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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약하다는 신념의 소유자, 박종필

차별에 저항한 영상활동가 다큐인 박종필 감독을 추모하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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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박종필 감독을 떠나보낸 지 벌써 스무 날이 지났습니다. 장애인, 노숙인, 세월호 가족 등 사회적 약자와 함께 해온 박종필 감독의 부음이 알려진 뒤 많은 이들이 젊은 나이에 떠나간 그의 죽음을 애통해 했습니다. 그런 박종필 감독을 기리며 <다큐인> 동료 활동가들의 글을 전합니다. <다큐인>은 박종필 감독이 1998년 만든 뒤 자신처럼 여기며 활동해온 독립다큐멘터리제작집단입니다. 다큐인 동료 활동가들이 마음으로 전하는 박종필 감독의 이야기에 많은 관심 바랍니다.

[출처: 박종필 감독 추모페이지]

[출처: 김한주 기자]

장례식장, 남아있는 이들이 떠난 이에 대한 그리움을 나누는 시간. 많은 이들이 말했다. “박종필 감독님 그런 면이 있었어?”, “종필 형이 정말?” 미처 몰랐던 일상의 면면들을 발견하고 놀라거나 애틋해하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독립다큐멘터리를 하는 동료 감독들, 홈리스 운동에 참여하는 애틋한 ‘형들’, 장애인권운동을 하는 열정적 활동가들, 세월호 관련한 소중한 인연들 그리고 여타의 동지들과 그가 맺었던 관계는 조금씩 다른 색감일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박종필 감독은 활동의 폭도 넓고 색감도 진했던 사람이니, 해야 하는 이야기가 너무 많다. 영상활동가로서 카메라에 담는 인물과의 관계에서 마음을 쏟아내던 태도부터, 주류미디어에서 늘 대상화 시키던 장애인을 담는 카메라 시선을 획기적으로 전환시킨 여러 탁월한 지점(운동적 의미뿐 아니라 미학적 부분까지) 등 하고 싶은 말도 무척 많다. 전자 부분은 앞으로도 많이 이야기 될 것 같고, 후자 부분은 사회적으로 더 많은 평가가 진행되어야 할 부분인데, 차차 깊이 있게 정리되어야 할 부분이라 다음 기회로 넘긴다.

여기서는 박종필이라는 사람에 대해 다소 협소하게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특히 개인적으로 참세상이 발행하는 <워커스>의 ‘진보생활백서’, ‘반다의 질문’ 꼭지를 통해 약간의 글을 쓰기도 했으니, 그 연장에서 페미니스트로서 바라본 박종필 감독에 대한 기억을 중심으로 떠올려 볼까한다.

[출처: 반다]

# 숙연한 표정, “수정할께요”

박종필 감독과 알고지낸 지는 십여 년 정도고, <다큐인>에서 함께 상근한건 5년 정도에 불과했다. 그중 2년 정도는 상근하는 멤버가 둘 뿐이었는데, 둘 다 그닥 말이 많은 편도 살가운 성격도 아니어서, 어떤 날은 거의 말을 않고 각자 일만 한 날도 있었다. 하지만 함께 활동하며 의외로(!) 신뢰가 쌓여갔고, 술을 좋아했으니 무수히 밤 세워 마신 술 때문에라도 관계가 쌓여간 것 같다.

잠시 내 얘기를 하자면, <다큐인>에 들어갔을 당시 나는 여성단체에서 상근을 마친 직후였고, 좀 더 넓은 시선을 고민하며 운동 영역을 확장하던 때였다. 그리고 조직에서 상근하며 성명서를 쓰거나 성폭력상담 등을 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식으로 운동하는 걸 고민했을 때였다. <다큐인>에 들어가고 보니, 오랜만에 페미니스트가 아닌 동료들과 일하는 게 낯설기도 하고 이런저런 언행들이 불편하기도 했다. 하지만 매번 말하는 것도 쉽지 않아서, 고민 끝에 페미니즘 세미나를 제안했다.

