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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의 혁명

[러시아혁명 100주년] 자코뱅 온라인시리즈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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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의 잊혀진 혁명이 1917년 러시아혁명보다 오늘날 우리에게 더 큰 교훈이 될 수 있다.


  1905년 총파업 당시 핀란드 헬싱키에 모여든 군중들 [출처] 핀란드 국가유물위원회]

지난 세기 1917년 혁명의 역사는 대개 페트로그라드와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에게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러시아제국은 압도적으로 비러시아인들로 구성돼 있었고 제국 주변부에서의 격동은 중심에서 만큼이나 폭발적이었다.

1917년 2월 차르 체제의 전복으로 촉발된 혁명의 파고는 그 즉시 러시아 전역을 집어삼켰다. 이 반란들 중 가장 특별한 사례는 아마 한 학자가 “20세기 유럽에서 가장 명백한 계급전쟁”이라고 부른 핀란드혁명일 것이다.

핀란드의 특별함

핀란드는 차르 지배하의 다른 그 어떤 나라와도 달랐다. 스웨덴의 지배를 받던 핀란드는 1809년 러시아에 합병된 후 자치와 정치적 자유가 용인됐다.[1] 심지어 민주적으로 선출한 자신들의 의회까지 가지고 있었다. 차르가 이런 자치를 제한하려 했지만 헬싱키의 정치 활동은 페트로그라드보다 훨씬 더 베를린을 닮았다.

러시아제국 다른 곳의 사회주의자들이 지하에서 당을 조직해야 했고 비밀경찰에 의해 사냥당하는 동안에도 핀란드사회민주당(SDP)은 공개적이고 합법적으로 활동했다. 독일사민당처럼 핀란드사회민주당은 1899년부터 거대한 노동계급 정당으로 성장했고 사민당회관, 여성 노동자 단체들, 합창단, 스포츠 대회 등 풍성한 사회주의적 문화도 발전시켰다.

정치적으로 핀란드 노동운동은 노동자들을 끈기있게 교육하고 조직하는 의회 중심적 전략에 열중했다. 이러한 정치는 본질적으로 온건한 것이었다. 혁명에 대한 대화는 드물었고 자유주의자들과의 협력이 일반적이었다.

그렇지만 유럽의 거대 합법 사회주의 정당들 중 유일하게 핀란드사회민주당은 1차 세계대전 직전 더 전투적이 됐다. 핀란드가 차르 제국의 일부가 아니었더라면, 핀란드사회민주당 역시 서유럽의 사회주의 정당들 대부분과 비슷하게 변화했을 것이다. 서유럽 사회주의 정당들에서 급진파는 의회주의의 융성과 관료화에 따라 점차 주변화 됐다.

그러나 핀란드사회민주당은 1905년 혁명을 겪으며 왼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핀란드의 한 사회주의 지도자는 1905년 11월 총파업 기간 동안 대중의 분출에 경탄하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놀라운 시기에 살고 있다. (…) 노예의 무거운 짐에도 만족하며 모욕을 감수하던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그 굴레를 벗어던졌다. 이제까지 소나무 껍질을 먹어왔던 사람들이 지금은 빵을 요구하고 있다.

