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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정말 여성주의인가요?

[워커스] 아무말 큰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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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목격한 몇 가지 일로 혼란스러워졌다.

#1
그리 친하지 않은 지인 A는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여성이다. 그녀는 얼마 전 공중화장실에 적힌 낙서에서 어느 전화번호를 발견했다. 화장실 담벼락의 낙서가 가질법한 악덕에 매우 충실한 낙서다. 번호의 주인은 남성일 것으로 추정됐다. 그녀는 그 전화번호를 저장했고 저장된 전화번호는 번호 주인의 SNS계정으로 이어졌다. A는 그 SNS 계정의 화면을 갈무리해 자신의 SNS에 공개했다. 번호 주인의 SNS를 공개하면서 A는 그를 ‘몰카범’으로 지칭했다. 주변 사람들이 그가 몰카범이 아닐 가능성, 그 번호의 주인이 그의 신상을 파악한 이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피해자가 될 가능성에 대해 지적하자 그녀는 “그에게 해명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몰카 범죄는 나쁘다.

#2
한서희라는 연예인 지망생은 페미니스트를 자처한다. 이런저런 사건들로 유명해졌다. 유명한 사람이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며 여성인권에 대한 게시물을 자신의 SNS에 종종 올리다보니, 그녀에겐 꽤 많은 메시지들이 도착했던 것 같다. 한 씨는 자신의 SNS에 몇몇 트랜스젠더로부터 “트랜스젠더도 여성이니 우리의 인권에 관한 게시물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며 “트랜스젠더는 여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여성’분들만 안고 가겠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트랜스남성(FTM)이 보낸 것도 아니었을 텐데, 왜 여성분들만 안고 가겠다고 굳이 답했을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가끔 SNS는 인생의 낭비다.

#3
지인 B가 지하철 안에서 화장을 하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SNS에 썼다. 지하철에서 화장을 하고 있는 여성에게 다른 여성이 ‘여자의 자존심’을 운운하며 지하철에서 화장을 해선 안 된다고 면박을 주었고 그 면박은 다른 승객들이 ‘남 이사 어디서 화장을 하든 무슨 상관이냐’며 제지하고 나서면서 멈췄다는 일화. 댓글에서 다른 지인 C는 화장을 할 때 나는 냄새가 불편하니 공중의 공간에서 화장을 하는 건 지양하는 게 좋다는 의견을 내놨다. 여성에게 화장을 강요하는 구조적 문제를 우선 해결해야 한다는 전제 위에 있었다. “모두 화장을 하지 않고도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결론이 나려던 찰나, 새로운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한남 아재들이 등산복 입고 막걸리 냄새를 피우는 건 어쩔 거냐”는 요지의. “화장에서 무슨 냄새가 나냐”고 묻는 댓글도 있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역시 SNS는 가끔보다 더 자주 인생의 낭비인 것 같다.

# 그게 정말 여성주의인가요?

여성주의를 ‘따듯한 마음’이나 ‘위로의 말’ 같은 걸로 정의했었다. 물론 학술적으로도, 또 운동적으로도 정확한 정의는 아니겠다. 다만 여성주의 텍스트들을 읽고 주변의 여성주의자들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에게서 억압당하는 여성의 지위를 발견하고, 차별받는 장애인들로부터 배제된 여성의 존재를 인식하는. 그렇기 때문에 시혜나 연민이 아니라 손을 내고 연대함으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 여성주의의 본질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여 여성주의 운동은 모든 폭력과 차별과 배제에 저항하며 소수자에 연대하고 어떤 존재도 지워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는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근래 여러 논쟁들을 보면서 어쩌면 내가 틀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궁과 유방을 달고 태어난 여성만을 챙기는 것이 여성주의라는 주장, 세상의 모든 문제는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 때문이라는 단편적인 시선. 저항을 빙자한 폭력이 또 다른 폭력을 생산해내는 지긋지긋한 악순환.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상태는 어떤 언어도 배우지 않은 상태고 가장 위험한 존재는 단 한권의 책만을 읽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건 내가 도무지 뭘 모르기 때문일까. 정말 그게 여성주의 인가요?

사실 ‘진짜 여성’을 운운하는 건 ‘진짜 남자’를 빙자하는 남근주의의 거울상에 불과하다. 여성주의 운동이 여성으로서의 존재를 확인하고 남성에 의한 억압과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라면 다른 이들의 ‘존재의 확인’과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조롱하고 재단할 수는 없다. 아주 간단한 논리. 누구도 때릴 수는 없다는 주장을 하려면 당신도 누구를 때리면 안 된다. “쟤가 날 때리는 건 싫지만, 내가 널 때리는 건 상관없어. 넌 맞아도 싸니까.” 지하철에서 화장하는 김치녀를 욕하면서 화장을 강요하는 사회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는 한남충과 다를 건 뭔가. 피해는 다른 피해를 양산할 수 있는 면죄부가 아니다.

사실 이번 원고를 쓰기 시작할 때는 조금 화가 나 있어서 “페미니즘을 자처하기 위한 이들은 시험이라도 봐라”같은 뻘소리를 지껄여볼까 생각도 했다. 990점 만점의 페미니즘 시험에서 850점을 넘지 못하면 SNS에 관련 포스팅을 못하게 하는 법조항이라도 만들자는 아무말 큰잔치. 하지만 조건이 붙은 권리는 권리가 아니다. 아주 피곤하고 복잡한 일이지만 인권이란 게 원래 그런 거다. 속시원하자고, 불편하다고 멋대로 괴롭히고 죽이면 안 된다. 운동의 역사는 그 다짐을 공고히 해온 논의의 축적이다. 나도 그래서 시험보자는 얘기 결국 안했잖아.

당신들이 페이스북 안에서 그린 여성주의가 정말 여성주의인지 모니터 밖의 세상을 보라.
덧붙이는 말

위 글은 <워커스>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