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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리부트’ 지도그리기

[워커스 세 줄 요약] 김보명, 「페미니즘의 재부상, 그 경로와 특징들」, 경제와 사회, 118호(2018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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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운동’이 활발하다. 이 운동을 알기 위해선 2015년 즈음에 부흥한 ‘페미니즘 리부트’(재부상)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페미니즘 리부트를 알기 위해선 김보명의 이 논문을 읽어야 한다. 「페미니즘의 재부상, 그 경로와 특징들」이란 제목처럼 이 논문은 리부트된 페미니즘을 이해할 몇 가지 중요한 단초들을 정리하고 있다. 다만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기도 한데) 이 논문 하나를 읽었다고 요즘 페미니즘을 다 아는 것처럼 ‘궁예질’을 할 근거는 없다. 감히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을까. 저자가 밝히는 바와 같이, “청년세대 페미니스트 주체들이 만들어나갈 사회적 자리는 아직 구성 중”이기 때문이다.

이 흐름이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지 예측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오히려 적절한 관심사는 다른 데 있는 것 같다. 페미니즘 리부트는 어떻게 해서 가능한 것이었을까. 그리고 이 변화로 인해 우리한테는 어떤 쟁점들이 생기고 있는 것일까. 그러면 이 달의 세 줄 요약을 시작해보도록 하겠다. 각 부분에 붙인 설명도 꼭 읽어보자.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1
오늘날 페미니즘 리부트의 배경으로는 ①청년세대의 디지털 연결성 ②대중문화적 감수성 그리고 ③‘여성’으로서의 공통적 경험과 정체성에 근거한 새로운 저항의 정치학 등을 꼽을 수 있다.


논문 ‘2장’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여기서는 ‘디지털 자경주의’(온라인 커뮤니티, 메갈리아 미러링 등)로 시작해서 ‘대중적 페미니즘’(맥심 코리아 표지 사건, 로리콘 논쟁 등)과 ‘애도와 참여의 정치학’(강남역 추모, 낙태죄 폐지 운동, 촛불집회 페미존 등) 같이 몇몇 중요한 국면들을 다루고 있다. 지면 관계로 상세히 다루진 못하지만 그래도 페미니즘이 재부상하게 된 사회문화적 배경을 알고 싶은 독자라면 꼭 한번 읽어 봐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어느 날 갑자기 돌발적으로 일어난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우리는 더 많이 배우고 사유할 필요가 있다.

2
‘여성혐오’ 담론이 부상하게 된 데에는 포스트 87체제로 인한 젠더지형의 변화가 구조적 원인으로 꼽힌다. 이 과정에서 여성들은 구조적 부조리의 비용을 부담해야 했고, 그에 반해 여성으로서 경험하는 신체적·상징적 삶의 위태로움은 여전했다.


일-가정 양립이라는 허울 탓에 대한민국 여성들의 대다수가 전통적인 비임금 재생산 노동뿐 아니라 신자유주의화 된 임금노동까지도 감수하면서 살고 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청년세대 여성들에게 그와 같은 (현재이자) 미래 전망은 무척이나 부당한 일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여성혐오’에 기초한 온-오프 테러리즘, 특히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등은 또 어떤가. 문제의식은 확장된다. 젠더 구조뿐 아니라 우리 시대의 정서구조 그 자체도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청년세대의 페미니즘 정치학에 ‘생존’이라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된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3
페미니즘의 새로운 물결이 어떤 긍정적 신호를 제공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신)자유주의와의 관계, 그리고 여성 범주 외에 대한 배제적 경향 등은 여전히 질문으로 남게 된다.


저자 김보명은 오늘날 청년세대의 페미니즘 정치학이 (신)자유주의적인 사회적 환경 및 거기에 조응한 포스트-페미니즘의 유산 위에서 (그리고 그에 맞서며) 형성됐음을 적시한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우리들 대다수는 자신이 경험하는 문제의 원인과 해결을 오로지 ‘자기-책임’으로 상상하도록 유인돼 왔다. 물론 해방적 효과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동안 개인의 능동성을 억압하던 전통적 권위주의 체제와는 방향성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대를 풍미했던 포스트-페미니즘이 여성 행위의 능동성을 강조하며 ‘자기-테크놀로지’의 신화들을 만듦으로써 이런 분위기에 일조했던 것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비밀일 것이다.

어쨌든 그러면서 우리들의 삶과 윤리를 한계 짓는 규범 자체가 이전과는 다르게 만들어져버렸다. 저자의 설명처럼,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여성들은 임금노동과 재생산노동, 그리고 친밀성의 영역을 유연하게 넘나들며 자신의 몫을 협상하고 감당할 수 있어야 하며 때로는 부족한 자원과 구조적 모순을 개인의 능력으로 해결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문제는 주지하다시피 이런 삶이 모두에게 가능한 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국사회는 이런 문제에 따르는 비용을 “여성들에게 오롯이 전가”하면서 근근이 버티고 있을 뿐이다. 결국, 청년세대 여성들의 페미니즘 실천은 이 모든 위험과 비용 지불을 거부하는 ‘생존’ 선언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김보명은 페미니즘 실천의 궤적을 있는 그대로 따라가지만은 않으며, 이 지점에 와서는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미 익히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새로운 페미니스트 주체들은 ‘남성’을 설득하거나 혹은 ‘사회’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에 우선해 먼저 ‘여성’의 역량을 결집하고 조직하는 데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와 같은 사회-공간적 탈주는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남성들의 문법으로 남성을 설득할 수 있을까. 그리고 사법적인 방식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그렇지만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오늘날의 새로운 페미니스트 실천은 그와 같은 곤란이 조건 짓는 한에서 전개된 것일 수도 있다. 여기서 이들이 ‘여성’ ‘역량’을 조직하는 데 집중한다는 부분에 주목해보자. 이 두 단어는 페미니즘 리부트가 내포하는 두 가지 쟁점을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먼저, (신)자유주의와의 관계. 새로운 페미니스트 실천이 신자유주의화가 초래한 부조리에 대항하는 실천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에도, (신)자유주의적인 권리 담론 및 주체화 양식과 이 운동이 실제로 어떤 이론적·정치적 거리를 확보하고 있는지는 아직 충분히 토의되지 않은 것 같다. (이 부분은 저자가 상술하지는 않고 있지만) 확실히 어려운 문제다. 그리고, ‘여성’의 저항 공동체 형성. 이 논점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청년세대 페미니즘 운동이 부득불 나타내고 있는 분리주의적 성격은 그 자체로 하나의 질문거리가 되고 있다. 페미니즘 역사에 기입할 이들의 정치학이 어떤 시민권을 구성할지에 대해서는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결국, ‘페미니즘 리부트의 경로와 (현재적) 특징들’은 어떤 불가피함과 어떤 불가능함의 결합체를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다만, 그 같은 지도 위에서 저자는 “‘여성’의 이름으로 상상하고 만들어내는 저항의 정치학이 생존을 위한 전략과 영토전을 넘어”서기를, 그리하여 “연대의 정치학으로 확장”되기를 주문하고 있다.[워커스 4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