1905년 혁명의 물결 속에서 핀란드사회민주당의 온건파 사회주의 의원들, 노조 지도자들, 당 관료들은 당 내에서 소수파가 됐다. 독일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칼 카우츠키가 정교화한 전략을 시행하기 위해 핀란드사회민주당 대다수는 1906년 이래 합법적·의회주의적 전술에 첨예해지던 계급투쟁적 정치의 활기를 결합시키려 했다. 당의 한 출판물에선 “계급적 증오를 환영한다. 그것은 미덕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오직 독립적인 노동운동만이 노동자들의 이익을 증진시킬 수 있고, 러시아로부터 핀란드의 자율성과 완전한 정치적 민주주의를 지켜내고 확대할 수 있다고 핀란드사회민주당은 주장했다. 결국 사회주의 혁명은 당면한 목표가 되겠지만 당은 그러기 전까지 조심스럽게 힘을 키워야 하며 지배계급과의 섣부른 충돌을 피해야만 했다.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의 이러한 전략, 전투적 메시지와 속도가 느릴지라도 끈질긴 방법을 결합한 이 전략은 핀란드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1907년 10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핀란드사회민주당에 가입했고, 세계에서 인구 대비 가장 큰 사회주의 조직이 됐다. 그리고 1916년 7월 핀란드사회민주당은 모든 나라들 중 의회 내 다수파가 된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이 돼 새 역사를 썼다. 그렇지만 최근 몇 년간 차르의 ‘러시아화’ 정책 때문에 이 당시 핀란드에서 권력은 러시아 관료들의 수중에 있었다. 1917년 곧바로 핀란드사회민주당은 자본주의적 사회에서 사회주의자가 의회 다수파를 차지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됐다.

혁명 초기의 몇 달

페트로그라드 주변에서 2월 반란이 벌어졌다는 뉴스는 핀란드를 놀라게 했다. 일단 이 소식이 사실로 확인되자 헬싱키에 주둔해있던 러시아 병사들이 그들의 장교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한 목격자는 이렇게 진술했다.

병사와 수병들은 그날 아침 붉은 현수막을 들고 거리를 행진했다. 일부는 라마르세예즈[2]를 부르며 행진했고 다른 일부는 군중에게 붉은 리본과 헝겊 조각을 나눠줬다. 계급이 낮은 무장 수병들이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장교들을 무장해제시켰다. 적색 수병들은 이에 저항하거나 붉은 표지를 받지 않는 장교들을 사살해 그곳에 내버려뒀다.

러시아 관리들은 제거됐고 핀란드에 주둔하던 러시아 병사들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 충성을 선언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핀란드 경찰력 또한 아래로부터 와해됐다. 혁명을 겪은 보수적 작가 헤닝 소더헬름[3]은 1918년 국가가 폭력에 대한 독점을 상실한 것을 한탄한다. 이는 핀란드 지배계급의 인식을 살펴볼 수 있는 매우 유용한 기록이다.

경찰을 완전히 와해시키는 것이 핀란드사회민주당의 대표적 정책이었다. 혁명이 시작되자마자 러시아 병사들에 의해 축출된 경찰력은 이후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인민’은 이 기구에 대해 한 푼어치의 신뢰도 갖고 있지 않았고 이를 대신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노동당원들은 ‘의용대’를 만들었다.

옛 러시아 관료들을 무엇이 대체해야 할까? 몇몇 급진파들은 적색정부의 설립을 밀어붙였지만 그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제국의 다른 지역에서처럼 3월 핀란드에도 ‘민족의 단결’이라는 구호가 흘러넘쳤다. 새로운 러시아임시정부로부터 광범위한 자율성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핀란드사회민주당의 온건파 지도자들은 당의 오래된 입장을 버리고 핀란드 자유주의자들과의 연합정부에 참여했다. 여러 급진적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움직임이 ‘배신’이며, 핀란드사회민주당의 마르크스주의적 원칙에 대한 전면적인 위반이라며 비난했다. 그렇지만 다른 핵심 지도자들은 당의 분열을 막기 위해 정부에 입각에 동의했다.

핀란드의 이러한 정치적 밀월은 오래 가지 못했다. 새로운 연합정부는 곧 핀란드의 작업장들과 거리, 지방에서 전례없이 격렬하게 분출한 계급투쟁의 한가운데 서게 됐다. 몇몇 핀란드 사회주의자들은 무장 노동의용대를 건설하는 데 자신의 노력을 쏟아 부었다. 또 몇몇은 파업과 전투적 노동조합주의, 현장노동자의 실천을 선동했다. 이러한 움직임들을 소더헬름은 이렇게 묘사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이제 애원하고 기도하기보다 주장하고 요구했다. 내 생각에 1917년 핀란드에서처럼 노동자들이, 특히 그중에서도 거친 자들이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한 일은 없었다.

