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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자본의 골드러시와 동구 노동자의 디아스포라

[워커스 이슈③] 독일 통일 손익계산서...“사회주의를 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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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말] 국제금융자본의 전도사가 남북경협을 지휘하게 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4일 대통령 소속 기구인 북방경제협력위원장에 권구훈 골드만 이코노미스트를 위촉했다. 그는 2001-2004년까지 국제통화기금(IMF) 모스크바사무소 상주대표를 맡은 인물로 구소련 시장화 과정에 간여했다. 문재인 정부의 평화와 비핵화, 남북경협의 큰 그림은 결국 초국적 금융자본이 주도하는 북한 시장 개방으로 향하고 있다. <워커스>는 2회에 걸쳐 이를 둘러싼 남북미 사이 입장 그리고 독일 통일과 동구 시장 개방이 노동자민중에 미친 영향을 살펴본다.

① 한반도기 흔들었는데 아이엠에프가 웃더라
② 서구 자본의 골드러시와 동구 노동자의 디아스포라 - 독일 통일 손익계산서

  2012년 제작된 독일 영화 '골드러시 - 신탁관리청의 역사'(디르크 라브스 감독)는 통독에 따른 동독 시장화 과정에서의 사기와 부패, 구조조적인 모순을 고발해 주목을 받았다.

“독일은 똥이야.”

8년 전 10월 3일, 한 청년이 독일 브레멘에서 열린 통일 20주년 기념식 한 편에서 욕을 내뱉었다. 그는 성대한 통일 기념식을 조롱하며 시위하던 2천여 군중 속에 있었다. 전날 폭력시위까지 예고된 덕분에 경찰 3천 명이 현장에 배치됐고 하늘에선 헬리콥터가 날아 다녔다. 행진 중 일부 참가자들은 빈병이나 폭죽을 던지며 “독일은 똥”이라고 비아냥댔다. “민족을 위한 날은 없다” “애국 반대” “국가와 자본에 반대한다” “독일은 이제 그만”이라는 구호도 울려 퍼졌다. 독일 언론들은 이를 ‘일부 극좌’ 시위라며 무심하게 다뤘다. 그러나 그 후로 매년 통일기념식이 열리는 곳이면 어김없이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우리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노래하며 자라났건만, 왜 독일 ‘극좌’들은 통일 기념일이 기념할 만한 날이 아니라고 외치는 것일까?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지만

독일 통일은 한국의 롤모델이다. 그래서 대통령들도 꼭 한번은 발도장을 찍는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은 독일에서 ‘베를린 선언’을 했고 2011년 이명박 대통령은 ‘베를린 제안’을, 2014년 박근혜 대통령 역시 드레스덴에서 ‘통일 대박’을, 지난해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2달 만에 ‘베를린 선언’을 다시 발표했다. 그러나 정작 독일에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0년 가까이 지난 현재까지도 통일 과정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지만 불평등이라는 또 다른 장벽이 동서를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독일정부가 발표한 자료를 봐도 동서 간 격차를 확인할 수 있다. ‘독일 통일 현황에 관한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동독 지역의 경제성장률은 1.9%로 서독 2.3%에 비해 크게 뒤처졌다. 1인당 국내총생산은 동독이 서독의 73.2%에 그쳤다. 1990년부터 2016년 사이 동독 주민의 약 11%가 줄었으며, 65세 이상 노인인구가 4분의 1에 달하고 있다. 동독 지역 내에서도 베를린,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등 도농 간 경제 격차도 확대되고 있다.

독일 좌파들은 이러한 동서 간 격차가 통일 과정에서 구조화됐다고 말한다. 실제로 통일 이후 동독에 있던 국유 기업 등은 대부분 파산하거나 서독 기업에 인수됐다. 고학력과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서쪽으로 떠나갔다. ‘조국은 하나’가 됐지만 동독 주민들은 2등 시민으로 전락했다.

