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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제3의 길은 없다

[워커스] 제레미 코빈의 선전...“소수가 아닌 다수를 위해, 중도 아닌 좌파가 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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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2일, 영국 총선을 코앞에 두고 맨체스터 한복판이 피바다가 됐다. 미국 팝가수 공연이 끝난 직후, 공연장 바로 바깥에서 폭탄이 터져 22명의 생명이 무참히 희생됐다. 곧이어 런던 도심의 교각 위와 상가에서도 차량 돌진과 흉기 테러가 발생해 7명이 숨졌다. 올해만 3번째 테러였다.

영국 총선 선거운동은 한순간 쑥대밭이 됐다. 보수당 출신의 테레사 메이 영국 총리는 선거운동을 일시 중단하겠다고 선언하면서도 극단주의자에 대한 정책을 강화하겠다며 선거를 앞두고 터진 참사에도 자신감을 나타냈다. “정부 위원회를 만들어 극단주의자 수색과 검거에 박차를 가하겠다. 인터넷기업은 극단주의자 검거를 위해 더욱 협조해야 한다.” 메이는 인권 대신 통제와 무장을 강화해 안보를 지키겠다는 우파의 오래된 십팔번을 다시 꺼내 불렀다.

하지만 제레미 코빈 노동당 대표는 이 우파적 수사를 계급 이슈로 치환하고 논란의 구도를 정반대로 바꾸며 우파에 결정타를 날렸다. 코빈은 수년 동안 보수당 정부의 긴축 정책으로 모두 19,000명의 경찰 인력이 축소됐다는 점에 주목했다. 특히 2010년 내무장관이었던 메이 총리에 직접적인 책임을 묻고 이를 되돌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코빈의 목소리를 지지하는 메시지들이 잇따랐다. 경찰 감사로 일한 피터 커크햄은 영국 언론 <스카이뉴스>에서 메이 총리를 ‘거짓말쟁이’라고 몰아붙이며 대테러의 주요 조치들이 경찰 인력 축소로 후퇴됐다고 비난했다.

이어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는 메이 총리의 정책이 일반 경찰을 준 군사화한 한편 심지어 군대가 거리를 장악했다고 비판하는 익명의 경찰 관계자 인터뷰를 내보냈다. 게다가 재빠르게 5개의 다양한 보건과 구조 부문 노조 대표자들이 가세해 총리를 곤궁에 빠트렸다. 이들은 보수당의 긴축정책이 소방, 구조, 보건 등의 분야를 어떻게 후퇴시켰는지 낱낱이 증언했다. 급기야 해외 전장인 시리아에서도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이슬람국가(IS)와 싸우는 쿠르드족 민병대 인민수비대(YPG)에 자원입대한 한 영국 활동가는 <인디펜던트>에 “제레미 코빈만이 어떻게 IS를 멈출 수 있는지 알고 있다. (...) 테레사 메이가 총리직에 오래 머무를수록, 시리아와 영국 본토에서의 안전은 더욱 후퇴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출처: 레드페퍼]

노동자계급 이슈로 선전

이 사례는 제레미 코빈이 우파에 유리한 ‘테러’라는 이슈를 어떻게 긴축과 복지, 일자리와 연계하여 계급적 이슈로 만들었는지 잘 보여준다. 애초 영국 우파와 극우는 경제위기와 늘어난 사회적 반발을 ‘브렉시트’로 자국 중심의 자유주의 강화, 국수주의와 인종주의를 부추기며 돌파하려 했다. 실제 지난 2~3년 간 이 우파적 전술은 영국 사회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코빈은 이를 계급적 이슈로 돌려놓았다.