핀란드의 지배자들은 애초 온건파 사회주의자들이 연합정부에 입각하면 핀란드사회민주당이 계급투쟁 노선을 폐지할 거라 기대했다. 소더헬름은 이러한 희망이 곧 꺾인데 대해 애통해 했다.

예상치 못한 빠른 속도로 폭도들의 완전한 지배가 확립됐다. (…) 가장 먼저,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노동당의 전술들 때문이다. 노동당은 공식적 차원에서는 어느 정도 품위를 갖춘 것처럼 보였지만 부르주아지에 맞서는 선동 정책을 불굴의 의지로 계속 추진하고 있었다.

새로운 정부의 온건파 사회주의자들과 그들의 동맹인 노동자 지도자들이 대중반란의 기세를 꺾을 방법을 찾는 동안 당의 극좌파들은 부르주아지와의 동맹 파기를 계속해서 주장했다. 새로운 정부에 제한적인 지지만 보내고 있던 무정형의 중도파 세력은 이 양 극단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대부분의 핀란드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이 대개 의회주의적 전략에 여전히 우선순위를 두긴 했지만 다수는 아래로부터의 흐름에 지지를 보내거나 동조했다.

저항이 예상과 달리 더 고조되는 상황에서 핀란드의 부르주아지는 점점 더 호전적이면서 비타협적으로 됐다. 역사가 모리스 카레즈[4]는 핀란드의 상류 계급은 “자신들이 보기에 인간의 모습을 한 악마가 만들어낸 정치조직과 권력을 공유”하기 위해 결코 스스로 물러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계급 양극화

여름에 이르자 핀란드의 연합정부는 내부로부터 붕괴하기 시작했다. 8월 제국의 식량공급망이 붕괴됐고 핀란드 노동자들은 기아의 망령에 사로잡혔다. 8월 초 식량 폭동이 터져 나왔고 핀란드사회민주당의 헬싱키 조직은 정부가 위기를 진정시킬 결정적 정책의 채택을 거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핀란드사회민주당 좌파의 주요 이론가이자 다음해 핀란드공산당을 건설하는 오토 쿠시넨[5]은 “굶주린 노동 대중은 곧 연합정부에 대한 신뢰를 잃을 것”이라고 했다.

민족자주를 위한 투쟁에서 사회주의자들의 비타협적 태도는 계급 양극화를 더 고조시켰다. 핀란드 사회주의자들은 러시아 정부가 자신들 민족 내부의 삶에 개입하는 것을 끝장내기 위해 열을 다해 싸웠다. 그들은 의회 내 다수파의 지위와 노동자 의용대에 대한 통제권을 이용해 독립을 쟁취함으로써 자신들의 야심찬 정치 강령과 사회주의적 개혁을 밀어붙이길 바랐다.

7월 한 사회주의 지도자는 “지금까지 우리는 두 전선에서 싸워야만 했다. 우리 부르주아지들과의 싸움이 하나고 러시아 정부와의 싸움이 다른 하나였다. 우리가 계급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우리가 온 힘을 국내의 부르주아지에 맞선 하나의 전선에 쏟아부을 수 있으려면, 우리에겐 독립이 필요하고 핀란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핀란드의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 또한 그 나름의 이유로 핀란드의 자율성이 강화되길 원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혁명적 방법을 사용하길 꺼려했고 그들 다수는 핀란드사회민주당이 완전한 독립을 밀어붙이는 것에도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결국 7월 이들은 충돌했다. 핀란드 의회의 사회주의자 다수파는 핀란드의 완전한 자치권을 선언하는 전례없던 ‘권력이양법(발타라키)’[6]을 단독으로 발의했다. 의회 내 소수파 보수주의자들이 격하게 반발했지만 권력이양법은 7월 18일 통과됐다. 그렇지만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이끌던 러시아임시정부는 곧바로 권력이양법의 발효를 거부했고 이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핀란드를 점령하겠다고 위협했다.