독일은 1990년 7월 발효된 독일경제·금융·사회통합 조약을 통해 서독의 체제를 동독에 그대로 이식했다. 이 조치의 근간은 국영기업을 대상으로 한 사유화였다. 이는 동독 구체제의 마지막 기관이었던 신탁관리청(Treuhandanstalt, THA)이 주관했다. 1988년 기준으로 동독지역 사업체 88.8%가 국가, 8.4%가 협동조합(Cooperatives)의 소유였다. 신탁관리청은 동독 제조업체의 90%(126개의 중앙정부 사업체, 95개의 지방정부 사업체, 토지와 노동력의 57%)를 관할하며 사유화를 진두지휘했다.1) 매각 대상에는 매각과정에서 분할된 약 8천 개의 국영기업과 172억 평방미터의 농지, 196 평방미터의 숲과 250억 평방미터의 부동산이 포함됐다. 약 4만 개의 소매점과 식당, 수천 개의 서점, 수백 개의 영화관과 호텔, 수천 개의 약국도 그 대상이었다. 여기에는 약 4백만 명이 고용돼 있었고, 모든 인력의 3분의 2 이상이 베라와 엘베 강 동쪽에 있었다. 당시 세계적으로 이렇게 거대한 산업 밀집지는 드물었다.2)

신탁관리청은 1994년 12월 31일 그 임무를 마칠 때까지 정확하게 4년 간 모두 14,000개의 기업과 사업장, 22,000개의 레스토랑, 호텔과 상점을 민영화했다. 팔려나가지 않은 회사는 약 140개에 불과했다. 동독경제의 알짜배기 기업은 서독자본에 넘어갔다. 대표적으로 유명 AG 국제호텔은 서베를린에 본사를 둔 클린바일그룹이 매입했다. 전력산업 다수도 서독 에너지기업에 넘어갔다. 동독사회주의통일당(SED)의 지역신문 15개는 다양한 서독 출판사가 인수했다. 이 과정에서 신탁관리청이 매각한 기업이 고용하던 4백만 개의 일자리는 1994년 말 최대 150만 개로 줄어들었다.

독일 우파는 이 같은 결과를 놓고 신탁관리청은 성공적으로 과제를 수행했다며 추켜세웠다. 그리고 대량실업 등 전환기에 나타난 문제는 동서 통화통합에 따른 동독 마르크 가치절상이나 동독노동자들의 고임금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애초 공산주의 시절 경쟁력 없던 국유기업의 체질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그리고 이 같은 문제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동서 격차의 근본 원인이라고도 본다.

그러나 신탁관리청은 애초 가능한 빠르게 사유화를 단행한다는 목표만 있었을 뿐 동독지역 기업의 자립가능성이나 일자리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다. 결국 단순한 매각 규칙에 따라 기업과 일자리 유무를 결정하며 동독의 산업 자체가 짓밟혔다. 그 과정에서 매각된 기업은 구조조정을 단행해 일자리를 줄였고, 생존이 가능하더라도 구매자를 찾지 못한 기업은 쉽게 폐쇄됐다. 또 알짜배기 산업은 서독 기업들이 재빨리 인수해갔으며 사기나 부패도 비일비재했다. 대표적으로 유럽 최대 철강회사인 티센크루프(당시 티센)는 200개 이상의 동독 기업을 인수했는데, 신탁관리청의 계약매니저로 일했던 크리스토프 파르취의 폭로에 따르면, 이 기업은 “원하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기업은 당시 계약파트너 엘프 아키텐과 함께 동독지역에 대형 정유공장을 건설했는데, 수억 마르크에 달하는 보조금을 받아 논란을 빚기도 했다.

동독지역 주민의 충격과 반발은 컸지만 통일이나 개방의 흐름 속에서 때늦은 하소연이 되고 말았다. 마티아스 베르너 동독연합이사회 의장은 최근 독일 좌파지 <융에벨트>와의 인터뷰에서 “구 동독의 산업은 의도적으로 파괴됐고 이 때문에 동독 주민들은 자신의 삶을 꾸릴 기회마저 빼앗겼다. 경제구조가 파괴된 다음 구호품이 분배됐고 사람들이 이에 만족한다고 기록됐다”고 지적한다. 그의 지적처럼 신탁관리청은 동독 불평등의 상징이 됐고 오늘날까지도 이에 대한 반발이 계속되고 있다. 가장 극적인 경우는, 철강회사 회쉬 전 CEO로 신탁관리청장을 맡아 사유화를 진두지휘했던 데트레프 카르스텐 로제드데르가 1999년 4월 1일 자신의 집에서 독일 적군파(RAF)의 총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다.

