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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죽음의 행렬, 노동운동은 어디로 사라졌나

[워커스 노동의 추억] 단결보다 고공이 가까운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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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14일 새벽 3시 30분. 경북 경산 진량공단에 있는 CU편의점에서 살인 사건이 있었다. 20원 짜리 비닐 봉투 값 때문에 손님과 티격태격했던 아르바이트 노동자는 손님이 다시 들고 온 흉기에 찔려 목숨을 잃었다. 왜 피해자가 도망갈 수 없었는지, 아니 애초에 공단 한 가운데에 있는 편의점이 왜 새벽 3시 30분에 영업을 하고 있어야 했는지 물어야 했지만 사건은 조용히 흘러갔다. 퇴로가 없는 계산대에 최소한의 호신도구 하나 없이 갇혀 있었던 노동자의 죽음은 그렇게 잊혀 갔다.

사건 초기, 이 죽음을 사회적으로 알리고자 나선 이들도 있었다. 알바노조는 사건 다음 날 CU본사인 BGF리테일 앞에서 살해된 노동자를 추모하고, 편의점 알바노동자의 노동실태를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 이후 CU본사와 진행한 면담에서 본사는 “유족 협의는 점주와 지속적으로 노력 중”이라며 유족과의 충분한 협의를 통해 사건을 잘 마무리할 것이며, 안전대책 부분에 대해 노력 하겠다고 밝혔다. 면담자리에서 CU본사가 보였던 태도와 호의를 믿고, 알바노조는 면담을 끝냈다.

그렇게 100일이 지난 3월 중순 즈음 알바노조는 피해자의 벗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CU본사가 단 한 번도 유가족 측에 연락을 하지 않았으며, 유가족의 대화 시도를 의도적으로 차단하는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었다. 면담 자리 에서 본사 홍보팀장의 호의를 믿고 돌아섰던 이들은 배신감을 느꼈다. 면담 자리에서 CU본사가 보였던 호의는 무엇이었을까. 탄핵 직후 끝없이 달아오르고 있던 촛불의 힘이 CU로 향하지 않기를 바란 꼼수였을까. 혹은 대응 방향을 마련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위한 접대성 멘트였을까.

[출처: 정리해고 철페! 비정규직 철폐! 노동3권 쟁취! 노동자·민중 생존권 쟁취를 위한 투쟁사업장 공동투쟁위원회]

일터, 이윤과 안전 사이

편의점을 들러 계산대를 바라본다. 고객과 마주한 테이블을 접어야만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계산대, 알바노동자가 움직이기에는 턱없이 좁은 계산대. 곳곳에 물건들로 가득해 뛰어 넘을 수도 없는 계산대. 불의의 사고가 벌어지면 고립 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작은 점포에 온갖 종류의 물건을 비치하다 보니 매대 곳곳에 ‘효율성’을 고려한 배치가 보인다. 그러나 정작 일하는 노동자의 ‘안전’을 고려한 배치는 없다.

알바노조 편의점 모임이 진행한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67.9%의 노동자들이 폭언이나 폭행을 경험한 적이 있다. 이 중 폭행을 한 번이라도 당한 노동자는 9.0%다. 특히 야간 알바가 주간 알바에 비해 폭언이나 폭행을 겪은 비율이 2배 가량 높았다. 매장 내에 안전을 위해 CCTV를 설치해놨지만 CCTV가 노동자의 안전을 지키지는 못한다. 오히려 노동자 감시나 업무지시를 위해 쓰일 뿐이다.

알바노동자 3분의 2가 폭언과 폭행을 겪지만 본사는 모든 책임을 가맹점에게 넘기고 이윤만 챙긴다. 편의점 인테리어를 결정하는 것은 본사다. ‘24시간 영업’과 ‘19시간 영업’등으로 영업구조를 나눠놓고, 수익분배율을 조정하는 방식으로 24시간 영업을 유도하는 것도 본사다. 전기 광열비 등을 차등 지원하겠다며 24시간 영업을 유도하는 곳도 본사다.