박종필 감독 입장에서는 좀 뜬금없었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흔쾌히 “공부해야죠” 라고 답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는 지금처럼 페미니즘 열풍이 불던 때가 아니고, 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페미니즘 논쟁은 운동사회에서도 꽤 사그라든 시기였다. 마침 여성학자 정희진 씨의 <페미니즘의 도전> 초판이 나왔을 때였고, 우리는 그 책으로 몇 주에 걸쳐 세미나를 했다. 이후 박종필 감독은 영상 나레이션을 쓸 때는 물론 일상에서 단어 하나도 조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번은 전날 술자리 때문에 겨우 출근해서 숙취 속에서 일하고 있는데, 박종필 감독이 매우 진지하고 숙연한 표정으로 이런 말을 했다. “어제 술 마시다가 ‘투쟁에 참여한 여교사’들이라는 말을 내가 했잖아요. 그런데 여교사는 좋은 표현이 아니라고 예전에 지적해 준 게, 오늘 아침에야 생각났어요. 수정할께요.” 사실 워낙 많은 사람이 있던 술자리라 나는 기억도 잘 나지 않고, 당연히 바람직하진 않지만, 저렇게 까지 숙연하게 말해야 할 사안인가 싶어서, 약간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후에도 그는 아무리 사소한 것도 자신이 부적절한 말을 했다고 판단되면, 숙연할 정도로 진지하게 말하곤 했다.

  필자(중앙)와 동료들 [출처] 비마이너

# “이런 때, 열심히 해야하는거죠?”

또 하나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그 이후 <다큐인>에서, 시민방송 RTV 시사다큐 프로그램 <나는 장애인이다>(링크)를 제작했던 때다(당시 시민방송 RTV는 영상·언론운동을 하는 다큐인, 참세상, 미디액트 등의 단체가 결합해서 일부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었다). 2007년 정도였는데, 당시 시민사회는 ‘시민의 신문 대표 이00 성폭력 사건’에 대한 대응행동이 진행되고 있었고, 성폭력 가해자 이00은 시민의 신문 대표 외에도 여러 시민사회단체에서 중직을 맡고 있는 인물이었다(링크).

당시 나는 시민의 신문에서 활동하던 친구로부터, 이00 대응행동을 하는 이들이 지쳐가고 있고, 여러모로 어려운 조건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우연히, 이00가 시민방송 RTV 부이사장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일단 성명서를 쓰고, 영상 제작단체들을 조직하고, 파면운동을 해야겠다고 ‘혼자’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영상활동가들의 정서가 낯설기도 했고, 빈번하게 밤을 세우며 편집을 하면서도 늘 시간에 쫓기고, 특히 다큐멘터리 특성상 촬영 현장이 생기면 너무 피곤한 상태라 ‘곧 죽을 것 같아도’ 기어이 촬영을 나가게 되는 현실을 살다보니 걱정 됐다. 성폭력 가해자 이00의 직함이 RTV 부이사장이라지만, 실제는 RTV와 관련성이 크게 높지 않을 수도 있는데, 제작 단체들에게 일종의 파업을 염두에 두고 파면 운동을 하자는 게 조심스러웠다. 영상 제작 일정만으로도 빠듯하게 겨우 사는데, 고된 일이 추가된다고 여겨질까 염려가 됐다.

나는 내심 고민이 되면서도, 박종필 감독에게 당연하다는 투로 “이00 파면 운동 함께 해야죠?” 라고 말했고, 박종필 감독도 “이런 때, 열심히 해야 하는 거죠?” 라고 답했다. 나는 바로 성명서를 썼고, 박종필 감독은 다른 제작단체에 연대하자며 연락을 돌렸다. 내게는 그런 모습이 무척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어쩌면 지금 시점에서는 많은 이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좀 달랐다. 많은 조직의 중견 남성활동가들은 성폭력 사안에 연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는 높이면서도, 실제로는 ‘우리가 너무 바쁘니까 나중에’ 라는 식의 태도를 보이는 일이 흔했다.