핀란드 사회주의자들이 권력이양법의 포기와 굴복을 거부했을 때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기회를 잡았다. 그들은 핀란드사회민주당을 고립시키고 그들의 의회 내 다수파의 지위를 끝장내길 바라며 민주적으로 선출된 핀란드 의회를 해산시키겠다는 케렌스키의 결정을 냉소적으로 지지하며 정당화 했다. 의회 구성을 위한 새로운 선거가 열렸고 비사회주의자들은 간신히 다수파가 됐다.

핀란드 의회의 해산이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노동자들과 이들의 대표자들 사이에선 의회가 사회 해방의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이 남아있었다. 쿠시넨은 이렇게 설명했다.

부르주아지들에겐 그 어떤 병력도, 믿을 만한 경찰력도 없었다. (…) 따라서 사회민주당이 하나의 승리 이후 또 다른 승리를 얻어낼 수 있는 의회주의 합법성이라는 관례를 따라야할 모든 이유가 있다.

그렇지만 의회가 그 유용성을 다했다는 것이 더 많은 노동자들과 당 지도자들에게 점점 더 명확하게 다가왔다.

사회주의자들은 이 반민주적 쿠데타를 비판했고, 핀란드 민족의 자결권과 민주적 기구들에 맞서 러시아 국가와 야합한 부르주아지를 비난했다. 핀란드사회민주당은 새로운 의회선거가 불법적이며 부르주아지가 승리한 건 광범위한 불법 선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핀란드사회민주당은 8월 중순 당원들에게 정부의 모든 공직에서 사임하라고 지시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핀란드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유일한 러시아 정당인 볼셰비키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모든 방면에서 폭압에 대한 반격이 이뤄지면서 지금까지 평화적이었던 핀란드에서 혁명의 폭발이 일어나게 됐다.

권력을 향한 투쟁

10월이 되자 러시아 제국 전체에서 위기는 임계점에 다다랐다. 분노에 가득 찬 핀란드의 도시와 지방 노동자들은 지도자들에게 권력을 잡으라고 요구했다. 핀란드 전역에서 폭력을 수반한 충돌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노동계급이 더 조직되고 무장했을 때에야 혁명을 밀어붙일 수 있다고 여전히 많은 핀란드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이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떤 이들은 의회를 떠나는 것을 여전히 두려워했다. 10월 말 사회주의 지도자인 쿨레포 마네르[7]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더 이상 혁명을 피할 수 없다. (…) 평화적 활동에 대한 믿음은 사라졌고 노동계급은 오직 그들 자신의 힘만 믿기 시작했다. (…) 이렇게 급격하게 혁명으로 나가고 있다는 우리의 분석이 틀렸으면, 정말 좋겠다.

10월 말 볼셰비키가 러시아에서 권력을 잡자 그 다음은 핀란드인 것처럼 보였다. 러시아 임시정부가 군사적 지원을 중단하면서 핀란드 지배자들은 고립돼 위험해졌다. 핀란드에 주둔하고 있던 수 만 명의 러시아 병사들은 대개 볼셰비키를 지지하며 평화를 요구했다. 한 핀란드 자유주의자는 자신이 목격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승리한 볼셰비즘의 물결이 핀란드 사회주의자들의 물레방아에 물을 부어줄 것이고 당연히 핀란드 사회주의자들은 이 물레방아를 돌릴 수 있게 됐다.”

