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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루냐 전투는 다시 시작됐다

[워커스 인터] 포스트프랑코체제와 신자유주의 긴축에 맞선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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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스페인어 사전 하나를 들고 바르셀로나 항구에 들어선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 그는 쿠데타를 일으킨 프랑코 파시스트들과 내전을 벌이던 인민전선의 편에 자원입대했다. 하지만 그를 맞은 건 정작 카탈루냐어를 쓰는 카탈루냐인들이었다. 당시 오엘은 ‘할 수 있는 가장 값진 일’이란 이유로 무정부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의 전투에 뛰어든 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카탈루냐 찬가>를 기록했다. 그러나 지금 카탈루냐인들은 파시스트에 맞서 지키고자 한 이 스페인에 자치권마저 빼앗겼다.

  경찰폭력에 맞선 10월 3일 카탈루냐 총파업 [출처: Sonia Calvo i Marta Perez]

민낯 드러낸 스페인왕국

10월 1일1) 카탈루냐 자치정부가 독립투표를 강행했다. 그러자 스페인 중앙정부는 민주주의라는 가면을 내던져 버린 듯 고무총을 들었다. 이 살벌한 진압에 약 900명이 부상을 입었다. 투표용지와 집기를 압수하고 인쇄소와 신문사를 단속했으며 독립운동을 지원하던 지역사회센터와 웹사이트는 폐쇄됐다. 게다가 스페인 사법부는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체포했고 카탈루냐 경찰서장까지 명령에 불복했다는 이유로 조사하고 있다. 중앙정부는 이미 카탈루냐 교부금도 동결한 한편, 은행 등 기업들의 자본 이동까지 선동해 수백 개 기업이 철수를 예고하고 있다. 급기야 21일에는 헌법 155조에 따라 자치권을 박탈하고 의회를 해산, 새 지역정부를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스페인 좌파 포데모스와 통합좌파(IU)를 제외한 사민주의의 제1 야당 스페인사회노동자당(PSOE)을 비롯해 대부분의 정당도 집권 우파 국민당(PP)의 편을 들고 있다.

카탈루냐인들은 이 같은 중앙정부의 폭거에 더 큰 저항으로 답하고 있다. 독립투표 이틀 뒤에는 총파업이 벌어져 공공기관과 대통교통 등이 마비됐고 독립에 무관심한 이들을 포함해 민족주의에는 반대하는 무정부주의자나 연방주의를 고수하는 좌파도 연대하고 있다. 프랑코 독재에 맞선 투쟁 뒤로는 볼 수 없던 정치 파업이었다.

그런데 왜 카탈루냐인들은 이토록 독립을 원하는 것일까? 국내외 언론들은 카탈루냐의 언어와
민족적 이질성을 그 원인으로 꼽기도 하고 때론 지역이기주의의 발로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카탈루냐 언어가 공용어로 인정되고 자체적인 교육권을 보장받는 등 문화적 차이를 둘러싼 갈등은 보기 드물다. 또 지역이기주의의 발로라고 하지만 사실 카탈루냐 1인당 연간 GDP는 27,000유로로 마드리드의 31,000유로 보다 낮다. 카탈루냐에서 중앙정부로 들어가는 돈이 안달루시아 등 카탈루냐 보다 가난한 지역에 쏠리지도 않는다. 중앙정부가 긴축 노선 속에서 지역정부로의 교부금을 아예 줄여왔기 때문이다. 오히려 독립을 지지하는 카탈루냐인들은 스페인왕국의 일부로 남는 것은 각종 스캔들이 터져 나온 왕가를 비롯해 부패한 기득권층에 무릎 꿇는 굴욕적 삶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에겐 바로 독립이 민주화인 것이다.2) 결국 문제의 본질은 카탈루냐에 대한 지금 스페인 중앙정부의 태도와 같은 억압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억압은 포스트프랑코체제 속에서 최근 세계경제위기로 더욱 가혹해진 신자유주의 긴축정책으로 집행되며 독립운동에 불을 지폈다.3)

  바르셀로나 찬독립진영 깃발 [출처: Philipp Reichmuth]