짐작컨대, 당시 박종필 감독도 제작 때문에 내심 고민됐을 지도 모른다. 당시 나는, <나는 장애인이다> 공동연출자여서 격주로 한편씩 연출과 편집 작업을 했는데, 아직 영상을 한지 얼마 안됐던 때라 매번 마감을 겨우 맞췄고, 손도 뭉뚝한 편이라 마무리는 꼭 박종필 감독이 한 번씩 손을 더 대야 했다. 게다가 박종필 감독은 홈리스를 주제로 한 다큐 <거리에서>를 한창 작업하고 있을 때라 밤 세우는 날이 허다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들 주말도 쉬지 못하는 날이 더 많았으니, 이00 파면 운동을 함께 하면 더 바빠지는 건 물론 제작에 집중하기 어렵다는 걸 박종필 감독이 가늠 못했을 리 없다. 하지만 아마 박종필 감독은 그 위험을 명확히 생각하면서도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선택은 무엇이죠?’ 라고 자주 나에게 물었 듯, 스스로에게 거듭 물었을 것 같고, 그 결론에 맞춰 함께 행동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이처럼 내가 기억하는 박종필 감독은 페미니즘 이슈에 관해서 자신이 부족하다며 배우려고 했고, 아는 만큼 실천해 보려고 했다. 물론 그건 나보다 먼저 <다큐인>에 있었고, 내게 함께 활동하자고 제안했으나, 사실상은 잠시만 활동하고 떠났던 페미니스트 동료의 앞선 노력이 누적된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박종필 감독은 내가 문제제기 하거나, 스스로 ‘실수’라고 여기는 부분에 대해, 변명하거나 합리화 하려는 모습을 거의 본적이 없다. (아마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동료가 얼마나 희귀한지 알 것이다!)

[출처: 반다]

# 영상활동가로서 첫 번째 모란공원

내가 아는 박종필 감독은 페미니즘을 포함해서 인권 감수성이 높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 올바름’에 깨어있어야 한다는 긴장감이 무척 높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장애인운동/홈리스운동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처럼 ‘사람’되지 못했을 거라는 말을 하곤 했는데, 장애인/홈리스운동을 영상으로 연대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많은 권력을 가지고 살아 왔는지 알게 됐다고 했다.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얼마나 쉽게 삶을 살 수 있는지 알고 있고, 자신의 기질을 알기 때문에 작은 것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생각해보니, 그는 자신은 나약하고 부족하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나는 활동가에게 가장 필요한 품성 중 하나는 자신은 흔들리고 모자란 존재임을 자각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박종필 감독이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옳다고 믿는 것 앞에서, 조금의 타협으로라도 흔들릴까봐 더 고집스럽게 굴었고,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긴장감을 팽팽하게 유지하며, 빠르게 잘못을 인정하려고 노력했던 게 아닐까 싶다. 나는 그가 영상을 비롯해서 어떤 역량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자신이 나약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걸 신뢰했다.

내가 알기로는 영상활동가로서 모란공원 열사묘역에 안치된 건 박종필 감독이 처음인 것 같다.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해 영상으로 연대한 그의 열정을 기리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겠지만, 운동에 대한 그의 태도가 많은 동료들에게 깊은 신뢰감을 주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마음이 모아진 게 아닐까 싶다.

나는 박종필 감독이 모란공원 열사묘역에 안치된 걸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론 ‘내가 이곳에 있는게 올바른 걸까요?’ 라고 물을 것만 같다. ‘더 훌륭한 분들이 가실 자리도 모자라지 않겠나’라며, 열사들 옆에서 자신이 누가 되지 않을까 고심하고 있을 것만 같다. 삼우제를 마치던 날, 평소 고민하던 그의 표정을 마음에 담고, <다큐인> 멤버들과 모란공원 열사묘역을 잠시 걸었다. 나는 생전에 조금 알았거나 잠시나마 함께 활동 한적 있던 분들 묘소에 가서, 오랜만에 인사도 나누고, 하늘에 막 도착한 박종필 감독을 잘 보살펴 달라는 말도 전했다.

‘나약함에 대한 신념’은 우리가 유산으로 받아 전하겠으니,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긴장감은 남은 자들에게 넘기고 다만 평온히 쉴 수 있기를. 애달픈 마음 모아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