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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엄마 아빠 제사를 지낼게’

[워커스] 코르셋 벗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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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명절이 코앞에 다가왔다. 벌써 20년째이니 무뎌질 만도 한데, 여전히 명절은 ‘땡’ 종소리가 울리면 하던 일을 멈추고 가서 앉아야 하는 바늘방석과도 같다. 그렇다고 내가 ‘뼈대 있는 가문의 종갓집 맏며느리’라도 되어 엄청난 양의 노동을 하고, 무지막지한 손님을 치러야 하는 것은 아니다. 3년 전 시댁에서 지내던 제사와 명절을 가져온 다음부터는 명절을 지내지 않는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맏며느리였기 때문이었다.

시아버지는 결혼하기 5년 전에 돌아가셨다. 제사가 설 사흘 전이라 늘 설 전에 시댁에 가서 제사를 지낸 후에 설날 아침 떡국 차례까지 3박4일을 지내고 오곤 했다. 왜 사흘 전에 기제사를 지내고 또 떡국 차례까지 지내는지 나는 납득할 수 없었다. 평소에 거의 가족의 유대를 나누지 않는 시댁 식구들은 이상하게도 비합리적인 제사-명절 시스템에서는 똑같이 침묵으로 그 상태를 바꾸지 않으려 했다. 몇 번 남편에게 제사만 지내고 오자고 제안하다가 입을 닫았다. 결국 며느리인 나는 이 가족의 일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다 아이들이 크고, 시어머니가 점점 나이가 드시고, 전라도에서 강원도까지 제사를 지내러 가는 것보다 하루 우리 집에서 내 손으로 하는 게 여러모로 ‘경제적’이겠다는 판단이 든 다음에 ‘어머니가 원하신다면’ 제사를 모셔와 전라도에서 지내겠다고 했다. 그렇게 될 경우 나는 명절은 지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정작 여태 손수 제사를 지내오셨던 어머니는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셨는데, 시동생들은 얼굴을 찌푸리며 ‘그런 법이 어디에 있느냐’고 항변했다. 제사 노동과 3박4일 동안 밥차리고 설거지하고 청소하는 등의 노동에는 손을 보태지 않으면서 무엇을 지키기 위해 제사를 부여잡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머니가 힘들어 보여서 제가 제사는 지내겠다고 했다. 하지만 명절은 각자 가족이 지내고 싶다. 저 혼자 결정할 일은 아니므로 삼형제가 잘 의논해보시라’고 했다. 명절을 차례와 함께 시댁에서 보내지 않겠다는 것, 제사는 며느리의 일이 아니라 삼형제의 일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하기 위한 발언이었다.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결국 내가 제안한 대로 제사를 전라도에서 맏며느리인 내가 모시고 명절은 각 가족이 도란도란 지낸 게 벌써 3년째다.

본 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출처: 사계]

“나는 여러 코르셋을 입었다가 벗었다”

사실 이 결정은 쉬운 편이었다. 시댁 제사는 ‘기본적으로는 남의 일’이었으므로 행동하고 선포하면 됐다. 오히려 정말 내면의 갈등을 불러일으켰던 건 친정 제사였다. 나는 남녀차별을 ‘거의’ 받지 않은 맏딸로 자랐다. 특히 아버지는 나를 맏아들로 여기신 듯 일 년에 열 번쯤 있는 제사에서 늘 아버지 다음으로 잔을 올리게 하셨다. 그런데 결혼 후 무엇인가 달라졌다. 누가 그러라고 말도 하지 않았는데 ‘출가외인’의 자리에 미끄러져 들어갔다. 아마 며느리로서의 무의식적인 역할을 학습하던 이른바 ‘며느라기’ 시기였던 듯하다. 점점 친정 일(사실 ‘내 가족 일’인데도)에 거리를 두다가 남동생이 결혼한 후에는 완전히 뒷전에 앉았다. 시댁 제사에 대해 고민하던 어느 날, 문득 정작 ‘내 가족 일’에는 어떤 에너지도 쓰고 있지 않음을 알았다.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제사는 남동생이, 아니 올케가 맡을 것이다. 그것이 정당한가? 시아버지 제사를 울며 겨자 먹기로 지내면서, 정작 나의 아버지 어머니 제사를 나 몰라라 해도 되나? 어느 명절에 친정에 가서 부모님과 동생들이 있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 제사는 올케한테 안 맡기고 내가 지내고 싶어요.” 그 이야기를 꺼낸 순간, 잔잔한 호수 표면에 파장 하나가 거칠게 일었다. 부모님도, 동생들도, 올케도, 나도 섣불리 어떤 주장을 강하게 말하지 못했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이야기하자. 아직 엄마 아빠가 너무 젊으시다’는 게 가족 중론이었고, 나도 결론을 내리자는 게 아니라 그런 생각을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었으므로 기꺼이 그러자고 했다.

몇 주가 지난 후, 엄마는 전화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엄마 아빠 제사를 지내겠다고 했잖아. 그 때는 며느리도 있고 신경이 쓰여서 괜히 신경질을 냈는데 자꾸 생각해보니 정말 기분이 좋더라. 우리가 죽은 다음에 너희 삼남매가 너희 집에 모여서 제사 지낸다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어.”

엄마 아빠는 돌아가시면 내가 사는 시골 뒷산에서 수목장으로 치러달라고 이미 유언을 하셨다. 아마 기일이 되면 우리 집에 삼남매가 모여 엄마 아빠를 추억하게 될 것이다.

제사를 둘러싸고 나는 여러 코르셋을 입었다가 벗었다. 모든 코르셋이 그렇듯, 입는 줄도 모르고 입었던 며느리라는 코르셋을 벗으면서 다시 맏딸의 코르셋을 입었다. 제사를 맏딸인 내가 지내겠다고 한 것이 여성차별을 없애는 데, 우리가 남녀 없이 평등하게 사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솔직히 회의적이다. 오히려 이성애 중심의 가부장제를 다른 방식으로 공고히 하는 게 아닌가 의심도 된다. 그러나 ‘내가 엄마 아빠 제사를 지낼게’라고 말했던 순간의 위험하고도 묵직한 떨림은 오래 기억하고 싶다. 내 몸 같았던 코르셋을 벗고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말할 때 떨리던 목소리를, 불안함과 두려움의 징표가 아니라 진앙에서 전달된 힘이 펼쳐진 것으로 기억하고 싶다.[워커스 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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