의 논문은 바로 이 문제들을 가로지른다. 그가 주목한 현장은 한국식 스쾃(squat; 무단 점거) 운동의 전범이 된 오아시스 프로젝트와 문래예술공단이다. 이 두 가지 사례가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기존의 예술 관행과의 관계에서 독특한 지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예술의 주된 흐름이 공공예술과 공동체예술 등 이른바 ‘장소-특정성’(sitespecificity)에서 출발한다면 이들의 근거지는 정치적 의제 그 자체가 된다. 장소를 지키는 것 이상으로 의제를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다.

그런 맥락에서 이들에게 ‘현장’이란 말은 더 특별하다. 그것은 추상적인 장소성에 그치는 차원이 아니라 언제나 정치적 갈등이 내포돼 있는 그 자체로 전장(戰場)이기 때문이다. 전장이 아니면 현장으로 삼지 않는 예술. 우리가 무려 ‘포스트아방가르드’ 시대에 살고 있음을 상기한다면 이들은 이중삼중의 고난의 길을 가고 있는 셈이다. 우여곡절이 펼쳐지지 않을 수 없다. 권범철의 논문을 따라 가보자.

1. 예술가들의 활동과 도시정부 사이에는 도시 공통계(commons)의 생산과 전유라는 문제가 존재한다. 예술가들의 전술 공통계는 그 자체로 새로운 예술의 발신지이자 동시에 아래로부터의 도시 재생이라는 맥락을 가진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도시정부는 이들의 활동을 포섭하고 생산적으로 활용하려는 전략 공통계를 형성하기도 한다.

2. 도시 간 경쟁과 투어리즘이 치열해질수록 이러한 환경은 구조화된다. 결국 시민들의 도시적 삶과 예술가들의 활동은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다. 예컨대 창의문화도시 마스터플랜이 제공했던 레지던시와 기금은 예술가들의 생산적 활동을 전유하려는 시도였으며 그 결과 예술가들을 경쟁하는 주체들로 변모시켰다.

3. 이 같은 곡절은 오늘날의 공통계가 운동하는 주체만의 관심사가 아니라 축적 위기에 다다른 자본과 국가에게도 구미를 당기는 대상이 됐음을 가리킨다. 여기서 오늘날의 예술가들은 위로부터 행사되는 이 압력을 재전유하려는 실천을 수행하고자 한다. 공통계와 자본의 상호작용은 끝없는 교전으로 나아가고 있다.


공통계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겠다. 권범철이 이야기하는 ‘공통계’는 몇 년 전부터 급진적 활동가와 지식인들이 커먼즈라 불러왔던 것의 번역어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역사란 지배계급이 공통계를 끝없이 전유하(고 동시에 피지배자들은 끝없이 생성해내)는 역사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커먼즈 또는 공통계를 사전적 의미처럼 공통의 ‘자원’ 쯤으로 국한할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삶의 양식이라는 측면까지도 포괄한다는 점을 주목한다. 전통적인 물질성만을 기준으로 생산과 전유의 정치적 과정을 다룰 하등의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네 가지 정도의 논점이 제시된다. 공통계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산된다. 공동체 없는 공통계는 있을 수 없다. 공통계는 저항과 구성의 두 선을 지닌다. 공통계는 하나의 사회적 체계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낸 ‘삶 자체’가 자본의 동학 속으로 전유당하는 경험을 하고 있다. 자발적이던 공동체적 부조는 사회적 경제라는 이름으로, 하찮게 여겼던 일상적 움직임과 문화적 취향 선택마저 알고리즘에 의해 분해되고 가공돼 헌납된다.

문제는 오늘날 자본주의 국면에서는 비-자본주의적인 삶뿐 아니라 반(反)자본주의적인 삶조차도 자본주의의 구성 요소가 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저자 권범철 역시 묻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스쾃이 관광지로 흡수될 때, 예술가들의 활동은 대안적인 삶의 실천인가, 도시의 스펙터클을 강화하는 도구인가? 다양한 예술지원 정책들은 예술가들의 활동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가, 아니면 그들의 활동을 도시 경쟁력 강화를 위한 요소로 포섭할 뿐인가?”

이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외면해왔던 중요한 질문이다. 이 질문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억눌러왔던 많은 것들을 꺼내고 게워내야 하기 때문이다. 결과를 예측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자본주의 질서가 어느 수준에 이른 후부터 반자본주의적이었던 것들이 미학화됐던 사례를 우리는 너무나 많이 알고 있다. 어쩌면 ‘예술의 정치화’라는 주장조차도 오늘날에는 어떤 궁지에 몰려 있는 것 같다. 다른 예술가들에겐 그러려니 하는 일들이겠지만, 정치를 사유하고 감각하고자 했던 ‘현장’의 예술가들에게는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해왔던 예술 행동들을 멈출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우리는 얼마나 더 위험해야 안심할 수 있을까.

저자의 말처럼 오늘날 도시에서는 예술가에 의해서든 시민들에 의해서든 공통계가 생산되고 있으며, (위로부터 전유하는) 전략 공통계는 (아래로부터 생산하는) 전술 공통계에 철저히 기생하고 있다. 예술가의 직업적 불안정성 때문이든, 점거 외에는 다른 선택지를 주지 않는 도시적 상황 때문이든, 또는 예술가 본연의 대안적 삶의 욕망 때문이든 공통계는 생산된다. 그리고 권력블록은 이들의 공통계에 철저히 들러붙는다. 개발도시는 창의문화도시가 됐고 재개발은 재생이라는 말로 바뀌었다. 명분과 그 과정이야 어떻든 이런 사업들이 공통계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것은 하나의 전장이 돼야만 한다.

자본에 의해 결코 전유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그런 게 대체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공통계를 전유하려는 힘이 강해지고 그런 일들이 반복될수록 우리들 자신이 그와 같은 현실에 대해 자각할 순간들도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온다는 점이다. 지금의 전략 공통계가 전술 공통계에 기생하고 있다는 사실의 발견은 도시적 권리의 전유라는 원환으로부터 도약할 중요한 계기일지 모른다. 저들이 점점 더 우리 없이 살 수 없게 된다면 거꾸로 우리는 전보다 더 많은 것을 쟁취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더 작고 때로는 더 크게 바꿀 수도 있지 않겠는가.

권범철이 말한 “공적인 것 안에서 공통 영역의 확장”이란 것도 결국 이런 문제의식과 맞물려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권력이 시민과 예술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면 아예 그 안으로 들어가 연대의 기회로 활용하고 각종 조건들을 투쟁의 자원으로 변환시킬 수도 있다는 것. 어쩌면 우리는 이제껏 없던 또 다른 ‘공통계’를 만들어내야 할지도 모른다. [워커스 51호]

덧 : 이 지점에 이르게 되면 어떤 불가피하고도 불가능한 상황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첫째, 불가피한 것. 기존에 알던 예술가나 시민에 대한 통념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예술가와 시민은 자신이 권력-기계가 될지도 모를 위험성을 감수하면서 또한 그것과 싸우면서 사회적 삶을 견뎌야만 한다. 그리고 불가능한 것. 그럼에도 여전히 위로부터의 힘과 아래로부터의 힘은 비대칭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 사실을 알고 들어가는 것과 모르고 들어가는 것 사이에는 작지 않은 차이가 생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