‘소수가 아닌 다수를 위해’라는 구호와 함께 낸 총선 공약도 노동자계급을 직접 겨냥한다. 우선 대처 시절부터 민영화됐던 철도와 상수도, 에너지 등

주요 기반시설을 재공영화하거나 공영화하겠다고 공약했다. 또 노동유연화를 강제한 대표적인 제로 시간 계약제를 폐지하는 한편 반노조 악법을 폐기하여 노동권과 노조할 권리를 보장하겠다고도 약속했다. 국가보건서비스(NHS)와 교육 및 복지 예산 증대나 등록금 폐지와 같은 공약도 빼놓을 수 없다. 부유세나 고소득자에 대한 과세 인상 등 영국 부유층에 대한 개혁 조치도 포함됐다. 그러나 자본과 금융에 대해선 기업 법인세 인상이나 금융거래세 대상 확대 등에 그쳤다. 코빈이 노동당을 좌파적으로 견인한다고 해도 정당 본래의 사민주의의 좌파적 개혁 조치 이상으로는 나아가지 못했다.

어쨌든 이 같은 코빈의 공약은 영국 대중으로부터 호응을 이끌어냈는데 사회적 약자인 세대, 성, 인종, 계급 모두에서 다수를 획득한 것으로 나타난다. 보수당으로 기울 것으로 예측됐던 영국독립당 지지자들도 노동당에 몰표를 줬다.

결국 이번 총선에서 노동당은 1945년 이후 가장 큰 성과를 기록해 30석을 늘렸다. ‘강한’ 브렉시트를 위해 조기 총선을 실시했던 메이 정부는 오히려 과반의석을 상실하며 무거운 정치적 책임을 지게 됐다. 또 여권이 다수를 점하지 못한 ‘헝의회’가 되면서 영국 정치권은 총선을 다시 치러야 할 지경이라는 전망까지 내놓고 있다. 코빈이 선전한 현재의 여건을 고려하면 재선 시 그가 승리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코빈 측에서도 또 다른 총선을 공세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코빈과 가까운 존 맥도넬 노동당 그림자 내무장관은 14일 영국노총(TUC)의 7월 1일 시위를 지지하며 메이 정부를 뒤엎고 새 총선을 실시하도록 촉구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러한 코빈의 선거운동에 영국 좌파저술가 리차드 세이무어는 <먼슬리리뷰> 최근호에 “코빈은 (애초 블레어가 사용한) 신노동당의 슬로건 ‘소수가 아닌 다수’를 정열적으로 채택했고 여기에 훨씬 더 급진적인 억양을 부여했다. (...) 노동당은 부끄럽지 않은 계급 중심의 캠페인을 진행했다”고 평했다.


제3의 길 본토에서의 대중적 거부

그런데 이 같은 선거 결과는 보수당에 대한 코빈의 선전일 뿐 아니라 ‘제3의 길’로 유명한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 우파에 대한 승리라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애초 블레어는 신자유주의 우세에 저항하는 대신 자유방임주의의 자본주의에 투항하며,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라는 보다 부드러운 가면을 택했다. 노동자들을 위한 정당이라는, 노동당 강령 제4 조항을 삭제하고 국유화 같은 사회주의 정책도 내팽개쳤다. 이런 블레어는 1994년 노동당수에 취임한 뒤 1997년 총선에서 대승을 거두고 18년간의 보수당 집권을 끝내며 영국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인 신화를 주조해갔다. 1990년대 동구의 몰락 속에서 제3의 길은 반향을 얻으며 독일 슈뢰더 사민당 정권, 프랑스 리오넬 조스팽 동거정부의 우경화에도 일조했다. 한국에서도 김대중 정권의 ‘생산적 복지’의 주요한 배경이 됐다.

블레어는 이후 총선에서도 3차례 연속 승리했지만 영국 대중의 생활 여건은 후퇴하기만 했다. 진보라는 이름으로 공공영역의 민영화를 강제했고 기업 감세에 적극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노동당은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잉글랜드에선 보수당을 넘보지 못했고 노동당 강세였던 스코틀랜드는 스코틀랜드독립당에 밀리기 시작했으며 기성정당에 대한 거부는 주로 극우 영국독립당이 대표했다. 급기야 2003년에 영국 역사상 가장 큰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결국 노동당은 집권 8년 동안 113석을 잃어 블레어 집권 전 시절로 쪼그라들었다.

