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언론 참세상

팍스(pax, 평화)

[워커스] 워커스 사전

메뉴보기: 클릭하세요. V


“나는 테라스에 있다(Je suis en terrasse).” 2015년 파리 테러 당시 파리 시민들은 sns를 통해 전과 다름없이 옥외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는 인증샷을 올리면서 저 문장에 해시태그를 붙여 공유했다. 테러와 같은 폭력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시민의 평화주의와 비폭력 의지의 표시였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폭력에 저항하는 평화주의자들의 행동은 왜 목숨을 건 자살테러가 일어났는지에 대한 원인은 감추고 평화와 폭력을 문명 대 야만의 구도로 치환시켜 버리기 쉽다. 이런 구도 속에서 평화와 폭력은 선택의 문제로 드러나고 평화적인 방법과 폭력적인 방법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지는 각자의 의지와 선호에 달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평화는 방법론이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평화주의와 비폭력주의는 평화를 빼앗긴 곳, 폭력이 난무하는 곳에서 그것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 갖는 행동의 원칙이며 신념이다. 그 말은 평화가 보장된 체제 안의 안전 지대에 사는 사람들의 심적 상태나 행동 양식에 대해 쓸 수 있는 말이 아닌 것이다. 파리지앵의 테라스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집안 보다 더 안전하다. 자본이 제도화된 민주주의와 사회적 대화를 선호하는 것은 그들의 폭력을 싫어하고 평화적 수단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며, 노동자와 민중들이 거리에서 싸우는 것은 평화적 방법을 싫어하고 폭력적 수단을 선호하기 때문이 아니다. 제도화된 폭력은 총도 칼도 쓰지 않고 한 인간의 삶을 부수어버릴 수 있지만 우리는 그것이 오직 조용히 이루어진다는 이유로 평화로운 방식이라고 부르지는 않다.

역사적으로 ‘팍스 로마나(pax romana)’,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nnica)’,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로 불렸던 평화체제는 언제나 제국의 패권에 의해 수립되고 보장됐다. 로마에 의한, 영국에 의한, 미국에 의한 평화체제가 지속될 때 그 평화의 시간은 어떤 이들에겐 고문, 체포, 감금, 암살, 학살의 시간을 의미했다. 종종 2차 대전 이후를 전쟁이 종식된 평화의 시대라고 말한다. 그러나 ‘평화의 시대’란 미국과 서유럽 본토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다. 냉전이란 말로 호환되는 평화체제는 늘 국지적 분쟁과 항구적 내전 상태를 포함하고 있었다. 평화는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이곳의 평화는 언제나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대가다. 평화는 만인의 것이 아니다. 누군가 누리는 평화는 다른 이가 치르고 있는 전쟁의 대가다. 우리의 평화 역시도 그렇다. 부르주아적 세계의 평온함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처리되는 잔혹한 폭력과 죽음의 세계 위에서 성립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평화로운 밥상은 잔인한 도살의 전쟁터를 숨기고 있고, 우리의 평화로운 도시와 안락한 주택은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건 노동과, 전쟁과 다름없는 철거민들의 추방의 역사를 숨기고 있다.

그런 이유로 어떤 이들에게는 평화체제가 전쟁 상태보다 더 잔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90년대 극심한 경제불황을 겪으면서 평화헌법 개정에 찬성하고 ‘우리는 전쟁을 원한다’고 외쳤던 일본의 보수 우익 청년들은 자신을 대변해줄 어떤 정치조직도 없는 하층 노동계급 청년들이 절망적 상태에서 어떤 극단으로 결집할 수 있는 지를 보여준 사례다. 그들은 전쟁이 차라리 기회와 평등을 가져다 줄 것이라 믿었다. 이 ‘평화로운’ 나라에서 조용히 ‘평화롭게’ 죽어가는 것보다 전쟁이 일어나 영웅으로 죽는 편이 낫고 보훈연금이라도 남겨줄 수 있으니 그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애국심에 기대어 전쟁을 호소하고 배외주의를 선동하는 극우정당들이 세계적으로 득세하고 있는 배경도 같은 맥락이다. 일상이 전쟁이 돼버린 삶과 조용한 죽음은 지금 한국 사회에서도 가장 밑바닥 노동자들에서부터 시작돼 도처에 일어나고 있는 일이 됐다.