핀란드사회민주당의 당원들과 페트로그라드의 볼셰비키들은 핀란드 사회주의 지도자들에게 바로 권력을 잡으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당 지도자들은 이러한 요청을 얼버무렸다. 볼셰비키 정부가 며칠이나 더 유지될 수 있을지 모두에게 불투명한 상황이기도 했다. 온건파 사회주의자들은 의회에서 평화적 해결책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매달렸다. 몇몇 급진파는 권력 장악이 가능하고 또 매우 시급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지도자들 대부분은 이 두 선택지 사이에서 흔들렸다.

“‘계급전쟁이라는 토대 위에 단결한’ 우리 사민주의자들은 처음엔 한 쪽으로 다음엔 다른 한쪽으로 흔들렸다. 처음에는 혁명에 강하게 이끌렸다가 다음에는 후퇴하곤 했다”고 쿠시넨은 당의 결정적 순간에서의 우유부단함에 대해 회고했다.

무장봉기에 대해 합의할 수 없었기에 당은 노동자들의 긴급한 경제적 요구, 핀란드의 자주, 부르주아지에 맞서 민주주의 방어를 위한 11월 14일 총파업을 호소했다. 신중했던 파업 호소에 비춰볼 때 아래로부터의 호응은 압도적이었다.

핀란드는 마비됐다. 여러 지역에서 핀란드사회민주당 조직과 적위대는 권력을 장악하고 전략적 건물들을 점거했다. 부르주아 정치인들도 체포됐다.

헬싱키에서도 곧 봉기가 일어날 것처럼 보였다. 총파업위원회는 권력을 장악할 것인지를 11월 16일 투표에 회부했다. 온건한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사회주의 지도부들이 이 결정을 비판하면서 사임하겠다고 나서자 위원회는 그날로 방침을 철회했다. 결국 “총파업위원회는 상당한 소수가 반대하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권력을 잡을 순 없지만 계속해서 부르주아지에게 압력을 가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파업은 곧 철회됐다.

핀란드 역사가 한누 소이카넨[8]은 11월 파업은 거대한 기회를 놓친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노동자 조직이 권력을 장악하기에 이때가 최적기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아래로부터의 압력은 거대했고 싸우려는 의지는 최고조에 달했다. (…) 그러나 총파업으로 인해 부르주아지 다수는 사회주의자들의 위험성에 대해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됐다. 부르주아지들은 확고한 지도력 아래 스스로를 조직해 공공연한 내전을 개시할 때까지 이 시간을 활용했다.

안소니 업튼[9]은 핀란드사회민주당이 대중적 행동으로 전환하는 것을 주저한 데 주목하며 이렇게 주장했다. “일반적으로 말해 핀란드 혁명가들은 역사상 가장 끔찍한 혁명가들이었다.” 이런 주장은 이야기가 11월에 끝났다면 들어맞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어진 사건들은 핀란드사회민주당의 혁명적 심장이 결국 승리했음을 보여줬다.

총파업 후 실망한 노동자들은 점점 더 무장투쟁과 직접행동으로 경도돼 갔다. 부르주아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백위대’를 조직해 내전에 대비했고 군사적 지원을 받기 위해 독일정부에 접근했다.

사회적 결속이 급속히 붕괴하는 상황에서도 다수의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성과 없는 의회에서의 협상에 여전히 목을 매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때 핀란드사회민주당 좌파는 혁명이 이 이상 늦어진다면 엄청난 재앙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굽힘없이 주장했다. 급진파는 12월과 1월 초까지 이어진 당내 투쟁과정에서 결국 승리했다.

핀란드사회민주당의 혁명적 언사들은 1월 마침내 행동으로 이어졌다. 반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로 1월 26일 저녁 당 지도자들은 헬싱키 노동자회관의 탑에 붉은 등을 밝혔다. 사민당원들과 이들에 동조한 노동자 단체들은 다음날 핀란드의 큰 도시 대부분에서 손쉽게 권력을 장악했다. 이와 달리 북부 농촌지역은 여전히 상층 계급의 손아귀에 놓여있었다.