노동당 정치인들은 지난 20년 간 쇠락하는 지지율 속에서 새로운 블레어를 찾아왔다. 그 동안 고든 브라운과 애드 밀리밴드 그리고 오웬 스미스까지 모두 블레어주의자들의 공허함을 달래려고 노력했지만 그들 모두 중도 속에서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급기야 영국사회에서는 2008년 세계 금융 위기의 여파로 보수당 정부의 긴축 정책이 더욱 가혹해지면서 빈곤과 불평등이 심화하는 한편, 확산하는 테러 속에서 기존 사회에 대한 염증은 깊어져 갔다. 이런 상황에서 2015년 노동당 대표 선거에 출마한 당내 좌파 제레미 코빈은 많은 이들의 예상을 뒤집고 승리했다. 또 그 동안 영국 국내외 주류 언론뿐 아니라 당내 우파의 쿠데타 시도까지 물리치고 이번 총선까지 유의미한 기록을 올리며 입지를 굳혔다. <파이낸셜타임즈> 마저 “코빈이 전례 없는 사회주의의 부흥을 일궈냈다”고 기록했다.

결국 제3의 길이 시작된 본토인 영국 유권자 다수는 노동당 좌파의 손을 들어주면서 신자유주의의 또 다른 얼굴인 블레어주의에 등을 돌렸다. 반면 국내에서는 김대중 전 정부와 노선을 같이 하는 문재인 정부가 ‘사회투자국가’ 등 블레어식 개혁주의를 노골화하며 본토에서마저 외면당한 사회적 타협주의를 다시 꺼내들고 있다.

“코빈의 승리는 다른 사회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줄 것”

코빈이 새로운 정치적 현상을 이끌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우선 블레어 집권 뒤 노동당을 떠났던 노동조합을 다시 결집시키고 있다. 그동안 영국 대다수 노조는 노동당을 조직적으로 지원하면서도 1997년에서 2010년 블레어주의의 신노동당 시절의 우경화를 막지 못했고, 많은 좌파적 노동조합들은 이런 노동당을 등졌다. 남은 노조들은 2010년 노동당 내 좌파 에드 밀리밴드가 선출되도록 지지하기도 했지만 변한 것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선 노동당과 제휴한 14개 노조뿐 아니라 영국 철도교통노조(RMT) 등 급진좌파 성향의 노조도 조직적으로 코빈을 지지했다.

좌파조직의 지지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전투적인 영국 노조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 밥 크로우가 2010년 공동설립한 좌파 동맹 노동조합과사회주의연맹(TUSC)도 지난 5월 성명을 내고 “사회주의 정책을 목표로 하는 코빈 주도의 노동당을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이들은 2015년 코빈이 노동당 대표로 선출된 후부터 보수당과 블레어주의자에 맞선 그의 투쟁을 지지해왔다.

코빈을 지지하는 노동당 풀뿌리 당원 모임 모멘텀(Momentum)의 실천도 주목된다. 2015년 코빈의 당대표 선출 뒤 만들어진 이 조직은 지난 지방선거에 이어 이번 총선에서도 지역과 SNS 등에서 영향력 있는 정치운동을 펼쳤다.

이번 선거에서 제레미 코빈은 계급적 이슈를 전면에 내걸고 선전하면서 노동당을 포함한 영국 정치에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냈다. 영국 국내에서뿐 아니라 미국 트럼프 집권과 브렉시트 국민투표를 고비로 최고점에 달한 세계적 우경화 흐름에도 변곡점을 남겼다. 그러나 보수당 뿐 아니라 당대 블레어주의자들을 비롯해 쇠락하는 영국 경제나 브 렉시트 협상, 테러 등 코빈에 대한 도전은 계속될 것이다. 과연 그가 주도하는 좌파 세력이 어떻게 노동자의 계급적 대안을 추동해나갈지 주목되는 시점이다.[워커스 3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