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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순간에도 노동자만 생각한 그 사람, 윤종광 노동열사"

[현장]폐암 투병 끝에 영면, 윤종광 민주노총 전북본부장 추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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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올해 초까지 힘차게 투쟁하여 촛불이 만든 정말 새로운 세상. 이제는 살맛나는 최저임금 1만원 투쟁에 전진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힘차게 투쟁합니다.” <고 윤종광 민주노총 전북본부장이 지난 5월 남긴 말>

세상과 이별을 앞둔 순간에도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바람과 희망을 먼저 생각한 노동운동가가 끝내 하늘의 별이 됐다. 윤종광 민주노총 전북본부장이 임기를 약 보름 남겨두고 폐암으로 별세했다.

지난 10일 오후 10시 48분, 전북대병원 응급실에서 부인과 1남 2녀의 자녀, 그동안 함께 동고동락을 했던 민주노총 전북본부 임직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향년 57세. 너무 이른 이별이었다.

고 윤종광 민주노총 전북본부장은 지난해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발발하고 시민들의 분노가 촛불로 이어지던 11월에 폐암 진단을 받고 암과의 싸움을 병행했다. 비록 현장에서 직 수행을 하지는 못했지만, 민주노총의 최저임금 1만원 쟁취 투쟁과 전주 시내버스 투쟁, 촛불항쟁에 아낌없는 응원을 보냈다.

[출처: 참소리]

“힘없는 노동자들과 함께한 분”

고인은 지난 1986년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 입사하였고 87년 노동자대투쟁과 6월 항쟁에 참여했다. 그리고 87년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발기인으로 나서며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올해로 30년을 노동운동에 헌신했다. 보수언론을 비롯해 기득권 세력들은 현대차 노동자를 ‘귀족노동자’로 왜곡했지만, 고인은 언제나 힘 없는 노동자들 곁에서 함께 삶을 살았다.

류영하 현대차 전주공장 조합원은 “스스로 지역으로 나와 영세한 노동자들의 노동권 확보를 위해 삭발과 단식을 마다하지 않았다. 말을 실천하는 진짜 노동자였다”고 말했다. 90년대 중반 현대차 전주공장이 설립되고 현장에서 고인은 당시에는 가장 힘이 없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화에 힘을 썼다. 류영화 조합원은 당시 비정규직 신분으로 윤 본부장과 인연을 맺었다.

낮은 곳에서 연대를 실천한 노동운동가 고 윤종광 본부장의 추모식이 12일 저녁 8시 전북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렸다. 연대와 소통, 겸손을 몸으로 실천했다는 것은 이날 추모식을 찾은 이들로 확인할 수 있었다. 약 200여명의 노동자들이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장례식장을 찾았다.

[출처: 참소리]

[출처: 참소리]

“민주노동 열사 윤종광, 잊지 말자”

고인이 병마와 싸우는 동안 민주노총 전북본부장의 역할을 대신 해왔던 지대성 민주노총 전북본부 수석부본부장(권한대행)은 윤 본부장을 ‘민주노동 열사’라고 불렀다. 그리고 “잊지 말아 달라”며 짧게 추도사를 마쳤다. 책임감이 강했던 윤 본부장이 가장 고마워했을 이가 지대성 수석이었다. 지 수석은 추도사 말미에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지 수석의 ‘잊지 말자’는 말을 방용승 더불어이웃 대표가 받았다. 시민사회단체 대표로서 지역 현안에 함께 대응한 방 대표는 “나쁜 권력과 자본 앞에서 분노하면서도 진기승 열사의 죽음과 힘없는 노동자들의 절망을 보며 돌아서서 눈물을 훔치던 모습들이 떠오른다”고 고인을 기억했다.

방 대표는 “투병 중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편안한 마음을 가져야 병마를 물리칠 수 있을텐데, 윤 본부장은 마지막까지 노동자들의 아픔을 먼저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 따뜻한 마음을 기억한다면 윤종광 본부장은 우리의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라면서 고인을 잊지않겠다고 다짐했다.