핀란드의 봉기 세력은 핀란드 부르주아지가 외국의 제국주의자들과 결탁해 노동자들이 성취한 것들과 노동자 민주주의에 맞선 반혁명 ‘쿠데타’를 이끌었기에 혁명이 필요했다는 내용을 담은 역사적 선언을 발표했다.

핀란드에서 혁명권력은 지금 이순간부터 노동계급과 그 조직들에게 있다. (…)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고귀하면서도 가혹하다. 특히 무례한 인민의 적들에 가혹하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피억압자들과 천대받던 이들을 지원한다.

새로 건설된 적색 정부가 처음 세운 계획은 상대적으로 신중한 정치적 과정을 따르는 것이었음에도 핀란드는 빠르게 내전으로 빠져들었다. 핀란드 노동자들의 권력 장악이 늦어지면서 그 피해는 고스란히 노동계급이 지게 됐다. 왜냐하면 러시아 병사들이 1월이 되자 고국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부르주아지는 11월 총파업 이후 석 달여 간 핀란드와 독일에서 자신의 군대를 조직할 기회를 잡았다. 결국 내전에서 핀란드 적위대 2만7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우익은 1918년 4월 핀란드사회주의노동자공화국을 분쇄하고 8만여 명의 노동자와 사회주의자들을 강제수용소에 가뒀다.

핀란드혁명이 좀 더 일찍 시작했다면, 그리고 좀 더 공격적으로 정치·군사적 수단을 사용했다면 성공할 수 있었을지를 두고 역사가들의 의견은 갈린다. 어떤 역사가는 1918년 3월과 4월 독일 제국주의의 군사적 개입이 결정적 요인이라고 말한다. 쿠시넨 또한 이와 비슷한 대차대조표를 제시했다.

독일 제국주의는 우리 부르주아지의 한탄에 귀 기울였고 핀란드사회민주당의 요청에 따라 러시아소비에트공화국으로부터 독립을 얻어낸 핀란드를 집어삼킬 준비를 갖췄다. 부르주아지의 민족적 정서는 이 점에서 그 어떤 고통도 느끼지 않았다. 그들의 ‘조국’이 노동자들의 조국이 되려는 찰나에 제국주의 외세의 멍에는 그들에게 공포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들은 노예 소유주라는 자신들의 수치스러운 지위를 유지시켜줄 위대한 독일의 강도떼들에게 인민 모두를 희생양으로 바칠 각오가 돼있었다.

핀란드 혁명의 교훈

핀란드혁명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건 무엇일까. 다른 무엇보다 이 혁명은 노동자 혁명이 오직 중앙 러시아에서 만의 현상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평화로운 의회주의 핀란드에서조차 노동 인민은 점점 더 사회주의 정부만이 사회적 위기와 민족 억압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다고 여기게 됐다.

볼셰비키 외에는 그 어떤 정당도 러시아제국에서 노동자들을 권력으로 이끌 수 없었다. 핀란드사회민주당의 경험은 칼 카우츠키가 옹호했던 혁명에 관한 전통적 관점이 옳았음을 여러모로 보여준다. ‘끈기있는 계급의식적 조직화와 교육을 통해 사회주의자들은 의회 다수파가 될 수 있고, 이를 통해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전환을 촉발할 의회기구 해체를 시도할 수 있다’는 관점을 말이다.

의회주의적 전략을 선호한 당의 태도가 자본가들의 지배를 끝장내고 사회주의를 향해 전진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이와 반대로 카우츠키의 전략을 포기한 지 오래된 관료화한 독일사민당은 실제로 1918~19년 자본가들의 지배를 옹호했고 이를 뒤엎고자 한 노력을 폭력적으로 가로막았다.

핀란드의 경험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의 강력함 뿐 아니라 그것이 지닌 잠재적 한계까지 보여줬다. 그들은 의회의 영역을 벗어나길 주저했고, 대중행동을 과소평가했으며, 당의 단결을 위한다며 온건파 사회주의자들에 굽신거리곤 했다.