그런 시점에서 2018년 4월 27일 11년 만의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됐다. 이제 북미 협상까지만 잘 되면 한반도 평화체제가 곧 수립될 것처럼 보인다. ‘평화’라는 말은 이 땅에 사는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절대선이자 공존과 공생의 공리를 담는 단어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 이 평화의 주인은 과연 누구일까. 팍스 로마나, 팍스 브리타니카, 팍스 아메리카나에 이어 지금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팍스의 지배자는 누구인가. 칼 폴라니의 책, <거대한 전환> 제 1장은 유럽에서 유래 없던 19세기의 백년평화에 대한 분석으로 시작한다. 1815년에서 1914년까지의 이 평화체제를 폴라니는 금융가들의 연합에 의한 ‘실용적 평화주의’라고 부른다. 평화체제는 본래 세력균형체제로 “세력균형을 통하여 얻어지는 결과란 그 균형에 참여하는 권력단위들의 생존이며 이는 평화와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 시기 평화를 가장 강력하게 지지하고 요구했던 곳은 ‘오뜨 피낭스(haute finance)’라는 국제 금융 조직이었다. ‘고귀한(haute) 금융가(finance)’란, 금융족벌인 로스차일드(Rothschild) 가문을 중심으로 이미 일국의 경계를 넘어 활동하던 유럽의 국제금융 시스템을 일컫는다. 즉 당시의 평화체제는 금융 자본가들이 자기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세력 균형과 현상유지를 추구하도록 정부를 압박한 결과라는 것이다. “돈벌이를 주된 관심으로 삼는 은행가들이 광포한 전제군주들에게 헌법 – 평화의 이름으로 –을 받아들이도록 구워삶았다. 그리하여 그 형식은 다양하고 또 이념도 항상 달랐지만 – 때로는 진보와 평화의 이름으로, 때로는 왕권과 교권을 내걸고, 때로는 주식시장과 수표책을 통해, 때로는 타락과 뇌물을 통해, 때로는 도덕적 주장과 계몽의 호소를 통해, 때로는 함포 사격과 총검을 통해 – 항상 똑같은 결과가 달성되었으니, 그것은 바로 평화의 보존이었다.”1)

자본의 이해관계가 유럽 협력 체제를 만들어낸 가장 큰 동인이었다는 이 분석은 지금의 남북 협력 체제의 동인을 분석하는데도 유의미하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남한 경제가 이미 금융자본의 볼모로 잡혀있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인한 손실이 너무 크기 때문에 현대의 오뜨 피낭스 역시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원치 않는 것이다. 세계적 중립국들이 금융과 무역의 피난처로서 자본의 공동이익을 위해 평화를 보장받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다. 그러나 이 평화체제는 또한 그만큼 ‘실용적’ 평화체제이기에 손실이 이익으로 계산되는 순간 언제든 전쟁을 개시할 수 있는 무장한 평화체제이기도 하다. 또한 폴라니가 말했듯이 “전면전은 극도로 엄격하게 방지하는 반면 국지전은 끝없이 벌어지게 내버려두면서 그 가운데에 평화로운 영리활동이 벌어질 수 있도록 보장한다는 것이 그 본질적인 성격”이다.

북의 자원과 남의 자본을 결합하는 개발협력체제로서의 평화체제는 과연 누구의 이익이 될까. 그 체제에 참여하는 ‘권력 집단들’에게는 이익이 될 것이다. 반면 계급 간 사회갈등과 남북 지역 간 갈등 및 항구적 내전 상태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민중의 고통이 될 것이다. IMF체제 이후 남한에서 전개된 내부의 디아스포라는 이미 분단에 따른 이산의 고통 그 이상을 넘어서고 있고 공동체적 삶의 윤리와 사회안전망이 극도로 파괴돼 사회적 내전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된지 오래다. 자본의 힘의 압도적 우위에 의해 도래할 평화체제 하에서 내부 식민지화와 난민화는 더욱 폭력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그들의 평화가 우리의 전쟁을 대가로 하는 것이라면, 또한 우리의 평화가 타인의 전쟁 위에 기반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 평화를 달게 받을 수 있는가. 평화는 고귀한(haute) 자들이 가져다주는 선물이 아니다.

평화의 반대말은 전쟁이며 전쟁에 맞서 싸우는 것이 평화요, 전쟁을 저지시키는 것이 평화다. 노동자에게 평화는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전쟁을 끝내는 것이다. 민중과 노동자의 평화는 자본이 원하는, 국제 통화와 국제 금융 시스템을 보장하기 위한 ‘평화체제’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평화는 방법이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전쟁이라는 직접 폭력과 자본주의 체제라는 구조적 폭력에 맞서 싸울 때, 그리고 그 힘이 커질 때 비로소 얻게 되는 ‘현실의 상태’다. 자본에 의한 평화체제가 무장한 힘들의 균형 상태에 의한 관리체제라면 민중과 노동의 평화는 자본의 폭력적 힘들을 무장해제하고 무력화할 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평화는 예루살렘의 만찬장에 둘러앉은 열강의 협상 테이블이 아니라 자본의 무기를 향해 날아가는 돌멩이에 그 희망이 놓여있다. 한반도의 평화도 마찬가지다.[워커스 43호]

[각주]
1) 칼 폴라니. 홍기빈 옮김.『거대한 전환』. 도서출판 길. 2010. 9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