포스트프랑코체제와 신자유주의 긴축

역사적으로도 카탈루냐4)와 중앙 카스티야와의 갈등은 사회적이었으며 민족적 원인은 적었다. 대표적 사례는 1640년의 카탈루냐 농민의 봉기이다. 이 반란은 30년 전쟁 속에서 카스티야 군인의 병참을 카탈루냐 농민들이 거부하면서 벌어졌다. ‘고향 만세 – 사악한 정부에게는 죽음을’이라는 구호 아래 당시 사실상 모든 카탈루냐 농민들이 반란했다. 또 다른 반란은 1713년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에서 승리한 부르봉왕가가 반발하는 카탈루냐공국민을 진압하면서 벌어졌다. 그 뒤 약 100년 동안 카탈루냐의 자결권은 박탈됐고 언어도 사용하지 못했다. 카탈루냐에서 독립운동이 재개된 건 20세기 초반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받으면서다. 이때 공산주의 조직과 함께 처음으로 민족주의의 ‘카탈루냐 국가’라는 단체가 생겨났다. 이 단체를 주도한 프란세스 마시아 대령은 당시 소련의 영향으로 급진적인 혁명을 원했다. 그러나 정작 1931년 4월 그가 지방선거에서 승리해 수장이 된 뒤에는 스페인공화국 내 하나의 자치주로 자리 잡는 데 만족하고 만다.5)

그러나 1936년 프랑코 장군이 좌파 인민전선 정부에 반대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카탈루냐와 스페인의 갈등이 재개됐다. 내전에서 승리한 프랑코는 거칠게 반발해왔던 카탈루냐의 문화적 고유성을 말살하려고 모든 것을 동원했다. 결국 1975년 프랑코의 사망 후 스페인 중앙정부가 1979년 카탈루냐에 자치권을 부여했지만 한계는 남았다. 이번처럼 마드리드는 자치권을 언제나 무효화할 수 있었으며, 재정과 조세는 중앙국가에 예속됐다.

이 같은 문제의 원인은 근본적으로 프랑코 시대에 대한 역사적 청산의 부재에서 비롯된다는 시각이 크다. 1975년 프랑코의 사망 후 스페인에서의 민주주의로의 이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체제’ 인사들이 주도했다. 3만 명에 달하는 공산주의, 좌파 등 반체제 인사에 대한 살인, 고문, 테러 등 역사적 문제는 소위 ‘망각협정’으로 사면됐고 프랑코 체제를 떠받쳐온 ‘파밀리아들’(군대, 교회, 관료 등 프랑코 체제를 지탱해 온 집단들을 일컫는 말)은 건재했다.6) 프랑코 체제에서 정치적으로 성장한 아돌포 수아레스 첫 번째 민선총리를 시작으로 우파 PP과 사민주의 PSOE가 40년 간 번갈아 집권하면서 현재의 기득권층을 떠받치는 양당체제가 곤고화됐다.

그러나 2010년대 초 세계경제위기의 여파로 부동산 거품 붕괴, 일자리 축소 등 스페인 경제위기가 시작되고 긴축조치가 심화되면서 기득권층의 모순이 수면 위로 부상한다. 마드리드 중앙광장에서는 ‘인디그나도스’(분노한 사람들)의 15M 운동이 일어나고 잇따라 포데모스와 통합좌파(IU), 한편에선 중도의 시민당이 부상하며 양당체제에 도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같은 주류정치체제에 대한 도전은 카탈루냐에선 독립운동의 부상으로 이어졌다.


카탈루냐 내에서의 동학

애초 카탈루냐에선 1980년대 자치법이 도입된 뒤 독립에는 소수만이 관심을 가졌다. 1980년대부터 거의 지속적으로 집권한 카탈루냐 민족주의의 CiU(자유주의 CDC와 기독민주주의 Unió의 선거연합)는 정치 전략으로 문화적 고유성을 강조하기는 했다. CiU는 동시에 중앙정치에선 PP 또는 PSOE를 필요에 따라 지지하며 기득권을 누렸다.

그러나 이 상태는 2003년 PSOE의 카탈루냐 지부 PSC를 필두로 중도좌파정당들이 연합해 우파가 장악했던 지방정부를 수권하면서 바뀐다. 당시 스페인 중앙정부도 PSOE가 집권하면서 카탈루냐인들은 자치권 확대를 위한 시간이 도래했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카탈루냐 자치정부는 2006년 새 자치법을 발표했고 이는 스페인 중앙정부와 카탈루냐 국민투표에서도 통과됐지만 당시 야당이던 PP가 헌법재판소에 기소하면서 봉쇄되고 만다. 카탈루냐를 한 ‘Nation(국민 또는 민족)’으로 보는 정의가 문제가 됐는데 헌법재판소는 2010년 결국 위헌 판결과 함께 수정본을 냈고 스페인 국왕은 카탈루냐에 대해 ‘헌법과 자치법을 위반한다’고 비난하면서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첫 번째 대중적 독립운동이 촉발된다. 당시 카탈루냐에서는 750만 인구 중 200만 명이 거리에 나와 시위를 했다. 이어 치러진 총선에선 경제위기에 대한 책임으로 패배한 PSOE에 이어 2011년 말 PP의 라호이 총리가 집권했는데 그는 삭감정책을 밀어붙이며 카탈루냐에 세금 분담 협상을 일방적으로 결렬시키고 교부금을 줄이며 공분을 키웠다. 결국 2012년 9월 11일 100만 이상의 2번째 대중집회가 열려 자치정부에 독립과정을 촉구한다. 당시 아르투르 마스 자치정부 수반은 조기 총선을 예고했는데 이 결과 지역에서 처음으로 친독립 다수의 의회가 구성된다. 이후 진행된 2014년 11월 국민투표7)에서 81%가 독립에 찬성하면서 마스 수반은 2015년 9월 새 총선을 실시하고 이 결과 친독립파 정부가 처음으로 수립되며 지난 10월 1일 분리독립투표에까지 이르게 된다.

