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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운동과 가해자학교

[워커스] 반다의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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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자 자조모임에서, 때로 여성들은 놀라워한다. 가해자가 다를 뿐, 자신이 겪은 피해 내용과 가해자의 대응 방식 등이 너무나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딘가에 ‘가해자 학교’가 있을 거라며, 자조적 농담을 하기도 한다. 최근에도 서지현 검사의 미투 운동(#Me Too)으로 공개 된 안태근 전 검사 성폭력 의혹사건을 두고, 한 기자가 이렇게 말했다. 그 기자는 이진한 전 검사에 의한 성폭력 피해자이기도 한데, “안태근 전 검사와 이진한 전 검사의 행위는 놀랍도록 비슷”했으며, “세부적인 행동마저 유사해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고 말이다. 가해자 학교는 정말 있는 게 아닐까.

[출처: 사계]

# 쪼잔한 남자되기와 남성성

직장 내 성폭력 근절을 위해, 여성단체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직장 내 성폭력예방 의무교육. 그 강의를 하는 지인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쪼잔한 남자되기’ 강좌라며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한 번씩 듣는다고 한다. 불평하는 내용은 주로 이렇다. ‘신입 여자 직원을 남자 상사 옆에 앉히려고 하지 마라. 회식에서 브루스 추자고 여자 동료를 끌어안을 때, 그 동료의 기분을 상상해 봐라. 회식에서 남자들끼리 성매매업소를 가며 동질감을 형성하는 문화에서 빠져나와라.’ 그런데 적지 않은 남자들이 이런 내용을 ‘쪼잔한 남자되기’로 수용하면서, 남성성이 희석되는 행위로 여긴다는 것이다. 도대체 그들에게 남성성이란 무엇일까.

기업에 다니는 남자 지인들은 말한다. 회식 때 룸살롱은 어쩔 수 없이 가더라도 ‘여성도우미’ 서비스는 거절하려고 노력하는데, 그러면 “새색시처럼 굴지 마라” “달릴 게 안 달린 거 아니냐” “남자 맞냐”라는 압박에 시달린다고 한다. ‘여성을 주무르고 소유하는 행위’는 자신이 남성임을 입증하는 중요한 태도라는 의미다. 업무공간인 사무실에서도 여성동료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고, 접근을 시도하는 건 ‘남성적 장난’이나 남성다움의 연장에 놓인다. 우리사회에서 남성은 언제나 여성을 욕망해야 하고, 정복하는 게 남성다운 일이다. 그런 강한 남성성을 입증하지 않으면 여성으로 격하(格下)된다.

최근 이효경 의원이 미투 운동에 참여한 이야기를 보자. 회식자리에서 이효경 의원에게 동료 남성의원이 다가와 바지를 내렸다고 한다. 위협, 불쾌,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짐작컨대 그 행동은 ‘짓궂은 짓’ 정도로 넘어가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만약 회식자리, 남성의원 앞에서 여성의원이 바지를 내렸다면 어땠을까. 눈요깃감이 되고, 사진으로 찍혀 협박의 도구가 되거나, 집단 성폭력피해를 겪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벗는 행위는 동일한데, 남성몸과 여성몸에 대한 이 극렬한 비대칭성을 만든 문화에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 일상의 실천으로서의 성폭력

성폭력은 가해자 절대 다수가 남성, 피해자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점에서 명백히 성별화 된 폭력임을 입증한다. 특히 성폭력 가해자 대부분이 남성이라는 점에서, 성폭력은 ‘남성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성들은 어릴 적부터 평생에 걸쳐 이런 말을 듣는다. ‘밤늦게 다니지 마라, 그렇게 옷 입으면 안 된다, 여자가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성폭력 피해자가 됐을 때, 흔히 듣는 말. ‘도대체 어떻게 처신했길래!’(서지현 검사는 자신 잘못이 아님을 깨닫기 까지 8년이 걸렸다고 했다.) 이쯤 되면 성폭력 피해를 입지 않도록 끝없이 조심하고, 피해자가 됐을 때 자신을 탓하는 것은 ‘여성의 성역할’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이에 반해 남성들은 기껏해야 ‘여성을 보호해야 한다, 강간해서는 안 된다’ 정도의 말을 듣는다. 그런데 남성은 여성을 보호하지도 않지만, 보호도 문제다. 보호는 통제의 다른 말이고, 보호 받아야 한다는 것은 나약하며, 강자의 도덕성에 의존해 자신을 지키는 존재라는 뜻이다. 즉 여성이 남성에 의해 ‘보호’ 받아야 하는 존재로 규정된다면, 도대체 어떻게 평등해질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강간하지 말라는 말은 중요한데, 문제는 무엇이 강간인지 모른다는 점이다.
심지어 남성들은 여성 몸에 접근하는 행위를 ‘남성의 성역할’로 여기는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여성이 남성의 일방적 접근을 거부하는 권리를 행사했을 때, 분노한다.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가 문제를 제기했을 때, 가해 남성은 앙심을 품고 음해하거나 인사 불이익을 주는 일이 흔하다. 물론 성폭력은 직장뿐 아니라, 모든 공간에서 일어나는 보편적 여성의 경험에 속한다. 최근 조명된 사이버 성폭력을 보면, 남성들은 도촬된 여성몸을 공유·매매 함으로써, 불특정 다수의 여성에게 접근하고 정복하는 쾌감을 누린다. 그리고 연애 중에 여성이 헤어지자며 남자의 접근을 거부하면 스토킹, 구타, 살해하기도 한다(신고통계만 3일에 1명씩 데이트 폭력으로 사망). 여성이 자신 몸에 대한 주권을 행사하는 순간, 남성들은 분노하며 보복을 가하는 것이다.

# 남성성에 메스를

페미니스트로 살려고 노력하는 남성들조차 가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조심하지만, 쉽지 않다는 고백을 한다. 나는 그들의 토로를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들도 남성으로 성장했고, 남성성 증명은 일상에서 계속되기 때문이다. 우리사회 보편적 남성성은 권력, 용기, 모험 같은 것으로 구성되는데, 그 안에서 여성은 주요한 요소다. 남성의 권력은 얼마나 많은 여성과 성관계를 하고 소유하는가로 과시되고, 여성 몸을 향한 ‘용기’나 ‘모험’은 말할 것도 없다.

오랫동안 페미니스트들은 말해왔다. 성폭력은 우발적 사건이 아니며 현재의 성별규범과 위계적 권력차가 존재하는 한 일상의 연장 속에 등장하는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사건이라고. 기존처럼 가해자를 재빨리 징계하고 끝내는 방식은 오랜 운동의 노력을 통해 사회적으로 가시화한 성폭력을 다시, 구조의 문제가 아닌 개인 간 문제로 축소시킨다. 몇 년째 격하게 넘실거리는 페미니즘적 열망 그리고 어느 때보다 대중적으로 진행되는 성폭력 피해자들의 ‘스피크 아웃’(현재 미투운동)이 드디어 역사적 변화를 가져올 것만 같다. 비로소 남성성에 메스를 대고 성별 규범을 해체 재구성함으로써, 성폭력으로부터 안전한 사회로 이행하는 변화 말이다.[워커스 4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