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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나를 정규직이라 했지만, 난 아직도 비정규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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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자동차 사내하청업체에 입사한 지 벌써 14년이다. 나는 기아자동차 화성공장의 여러 하청업체 중 완성차의 품질을 검사하는 PDI에서 일한다. 내가 입사했을 당시엔 ‘쏘렌토’라는 차가 인기였다. 내 손으로 인기차종을 검사하고, 검수한 차를 고객이 탄다는 생각에 나름 자부심을 느꼈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우리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단순히 자본의 배를 불리는 도구에 불과했다.

비정규직 노동자에겐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있었다. 생산율을 높이기 위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꼭두각시처럼 사측의 지시에 따라야 했다. 정당하게 주어지는 생리휴가뿐 아니라 아프거나 개인 사정이 있어도 잘릴까봐 휴가도 못 썼다. 주말엔 쉬지도 못하고 특근을 해야 했다. 꾹 참고 일하는 게 회사가 정한 우리의 의무였다. 일하다가 장난을 치거나 큰 웃음소리라도 나면 원청 관리자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쓴 소리를 했다. 우리가 눈치를 보는 건 관리자뿐이 아니었다. 비정규직이 어쩌다 불량을 놓치면 라인 끝에서 제품차를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정규직들이 입에 담지도 못할 욕설을 퍼부었다. 그럴 때면 우리가 저들과 같은 노동자인지, 같은 사람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출처: 김용욱]

화성공장은 2003년 비정규직 현장투쟁단을 시작으로 우여곡절 끝에 2005년 6월 4일 기아자동차 비정규직지회를 창립했고, 2005년 11월엔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노조가 생기면서 불합리함을 당당히 문제제기 할 수 있게 됐다. 지금 기아차에서 벌어진 채용 성차별 문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정규직 노조를 향해, 정부를 향해 부당한 차별을 시정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혼자 숨죽여 지냈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조라는 언덕에 기대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기아자동차 비정규직지회 2기 집행부가 들어서고 여성부가 신설됐다. 여성부장을 맡아 줄 수 없겠냐는 제안에 처음엔 단칼에 거절했다. 두 아이의 엄마인지라 내 가정에 충실하고 싶었다. 하지만 꼭 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왠지 모르겠지만 자격을 불문하고 나서고 싶었다. 그렇게 가족을 설득했고 기아자동차 비정규직지회 첫 여성부장을 맡게 됐다.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 부담이 컸다. 하나하나 배우면서 올해 4월 14일, 기아자동차 비정규직지회 첫 여성위원회를 띄웠다. 불이익과 차별에 노출된 여성의 현실을 바꿔보자고 결의했다.

채용 성차별에 대한 문제제기 역시 여성위원회의 주요 과제다. 2014년부터 진행된 기아차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우대채용 및 특별채용과정에서 1500여 명 정도가 정규직으로 채용됐으나 여성노동자는 단 한 명도 채용되지 않았다. 또한 비정규직 공정이 정규직 공정으로 인소싱되면서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10년이 넘게 일해 온 공정에서 쫓겨나 다른 업체로 강제 전적되고 있다. 이에 따라 지난 5월 16일 여성위원회를 중심으로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여성채용차별 및 강제전적에 대해 기자회견을 하게 됐고 인권위에 진정을 접수했다.

“20년 넘게 뼈 빠지게 일했는데 돌아온 것은 여성 비정규직 이중차별, 고용불안, 불법파견, 기아자동차의 갑질이었습니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기피해온 더럽고 힘들고 어려운 공정에서만 일해 온 우리 비정규직들. 15년 전에 어렵게 노동조합이라는 걸 만들고 이제까지 원하청 사측의 탄압에 맞서 저항하고 싸워왔습니다. 10년이 넘는 처절했던 투쟁의 성과로 불법파견 판결을 승소로 이끌어내고 이제는 좋은 시절이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했나요? 불법파견 판결로 들떠있던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정규직 전환이 아니라 10년 넘게 일해 온 일터, 내 공정에서 강제로 쫓겨나는 것이었습니다. (…) 회사의 악랄함은 우리들의 소박한 바람마저 무참히 짓밟고 있습니다. 이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은 더는 참고만 있지 않을 것입니다. 당하고만 살지도 않을 것입니다.”

빗속에서 외친 이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기아차 성차별 채용 문제가 널리 알려졌다. 그리고 기아차 첫 여성 합격자가 발표됐다. 이번에 발표된 3차 특별채용에서 화성공장은 남성 182명, 여성 26명을 정규직화하기로 했다. 명백한 성차별이 도마 위에 오르고, 여론이 안 좋아지자 이를 잠재우기 위한 생색내기 식이었다.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이 극소수의 여성채용을 두고 기뻐해야 하나? 채용 성차별은 아직도 공고하고, 불법파견에 따른 강제전적 문제도 그대로다.

특히 이 같은 강제전적으로 여성노동자들은 임금이 삭감되거나 노동 강도가 높아지는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고 있다. 사측은 청소, 식당 노동자들의 업무를 직접 생산 공정과 무관한 ‘총무성’ 업무로 분류했고, 컨베이어벨트를 타는 직접 생산라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정규직 전환 대상에서 제외했다. 더군다나 ‘총무성’이라는 회사의 딱지는 임금차별로 이어지고 있어 식당, 환경미화 노동자들은 고용과 임금에서 이중차별을 받고 있다.

법원은 2014년 1심, 2017년 2심에서 기아자동차 모든 사내하청은 불법파견이고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하라고 판결했다. 그럼에도 사측은 불법파견 판결을 축소, 은폐하며 정규직 전환이 아닌 비정규직 일부를 채용하는 특별채용 편법을 동원해 정규직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미 우리 여성노동자들은 할 수 있는 업무에 지원하고 입사했다. 다른 업무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불법파견 공정이라는 법의 판결을 받은 내 자리에서, 정규직으로 일하고 싶을 뿐이다.

정규직의 고충 해소를 위해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희생을 강요하는 정규직 노조의 주장도 사회적 질타를 받아 마땅하다. 정규직 자리가 된 그곳에 남성 정규직 노동자가 가야하고, 여성노동자는 다른 일을 하라는 주장은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를 배제하는 사측과 다를 바 없다. 여성비정규직의 공정을 빼앗기 전에 사측에 인원충원 및 노동환경 완화를 요구하는 게 맞다. 정규직 노조는 더 이상 사회적 고립을 자초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더 큰 문제로 함께 나아가야 할 것이다. 현대기아차 자본의 불법파견, 불공정거래, 노조파괴, 경영세습 갑질을 철폐하고 범죄자 정몽구-정의선 부자를 처벌하기 위해 원하청 노동자와 전국의 동지들과 함께 끝까지 연대하고 투쟁할 것이다.[워커스 4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