24시간 영업을 통해 브랜드 이미지를 올리려는 것도 본사다. 본사가 가맹점에 강요하는 계약은 ‘공정’의 탈을 썼지만 ‘공정’하지 않다. 노동자와 다를 바 없는 가맹점 사장님은 24시간 영업을 택한다. 수익분배율은 고려하지만 알바노동자의 안전은 고려하지 않는 불의한 계약. 그렇게 심야 편의점 노동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노동이 됐다.

응답하라 노동운동

민주주의를 밝히던 광장의 촛불이 사그라지면서 수면 아래에 있던 죽음들이 잇따라 드러나고 있다. 경산 CU편의점 알바 노동자 살해사건. LG유플러스 콜센터 현장실습 노동자의 죽음, tvN 드라마 ‘혼술남녀’ 신입조연출 자살…. 탄핵 가결 두 달 만에 사회적으로 드러난 죽음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사건들이 노동조합으로 조직되지 않은 곳에서 시작됐다는 점이다. 비정규노동자들의 죽음이 흘러넘쳐 조직도 배경도 없는 유가족들이 투쟁에 나선다. 일터에서의 ‘안전’과 ‘생명’이 불평등한 시대. 조직노동 밖에서 벌어지는 이 죽음의 행렬은 우리사회에 대통령 하나 바꾸는 것을 넘어선 변화가 필요 하다는 경고 신호다.

하지만 지금의 노동운동이 변화의 물꼬를 트는 장밋빛 희망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대공장 정규직 노동운동을 보고 있으면 마음은 심란해진다. 4월 7일 기아자동차 정규직 노동조합은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어 ‘1사 1노조 유지’를 놓고 조합원 총투표를 진행하는 안건을 통과시켰다.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대법원의 판결을 무시한 채 일부만 정규직으로 채용하겠다는 회사의 ‘꼼수’에 맞서 싸우고 있다. 기아자동차지부(정규직 노동조합)는 이런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에 갈등이 있다며 분리 투표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10년째 같은 노조깃발 아래에서 활동해온 비정규직을, 법원의 판결을 이행하라는 당연한 요구를 외치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내치겠다고 협박하고 있는 꼴이다.

단결보다 고공이 가까운 시대

총투표에 대한 논란이 현장 안팎에서 벌어지는 가운데 4월 14일 ‘정리해고 철폐! 비정규직 철폐! 노동3권 쟁취! 노동자·민중생존권 쟁취를 위한 투쟁사업장 공동투쟁 위원회’가 광화문 사거리 광고탑 고공단식농성에 들어갔다. 고공농성에 들어간 노동자들은 하이텍, 아사히글라스, 동양 시멘트, 콜트콜텍, 현대자동차비정규직, 세종호텔 등 거리 에서 수년간 싸워온 노동자들이다. 비정규직의 삶을 바꾸겠다고 노동조합을 선택한 노동자들, 노동조합을 지키겠다고 투쟁을 선택한 노동자들이다. 정리해고를 막겠다고 노동조합으로 뭉쳐 싸운 노동자들이기도 하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쫓아내겠다며 협박을 하는 노동자와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곡기를 끊고, 고공에 오르는 노동자가 ‘민주노총’이란 한 깃발 아래에 있다. 2017년 노동운동이 마주한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투쟁하는 노동자 들에게는 단결보다 고공이 가깝다. 미조직노동자들은 투쟁 보다는 좌절을 선택한다. 뭉뚱그린 ‘단결’과 ‘연대’, 혹은 이질적인 두 집단을 모두 만족시키려는 ‘타협적 정책’은 문제 해결의 답이 될 수 없다. 노동운동이 누구를 향해야 하는지가 명확해져야 한다. 꼬인 실타래는 여기서부터 풀어야 한다.[워커스 3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