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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성적 자기결정권

[워커스] 레인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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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한주 기자]

“남성우월적·전근대적 사회구조나 가치관에 기반을 둔, 사회에서는 보호하여야 하고 여성은 스스로 지켜야 하는, 보호법익으로서 ‘정조’라는 개념은 폐기되고, 성적 주체성을 가진 존재가 행사하는 ‘성적 자기결정권’의 개념이 보호법익으로 교체된 점뿐만 아니라 개인 스스로 선택한 인생관·사회관을 바탕으로 사회공동체 안에서 자기 책임 아래 각자의 생활을 결정·형성하는 성숙한 민주시민이 우리 헌법이 지향하는 바람직한 인간상이라는 점에 비추어 보면, 여성은 독자적인 인격체로서 자기 책임 아래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음이 당연하고, 이러한 여성의 능력 자체를 부인하는 해석은 오히려 여성의 존엄과 가치에 반하고 나아가 여성의 성적 주체성의 영역을 축소시키는 부당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여성이 상대방 남성과 성관계를 가질 것인가의 여부를 자유의사의 제압이 없는 상태에서 결정하였음에도 자신의 결정을 사후적으로 번복하면서 상대방의 처벌을 요구하는 것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스스로 부인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피고인 안희정에게 무죄 판결을 내린 판결 선고문의 일부다. 이후 재판부는 재판과정에서의 피해자 진술을 하나하나 적극적으로 왜곡하고 기각하면서 피해자가 “성적 주체성과 자존감이 결코 낮다고 볼 수 없”고, “개인적 취약성 때문에 성적 자기결정권을 스스로 행사할 수 없었던 사람으로 보이지도 아니하”기 때문에 ‘위력에 의한 간음’으로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려버린다. 이 결론을 의도적으로 도출하기 위해 선고문은 서두에서부터 ‘성적 자기결정권’을 이런 식으로 해석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이 선고문은 피해자의 피해 사실을 부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의 성적 주체성의 영역을 축소시키는 부당한 결과를 가져오는” 책임까지 전가해 버리고 있다. 총체적으로 온갖 개념과 용어가 어떠한 이해도 없이 그저 둥둥 떠다니는 이 이상한 선고문에 의해, ‘성적 자기결정권’은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그럴 듯한 명분으로 악용돼 버렸다.

성적 자기결정권이 함정이 되는 사람들

비단 이번 재판만이 아니다. 한국의 사법부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매우 협소하고 편협하게 이해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지금까지 수차례 성적 자기결정권의 원래 의도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판결을 내렸다. 개인의 성적 자율성과 권리를 보장하지는 않으면서 정작 이를 침해한 사건에서는 오히려 성적 자기결정권 개념을 이용해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어 온 것이다.

때문에 청소년이나 장애인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의심받고 그로 인해 권리를 제한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정작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이유로 갑자기 합의 여부가 강조되고 피해사실이 인정되지 않는다. 성소수자는 성적 자기결정권이 온전히 보장되지 못하면서도 도리어 쉽게 가해자로 몰리기도 한다. 성노동자는 아예 기본적으로 불법적 존재이고 의심의 대상이다. 권리 주체로 인정되기보다는 차별적 인식과 낙인이 먼저 전제되는 이들에게, 지금 한국사회 사법부에서 이해하는 성적 자기결정권의 수준은 권리가 아니라 피해를 더 입증하기 어렵게 만드는 함정에 가깝다. 사회적으로 더 경계에 내몰리고 취약한 위치에 있는 이들일수록 권리 대신 책임만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권리’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권리’다. 이제 성적 자기결정권이 ‘권리’로서 제대로 작동하게 해야 한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일반적으로 성적 가치관을 형성할 권리, 상대방을 선택할 권리, 의사에 반한 성적 행위를 강요당하지 않을 자유, 성적 수치심을 감내하지 않을 자유, 성생활의 가능성을 국가와 사회에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한다. 그리고 이런 권리와 자유가 제대로 보장되려면 성적 권리의 보장이 바탕이 돼야 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성적 건강을 보장하기 위한 기본 인권으로서 성적 권리를 제시하면서 ‘평등과 차별 금지에 대한 권리’를 첫 번째로 언급하고 있다. 14차 세계 성 학회의 홍콩 선언에서도 “성적 자유에 대한 권리. 성적 자유는 개인이 자신의 모든 성적 잠재력을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포함하는데, 이것은 삶의 모든 시간과 상황에서 성 억압, 착취와 학대의 모든 형태를 배제해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즉, 성적 권리와 성적 자기결정권은 단순히 개인의 주체적 권리 행사 여부 혹은 개인의 권리 침해 여부 차원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성적 자기결정권이 헌법을 통해 ‘권리’로서 도출되는 이유는 이를 보장해야 할 책임이 기본적으로 국가와 사회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권리를 침해하는 법과 제도를 바꿔나가는 일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방향과 동시에, 불평등과 차별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과연 성적 권리, 성적 자기결정권을 제대로 보장하고 있는가?

성소수자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가장 기초적인 원칙이 부정되고, 성매매 현장에서 벌어진 폭력 피해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가해자보다 피해자를 향한 처벌과 낙인, 끝도 없는 의심을 먼저 감수해야 하며, 직장에서, 가정에서 일상적인 위력에 의해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밝히는 것조차 또 다른 피해로 돌아올 것을 감수해야 하는, 폭력을 당한 다음 날 살아남기 위해 웃었다면, 다시 가해자를 위해 일상의 업무를 수행했다면 피해를 입증할 수 없게 되는 사회에서 말이다.[워커스 4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