“노동탄압이 극심했던 시기, 지역 노동운동 이끌어”

고 윤종광 민주노총 전북본부장은 지난 2010년 제8기 민주노총 전북본부 수석부본부장을 맡으면서 대공장이 아닌 지역으로 나왔다. 그리고 제9기 수석부본부장을 역임하고, 2014년부터 현재까지 제10기, 제11기 본부장을 지냈다.

고인이 민주노총 전북본부 임직원으로 지낸 시기는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노동 탄압이 가장 극심했던 시기. 김욱동 민주노총 부본부장은 “정권에 맞서 가장 힘차게 싸우고자 했고 결국 박근혜가 파면 구속되었지만, 정작 자신의 아픈 몸을 이겨내지 못했다”며 마음 아파했다.

김 부본부장은 “지난 2015년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조직할 당시 현장에서는 힘들다는 말이 많았다”면서 “그러나 고인은 회의 자리에서도 ‘열심히 조직해야죠’라는 말을 하고 묵묵히 현장에서 파업을 조직했다. 그리고 총파업이 시작되자 ‘전북에서 지난 87년 이후 가장 많은 노동자들이 모였습니다’고 말하면서 소년 같은 미소를 보이던 모습이 선하다”고 고인을 기억했다.

이어, “자신의 아픈 몸보다 비정규직 차별 철폐와 진기승 열사의 한을 먼저 생각한 사람”이라면서 “반드시 노동 해방을 이뤄내겠다”고 다짐했다.

[출처: 참소리]

지난 2014년 제10기 본부장 재임 시절, 전주 시내버스 신성여객 해고자 진기승씨가 사내에서 스스로 목을 매고 죽음을 선택한 일이 있었다. 노동자의 날을 하루 앞둔 4월 30일. 본인의 해고 무효 심판을 하루 앞두고 벌어진 일이었다. 민주노총 전북본부와 버스노조는 당시 사력을 다해 투쟁하여 약 5개월 만에 사과를 받아냈다.

그 과정에서 고인은 17일의 단식 농성과 삼보일배 투쟁을 벌였다. 남상훈 버스지부장은 “고인의 병이 당시 삼보일배때 거리에서 마신 매연 때문은 아닌지 너무 죄스럽다”면서 “한명자 신성여객 회장이 지난 10월 구속됐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보고는 연락이 온 것이 기억난다”고 말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전북지역 노동현장 투쟁 걱정으로 한 3일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아팠다”면서 “전북지역 노동운동에 큰 공헌을 하신 분”이라고 말했다.

새해부터 민주노총 전북본부장을 맡는 노병섭 당선자는 “지난 8일 선거가 끝나고 찾아뵈니 그 고통 속에서도 민주노조 운동 걱정뿐이었다”면서 “그동안 살아온 세월을 보면 소외된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애정을 가진 따뜻한 가슴을 가진 동지였다. 우리는 당신을 기억하겠다”고 추도했다.

“민주노총이 일어서지 않으면 이 땅의 노동자들은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총파업 조직이 힘들다고 합니다. 아래로부터 힘들고 어렵다는 말들이 나옵니다. 우리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아래로부터 무엇을 할 것인가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노동 해방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전진하기를 바랍니다.” <2015년 4월 총파업을 앞두고 한 집회에서>

[출처: 참소리]

고 윤종광 민주노총 전북본부장은 현재를 ‘노동운동의 위기’로 진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위기의 해법을 낮은 곳에서 찾았다. 노동자들의 농성장을 찾고,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하고 자신보다 낮은 이들에게 존칭을 쓰며 존중했다.

김연탁 민주노총 전북본부 사무처장은 “아래로 향하지 않는 권위는 권력이라는 말을 항상 하면서 최저임금 미만의 비정규직부터 챙겨야 한다고 했다”고 윤 본부장을 기억했다.

“민주노총을 사랑한 노동자”
“늘 동지들 곁에 있던 사람”
“노동운동에 헌신한 동지”
노동운동에 헌신한 삶을 남기고 떠난 고인을 노동자들은 이렇게 기억하며 그를 추모했다.

(기사제휴=참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