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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폐지 운동이 퀴어에게도 중요한 이유

[워커스 레인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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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몇 주의 간격을 두고, 아일랜드와 아르헨티나에서 연이어 낙태죄 폐지에 관한 소식이 전해졌다. ‘여성의 생명이 심각하게 위협받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경우의 임신중지가 전면적으로 금지돼 있고 이를 어긴 경우 최장 14년의 징역형이 가능했던 아일랜드에서는 국민투표로 수정헌법 제8조를 폐지하는 수순을 밟을 수 있게 됐다. 산모의 생명이나 건강이 위험할 경우, 성폭행으로 인한 임신일 경우를 제외한 모든 임신중지가 불법이었기 때문에 안전하지 못한 인공임신중절과 후유증으로 산모 사망률이 매우 높았던 아르헨티나에서도 하원 의회가 임신 14주까지 낙태를 허용하도록 하는 내용의 법안을 통과시켰다. 의회에서는 23시간 동안 릴레이 토론이 진행됐고, 의회 밖에서는 수만 명의 시위가 밤낮으로 계속됐으며, 1만 8천여 명이 유튜브 생중계로 토론 상황을 지켜봤다. 그리고 그 현장에 수많은 퀴어들이 함께했다. 임신중지 합법화를 요구하는 초록색 손수건을 든 아르헨티나 시위 참가자의 손에는 무지개 리본이 함께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잘 알려졌다시피 현재 아일랜드의 총리는 인도계 이민자 출신의 게이 남성이다. 이는 단순히 우연이 아니다. 낙태죄 폐지 운동에 퀴어들이 함께한 역사는 사실 매우 오래되었다. ‘낙태죄’는 ‘임신중지 행위에 대한 처벌’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낙태죄의 역사는 여성의 몸에 대한 통제의 역사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인간생명과 섹슈얼리티 통제의 역사다. 임신중지에 대한 처벌은 전쟁이나 기근 등으로 인해 노동력이 필요할 때는 강화됐다가 다시 경제적, 정치적 이유로 여성의 노동력과 산아제한이 필요해졌을 때는 완화되는 방식으로 유지돼 왔다. 이러한 통제 방식 속에서 ‘노동하기 적절한 몸’이 선별되어 왔음은 물론이다. 법과 제도를 통해 사실상 생명을 선별해 온 것은 국가인데, 그에 대한 책임과 처벌은 여성의 몫으로 전가됐다. 그리고 이 통제의 근간에는, 성별이분법적 체계, 이성애 중심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성소수자 탄압과 처벌의 역사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때문에 퀴어 운동과 낙태죄 폐지 운동은 불가분의 관계다. 퀴어로 살아가는 이들 중 누군가는 성별이분법과 이성애 중심주의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해야 하거나 강제로 자신이 원치 않는 파트너와의 결합을 요구받아 임신이나 임신중지를 경험한다. 또 누군가는 스스로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임신이나 임신중지를 경험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자신이 신체적으로 지니고 있는 생식 능력을 제거해야만 성별 정정 승인 받을 수 있는 법과 제도로 인해 불임을 요구받는다. 누군가는 성폭력으로 인한 임신을 경험한다. 퀴어 정체성을 지닌 당사자에게 성폭력으로 인한 임신은 한층 복잡한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적인 경험이다. 퀴어로 살아가며 자신이 원하는 파트너와 함께 아이를 출산하거나 양육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그 과정에서의 임신중지는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경험이다. 임신중지가 처벌로서 남겨져 있을 때, 그리고 여성의 몸이 오직 ‘출산할 몸’, 심지어 ‘태어날 아이를 운반하는 도구로서의 몸’으로만 여겨질 때 그 사회는 여성에게 폭력적인 사회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체통합성을 찾아갈 권리와 성적 권리, 건강권을 존중받지 못하는 모든 퀴어들에게도 폭력적인 사회일 수밖에 없다.

지난 6월 초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된 영화 〈낳을 권리, 낳지 않을 권리 Birthrights〉는 1973년 역사적인 로우 대 웨이드 판결로 프라이버시 권리로서의 임신중지 권리는 인정됐으나 이후 기독교 우파 프로라이프 조직들과 정치권에 의해 사회적 권리 제반이 침해당함으로써 미국 여성들이 부딪히고 있는 폭력적인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임신중지를 오직 ‘개인적인 선택’에 관한 문제로만 간주하는 사회적, 법제도적 인식은 임신중지를 둘러싼 다양한 경제사회적 요건들과 정치적 영향을 간과하게 만든다. 때문에 70년대부터 낙태죄 폐지와 재생산 건강권, 재생산 정의를 위해 활동해 온 활동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사비아 타마킨 감독은 ‘낙태권에만 집중한 것’, ‘선택권에만 집중한 것’, ‘생명권의 프레임을 프로라이프가 가져가게 만든 것’이 지난 운동의 역사가 지닌 과오라고 이야기한다.

경제상황, 질병, 장애, 지역적 조건, 이주상태, 종교, 가족상황, 환경 등 제반의 사회적 조건들은 실질적으로 임신중지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건들이며 따라서 이 제반의 사회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것은 임신중지의 권리를 보장하라는 요구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성적 권리’ 역시 이러한 사회정의의 요건들 속에 함께 자리하고 있다. ‘낙태죄’가 임신할 이의 자격과 의무를 규정하고, 그에 따라 누군가를 처벌과 낙인의 대상으로 만들며 심지어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는 사회는 진정 누구에게도 정의롭고 ‘퀴어로운’ 사회가 될 수 없기에, 수많은 퀴어들이 오늘이 순간에도 전세계에서 낙태죄 폐지 운동에 함께 하고 있다. <워커스 4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