동독은 빈부 격차와 실업이 깊게 자리 잡으면서 이제 극우의 집결지가 됐다. 유럽경제위기 이후 극우가 정치세력화한 독일대안당(AfD)은 동독을 기반으로 무섭게 성장해 기성정당을 추월하고 있다. 최근 독일대안당 지방의회 선거 득표율에 따르면, 작센안할트는 24.3%, 메클렌부륵-포폰먼은 20.8%, 베를린은 14.2%로 주로 구 동독지역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AfD는 독일 총선에서 12.6%(2013년에는 4.7%)를 득표해 기민당과 사민당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때 AfD를 지지한 계층은 실업자 22%, 육체노동자 21%로 주로 노동자계층이었다. 지금 독일 극우는 ‘우리가 국민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활보한다. 이 구호는 애초 동독시절 자유를 위해 매주 거리를 걸으며 독일 통일의 도화선이 된 라이프찌히 시민들의 구호였다.

[출처: 세계불평등데이터베이스]

국제금융기구, 동유럽 시장화 지휘

이 같은 사정은 비슷한 시기에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편입된 동유럽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동유럽 경제체제 전환과정에서 IMF, 세계은행 등 국제금융기구는 미국식 신자유주의 처방인 워싱턴 컨센서스에 입각한 충격요법(Shock Therapy)을 도입하라고 공통적으로 제안했다. 이 충격요법은 가능한 급격하게 경제자유화, 민영화를 추진하고 강력한 경제안정정책을 실시해 사회주의체제에서 시장경제체제로 전환하는 방법을 말한다. 이 과정에서 물가상승, 실업률 상승, 경제성장률 저하를 비롯한 ‘전환불황’이 발생하지만, 시장경제 메커니즘이 정착되면 상대적으로 높은 경제 회복능력이 발휘돼 지속적인 경제성장 구조를 구축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됐다.3) 그러나 동구는 공산주의 몰락 후 이 ‘전환기’를 경유하며 기득권층과 신흥 자본가들(올리가르히)이 경제를 장악했고 주민의 생활수준은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다.4)

대표적으로 폴란드는 전환 후 워싱턴 컨센서스 기조의 발체로비츠 플랜에 따라 구조조정을 단행했지만 그 상흔이 깊다. 사유재산제 도입, 반독점 정책, 통화의 교환성 회복, 자본시장 창설, 민영화 등 시장화 조치가 시행됐다. 이 중에서도 경제안정화 정책과 더불어 국영기업 민영화가 핵심 조치였는데 1990년 6월 말까지 국영기업으로 등록된 기업 중 80.7%가 2003년 말까지 모두 민영화됐다. 반면 소득불평등은 크게 증대했다. 세계불평등데이터베이스 2017년 연구자료5)에 따르면, 폴란드 상위 10%의 소득 비중은 1980년대 23%를 차지했으나 1995년 이 비중은 34%까지 치솟았으며 2015년엔 40%에 육박했다.

  지난 8월 10일 10만 명이 참가한 루마니아에서의 반정부 시위 [출처: 자코뱅]

동구의 인클로저 운동6)과 디아스포라

폴란드에서의 국영기업 민영화는 결국 실업자를 대거 양산하며 서유럽 노동시장을 위한 인클로저 운동이 됐다. 특히 공산정권 붕괴에 이어 2004년 폴란드가 유럽연합에 가입하면서 약 150만 명이 노동이민을 떠났다. 폴란드인들이 가장 많이 이주한 국가는 영국, 독일이었다.