한편, 독립운동의 대중화에는 바로셀로나에서의 경험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바르셀로나에서는 2011년 경제위기로 촉발된 부동산 위기 속에서 전투적인 강제퇴거 반대운동이 조직됐고 이 운동에 힘입어 2015년 지방선거에서 강제퇴거반대플랫폼(PAH)의 전 대변인 아다 콜라우가 바르셀로나 시장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중앙정부가 이의 개혁 정책에 제동을 걸며 스페인 국가와의 결별로만이 사회 변화가 가능하다는 견해가 많아졌다. 대표적으로는 2015년 강제퇴거반대법이 카탈루냐 자치의회를 통과했지만 중앙정부 문턱을 넘지 못했다.

다시 시작된 전투

그러나 정작 아다 콜라우 바르셀로나 시장이 속한 좌파연합 ‘코뮌속바로셀로나’(Barcelona en Comú) 등 전국 좌파정당은 카탈루냐 분리독립이 아닌 스페인 정치체제를 입헌군주제에서 연방공화국으로 전환하는 헌법 개정을 지지한다. 또 독립투표 권리를 지지하면서도 일방적인 독립선언에는 반대한다. 카탈루냐 문제에 대한 민족주의적 접근이 수십 년 동안 스페인 좌파를 분열시키고 사회적 갈등의 해결에 혼선을 빚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카탈루냐 투쟁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분명한 것은 이제 카탈루냐가 독립을 선언하든 그렇지 않든 중앙정부와의 싸움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또한 독립운동 진영의 물적 토대는 우파정부의 긴축과 탄압 속에서 급진화된 것이므로 이 물적 조건에 부합하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카탈루냐는 결국 민족주의적으로 고립되기보다 스페인뿐 아니라 유럽 노동자민중의 계급적 연대 전략이 필요하다. 스페인 중앙정부의 탄압은 ‘모든 민족주의’를 반동으로 보는 많은 무정부주의자들을 포함해 연방주의 좌파와 독립주의자들을 단결하게 하여 공동투쟁의 조건도 만들어지고 있다. 급진화하는 카탈루냐 독립운동과 발렌시아 등에서의 동요나 사회적 반발을 보면 라호이 정부에 대한 타격도 크다. 이점에서 카탈루냐의 독립투표가 유린당했다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스페인 민주주의를 다시 프랑코시절로 후퇴시킨 스페인중앙 정부가 정치적 실패의 역풍을 맞을 공산이 크다. 1939년 패배한 카탈루냐에서의 전투가 다시 시작됐다.[워커스 36호]


[각주]
1) 경찰 탄압에도 유권자 43%가 참여해 90% 이상이 카탈루냐가 독립 공화국이 돼야 한다고 선택했다.
2) 세르지 페레로 카탈루냐노총 Intersindical- CSC 사무부총장 인터뷰, <융에벨트>, 2017.10.9
3) 라울 첼릭(Raul Zelik), 스페인의 국가위기 - 카탈루냐는 독립할 것인가?, <입장>, 로자룩셈부르크재단, 2016.4
4) 현재의 스페인 지역은 711년부터 1492년까지 이슬람 지배 아래 있었으나 레콩키스타(711~1492년까지 780년 동안 에스파냐의 그리스도교도가 이슬람교도에 대하여 벌인 실지(失地) 회복운동, <두산백과>)가 벌어지며 카스티야와 함께 카탈루냐, 바스크 등의 지역이 연합해 오늘날의 스페인을 만들었다.
5) 안드레 쉐르(André Scheer), 마드리드의 적, <융에벨트>, 2017.10.23
6) 김원중, <청산없는 청산 : 프랑코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7) 스페인헌법재판소의 위헌판결로 법적효력이 없는 선거로 진행됐다. 참가율은 42%에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