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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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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계]

권력의 구조 속에서, 권력 관계상 우위에 있는 자가 약자에게 행하는 부당행위를 통칭해 보통 ‘갑질’이라고 부른다. 이 말은 계약의 양 당사자를 가리키는 갑을관계의 ‘갑’에 ‘행동, 행위’를 비하적으로 의미하는 ‘질’을 붙여 만든 신조어다. 그런데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에 체결되는 근로계약에서는 주로 사용자가 갑이 되고 노동자가 을이 된다. 하지만 사용자는 노동을 지휘·감독하는 주체이며 노동자를 고용하고 해고할 수 있는 당사자이다. 반면에 또 다른 당사자인 노동자는 그에 종속될 수밖에 없고 이는 근로계약의 본질적 속성이다. 현실에서 이 양자는 상호 동등한 지위의 계약 당사자가 아니며 그 계약관계 또한 평등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회사의 갑질’이란 표현은 성차별적 구조와 젠더 위계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을 ‘더러운 욕망’이나 ‘추문’이라 부르는 것만큼이나 부적절한 용어 사용이다. 그 말은 노동관계 속에서 권력의 위계가 폭력을 생산하고 용인해 온 구조를 감추고 단순히 개인의 일탈행위로 받아들여지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갑질’이란 용어는 그 말이 담고 있는 현실의 반인권적이며 반노동적 폭력행위를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하기엔 너무나 사적이고 앙증맞기까지 한 단어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갑질’의 현장은 대부분 노동의 영역이고, 피해자도 대부분 노동자들이며, 가장 열악한 노동조건 하의 노동자들이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는다. 그런데도 이 갑질이란 용어는 그것을 개인과 개인들 사이의 문제로 일반화하여 문제의 원인과 실태를 노동의 관점에서 포착하는 것을 방해하고 흩트려 놓는다.

갑질이 아니라 폭력

갑질에 대응하는 영어권의 말은 ‘모빙mobbing’, ‘불링bullying’으로 이러한 행위에 대해 폭력 범죄로 규정하는 경향이 늘고 있다. 스웨덴에서는 일반적인 괴롭힘과 분리하여 고용상의 문제로 발생하는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해서는 불링bullying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별도로 ‘피해victimization(스웨덴어 kränkande särbehandling)’란 용어를 사용한다. 일본에서는 2001년 ‘파와 하라스먼트(power harassment: 파와하라)’란 용어가 등장했다. ‘파와하라’와 함께 ‘모랄 하라스먼트(moral harassment)’라는 말도 쓰는데, ‘권력을 이용한 학대’ 혹은 ‘권력 폭행’, ‘언어나 태도를 통한 정신적인 학대’를 뜻하고 둘 다 주로 상사가 지위를 이용해 부하를 괴롭히는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해 사용한다. 관련 분쟁이 늘어나자 일본 정부는 2011년부터 후생노동성 산하에 ‘직장 내 괴롭힘 문제에 대한 원탁회의’를 설치하고 대책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스웨덴, 노르웨이 등 북유럽 국가에서는 1980년대에 왕따 폭력 및 직장 내 괴롭힘 등의 폭력 유형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고 1990년대 말부터 독일, 프랑스, 캐나다 퀘백주, 포르투갈, 벨기에 등의 국가들에서는 노동관계 속에서의 집단 괴롭힘과 정신적 학대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다. 인권과 노동권이 상대적으로 강화된 ‘선진국’이어서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 나라들에서 이 문제가 법적 제재가 필요할 정도로 심각한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대두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프랑스 노동법은 ‘갑질’에 상응하는 직장 내 괴롭힘의 개념으로서 ‘정신적 괴롭힘(harcèlement moral)’을 사회적 법적 개념으로 정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노동에 있어서 정신적 폭력은 신체적 폭력과 달리 그 실체가 일반적으로 부정돼 왔고, 법적 규정의 대상으로 인정되지 않아 왔는데 1991년 프랑스공산당 의원단의 의원들이 ‘노동에 있어 정신적 괴롭힘에 대한 법률안’을 제출했다. 다음해 상원에서 법률안이 발의, 2002년 ‘사회현대화 법률(loi de modernisation sociale)’에 포함됨으로써 정신적 괴롭힘의 개념이 법적으로 인정됐고 피해자들이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법안의 사회적 입법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근거는 이러한 폭력행위가 ‘인간존엄성의 침해와 직접적으로 관련된다’는 것이었다. 2008년 ‘인간존엄성에 관한 위원단 보고서’는 “무례함, 모욕, 비인간화는 인간존엄성에 대한 공격의 핵심적 차원이다”라고 명시했다. 갑질 폭력 또한 피해자를 인격적 정신적으로 파괴시키며 때로는 노동 자체를 훼손시키는 인간존엄성에 대한 공격이며, 노동자의 주권과 존엄에 대한 중대한 침해이다. 피해자의 영혼을 짓밟고 가해자들의 인간성을 파괴하며 방조자들에게 죄책감과 무력감 혹은 교활함을 남기는 이런 폭력은 얼마나 잔인한 것인가.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폭력에 대해선 ‘갑질’이란 귀여운(?) 용어를 사용하고, 집회나 시위에서 정당한 저항권을 행사하는 것에 ‘폭력’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니 더 이상 갑을관계의 비유적 표현인 갑질이 아니라, ‘일터 괴롭힘’이나 ‘권력형 부당행위’ 등의 개념으로 정확히 규정하여 사용해야 할 것이다. 갑질이 아니라 폭력이다.