[필자] 에릭 블랑(Eric Blanc)은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서 활동하는 활동가이자 역사가다. 저서로는 ‘Anti-Colonial Marxism: Oppression & Revolution in the Tsarist Borderlands’가 있다.
[옮긴이] 전재오 | 한 신문사에서 12년째 편집기자로 일하고 있다.
[원문] https://www.jacobinmag.com/2017/05/finland-revolution-russian-empire-tsarism-independence-general-strike
[원문 게재] 2017년 5월 15일


[옮긴이 주]
[1]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는 스웨덴과의 전쟁을 통해 핀란드를 정복한 후 자치 대공국을 허용했다. 핀란드 대공국에는 당시 스웨덴과 비슷한 형식의 의회가 구성됐다. 자치 대공국으로 핀란드의 행정은 핀란드인 관료들이 처리했고 러시아인 총독이 러시아 황제를 대표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핀란드 정책을 1890년대 동화정책으로 전환하면서 자치권을 축소하고자 했다. 이로 인해 러시아 정부와 핀란드 의회 사이의 갈등이 고조됐다.

[2] 프랑스혁명 당시의 혁명가. 프랑스 혁명에 맞서 유럽의 귀족들이 침공하려 하자 공화국을 수호하려 파리로 모여든 의용군들의 행진곡이다. 루제 드 릴이 1792년 작사·작곡했다. 지금은 프랑스의 국가다. 초기 인터내셔널가는 이 곡의 멜로디에 가사를 붙여 불렀다.

[3] 헤닝 소더헬름(Henning Soderhjelm) : 1888년 12월 헬싱키에서 태어난 작가. 1918년 혁명의 목격담을 엮은 책을 썼다. 1932년 스웨덴 시민권을 획득했고 1967년 스웨덴 예테보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4] 모리스 카레즈(Maurice Carrez) : 1955년 4월 프랑스 두에서 태어난 역사학자. 스트라스부르대학 교수다. 핀란드사 전문가로 188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핀란드 노동계급 연구에 힘을 쏟으며 특히 핀란드사회민주당의 지도자 오토 쿠시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5] 오토 쿠시넨(Otto Kuusinen) : 1881년 10월 라우카에서 태어난 핀란드의 정치가. 1900년 헬싱키대학에 입학했고 학생조합 등에서 활동했다. 1905년 무렵부터 핀란드사회민주당의 주도적 지도자가 됐다. 1908~1913년 핀란드 의회의 의원으로 활동했고 1911년부터 1917년까지는 당대표였다. 1918년 1월 핀란드혁명의 지도자였고 단명한 핀란드사회주의노동자공화국의 교육인민위원 역할을 했다. 내전에서 패한 후 러시아로 망명해 코민테른에서 활동을 했다. 1964년 5월 모스크바에서 삶을 마쳤다.

[6] 권력이양법(valtalaki) : 러시아 제국에 속해있던 핀란드 대공국의 자치권을 핀란드 의회로 완전히 넘기는 내용의 헌법적 법안.

[7] 쿨레포 마네르(Kullervo Manner) : 1880년 10월 코케매키 출생. 쿠시넨의 뒤를 이어 핀란드사회민주당 대표를 맡았었다. 내전 후에는 러시아로 망명했고 쿠시넨과 함께 핀란드공산당을 건설했다. 1939년 노동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다.

[8] 한누 소이카넨(Hannu Soikkanen) : 1930년 8월 시폴라에서 태어난 핀란드 역사학자. 1976년부터 1993년까지 헬시킹대에서 사회사를 강의했다. 핀란드 노동계급 운동과 사민당의 역사, 공산주의적 자치의 역사를 연구했다.

[9] 안소니 업튼(Anthony Upton) : 1929년 태어난 영국의 역사학자. 북유럽 역사를 전공했다. 세인트앤드류스대학에서 강의했다. 2015년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