서/북유럽을 향한 탈출은 물론 폴란드뿐만이 아니다. 동유럽 국가의 인구들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반면, 서유럽과 북유럽 국가의 인구는 늘어났다. 유럽 인구조사기관들의 협동 프로젝트인 ‘인구 유럽’의 최근 조사 결과7)에 따르면, 1990년 이후 2016년까지 동유럽에서 서유럽과 북유럽으로 떠난 인구는 모두 1200-1500만 명에 달한다. 1990년 이후 거의 모든 발칸국가와 전 소련 위성국가들의 인구가 감소했다. 불가리아 인구는 약 19%, 라트비아는 27%가 줄었다. 특히 루마니아는 2007년에서 2015년 사이 세계에서 2번째로 큰 디아스포라를 겪었다. 해외로 떠나는 루마니아인 수의 증가율은 연평균 7.3%였다. 이는 내전을 겪고 있는 시리아(13.1%)의 바로 뒷자리다.8)

동유럽인들이 이주를 택한 이유는 폴란드에서처럼 경제 여건 때문이었다. 그리고 유럽연합의 저임금시장은 삶의 터전을 잃은 이러한 동유럽 이주인구를 적극적으로 빨아들였다. 최근 조사 결과에 따르면, 독일의 경우 저임금 일자리에서 일하는 선주민 남성이 12.8%, 여성이 30.3%인 반면, 동유럽 출신 노동자들의 비율은 남성은 50.8%, 여성은 52.2%였다.

그러나 서/북유럽에 동유럽 출신 이주노동자들이 증가하자 우파는 이들의 노동력을 경제적으로 이용하면서도 정치적으로는 고립시켰다. 대표적으로 영국에서는 극우와 우파가 이주노동자들을 문제로 브렉시트를 꺼내 들었다. 영국의 경우, 2004년부터 2010년까지 6년 동안에만 동유럽에서 150만 명이 이주해왔다. 그러나 이주노동자들이 영국 경제에 기여함에도 우파와 극우는 사회 문제를 이들에게 돌리며 갈등을 봉합하려 시도해왔다.

현재 동유럽에선 동독에서처럼 극우가 기성정당을 빠르게 추격하고 있다. 폴란드 법과정의당, 헝가리 요비크, 슬로바키아 국민당 등이 반이민을 내세우며 인기를 모은다. 그러나 개방으로 더욱 악화한 빈곤과 실업, 불평등으로 인해 아래로부터의 저항도 늘어나고 있다. 대표적으로 루마니아에서는 지난 8월 10만 명이 정부의 개악 조치를 막기 위해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시위 후 455명이 치료를 받아야 했을 만큼 대치는 격렬했다. 이 시위는 고국으로 되돌아온 이민자들의 참여로 더욱 고무되기도 했다. 루마니아 개방 후 태어난 27세의 현지 언론인 마테이 바벌레스쿠는 “미래를 위한 투쟁은 여전히 미결정 상태에 있다”고 지적한다.[워커스 48호]

[각주]
1) 이헌대·조윤수, 통일 후 독일경제의 교훈, 한국경제학회, 2013. http://eng.kea.ne.kr/common/ download?id=1701§ion=pub
2) https://www.zeit.de/wirtschaft/2014-10/treuhandanstalt-privatisierung-ostdeutsche-wirtschaft
3) 산은경제연구소 조사연구보고서 ‘동유럽 주요국의 경제체제 전환과정 -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를 중심으로’(2007년) https://rd.kdb.co.kr/er/wcms.do?actionId=ADERERERWCE93& contentPage=/er/er/er/ERER27I00010_01RS_DWIFRAME.jsp
4) http://www.leftvoice.org/The-Labor-Movement-in-Post- Communist-Countries-An-Interview-with-Mihai-Varga
5) https://wid.world/document/bukowski-novokmet-poland- 1983-2015-wid-world-working-paper-2017-21/
6) 목축업의 자본주의화를 위한 경작지 몰수
7) http://www.populationeurope.org
8) https://www.jacobinmag.com/2018/08/romania-psd-corruption-protests-emigr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