자본주의적 노동관계와 착취

왜 이런 폭력이 만연하게 되었을까. 관련 연구를 보면, 공통적으로 그 배경에 기업이 노무·인사관리 기법으로 성과주의 경쟁 시스템을 도입하고, 개인주의를 조장하여 노동공동체를 약화시키며 노동연대 및 집단적 귀속감이 해체되어가는 과정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한다. 노동자들이 업무에 대한 자기 통제력과 자율성이 극도로 사라질 때, 위계적 서열 속에서 개인들 사이의 관계가 왜곡될 때, 권력을 사적으로 남용하거나 하급자를 향해 적대적으로 표출하는 비정상적 폭력 형태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극단적 스트레스 상황에 놓인 공장식 축산 시설의 동물들이 약한 개체를 공격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다. 동물은 단순히 신체를 공격하지만 인간은 이성이 있어 언어와 태도 및 비폭력적 수단으로 약자를 공격하고 정신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이 ‘만인이 만인에게 늑대(homo homini lupus)’인 상황은 ‘만인이 만인에게 노예(homo homini servus)’이도록 만드는 자본주의적 노동관계와 착취의 심화 속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갑질’은 자본이 인간을 상대로 휘두르는 폭력의 양태다. 자본의 규모와 집중이 커질수록 경영의 중간관리자들은 늘어나고, 대리 권력자로서 소(小)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그런 소권력자들은 권력의 사적 사용을 통해 자기의 힘을 확인하고, 억압된 힘의 의지를 왜곡된 형태로 분출한다. 제한 받지 않는 자본권력과 그로부터 끊임없이 파생되는 소(小)권력자들이 만들어내는 이 폭력의 연쇄를 끊어내지 않으면, 인간의 인간에 대한 폭력은 멈출 수 없다. 노동자의 저항은 폭력이라 부르고 자본의 비인간적 지배 양식에서 나타나는 학대 폭력을 갑질이라 부르는 것은 맞지 않다. 허용해선 안 될 것은 후자의 폭력이다. 노동자들에게 남발되는 손배소의 법적 책임은 이 폭력의 행위자와 최종 원인에 엄격하게 물어야 할 것이다. 공장의 물건(res)을 파손한 것보다 한 인간의 존재(ens)를 파괴하는 것이 훨씬 더 큰 중범죄다.[워커스 4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