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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 게이트 vs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경제로보는세상] 닮은 듯 아닌 듯 , 1997년과 2017년의 ‘폭망스런’ 평행이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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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는 이제 거의 빈사상태에 몰렸다. 대통령 지지도는 한 자릿수 대까지 떨어졌는데, 이는 97년 김영삼 전 대통령 지지도 6%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더구나 전 국민의 3분의 2가 ‘하야’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박근혜 정권은 사실상 식물정권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하야’ 이후 제기되는 질문, 즉 ‘그 다음은 누구?’를 자연스럽게 묻게 된다. 바로 대안권력에 대한 질문이다. 그래서 ‘책임총리제’, ‘거국중립내각’, ‘조기 대선’ 등등의 말이 어지럽게 난무하는 정국이 펼쳐지는 것이다.

한편 이번 사태는 역대 어느 정권이든 겪은 정권 말기의 크고 작은 측근 비리와 달리 대통령이 직접 연루되어 있다는 점에서 결을 달리한다. 또한 대내외적 경제상황이 경고등을 켰다는 점에서도 상황이 위중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20년이나 지나버린 1997년 경제위기 사태의 과정을 되짚어보면서 1997년과 2017년의 닮은꼴을 찾고자 한다. 닮은 듯 아닌 듯 보이는 일련의 과정은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긴박한 정세를 헤쳐 나가는데 중요한 참고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소통령 김현철 비리사태와 한보그룹 및 기아차 부도사태

앞으로 두 달 정도만 더 있으면 1997년 외환위기 사태의 첫 출발이었던 1997년 1월 한보사태 발발 20주년이 된다. 1996년 12월 말 발생한 노동법 날치기 사태로 인해 노동자들의 시위가 들불처럼 번지던 시기였다. 마치 지금 성과연봉제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노정 대립처럼 정부가 일방적으로 추진한 노동법개악 날치기 사태로 많은 노동자가 거리로 나섰다. 그 후 한 달 넘게 총파업이 지속되었다. 이와 함께 YS정권 말기 소통령이라 불렸던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 씨의 국정 전횡과 비자금 의혹이 불거지면서 대통령의 지지도는 바닥을 향해 추락했다. 그리고 이것은 1997년 봄 국민의 대선자금 수사요구로 비화되었고, 대학생들의 대규모 도심시위로 발전했다.

당시 이런 정치적 사건들은 지금 우리가 매일같이 보고 있는 비선 실세 최순실의 비리사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촛불시위와 40일을 넘기고 있는 최장 철도파업과 유사하다. 차이가 있다면, 1997년엔 김현철의 국정 전횡, 대선자금 비리가 큰 정세적 사건이었는데, 현 사태는 각종 위법 상황에 대통령이 직접 연루되었다는 의혹과 진술이 나오면서 대통령에 대한 직접 수사까지 거론되는 등 확대일로를 걷고 있다.

한편 1996년 말 당시, 일각에선 경제위기론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었는데, 1997년 들어 경제위기 논란이 더욱 커졌다. 1990년대 중반 문어발식 확장 경영하던 대기업들은 과잉중복투자에 따른 후유증을 겪기 시작했는데, 1997년 대기업들의 부채비율이 400%에 이를 정도였고, 문제가 심각한 기업들은 600%를 넘었다. 투자 증가로 인한 자본재와 원자재 수입이 급증하여 경상수지 적자가 GDP 대비 5%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이런 투자 확대에 따른 경상수지 적자와 경기 확장은 크게 문제될 게 아니라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왜냐하면 장기적으로 볼 때, 투자 증가는 공급 증가를 가져오고 자본 증대에 따라 수출을 더 증가시켜 경상수지 적자를 상쇄시킬 수 있다는 논리 때문이었다. 얼핏 보면 그럴싸한 근거처럼 보였던 ‘투자 만능론’은 당시 김영삼 정부가 추진한 금융자유화 분위기와 맞물려 은행들의 단기성 외화차입을 증가시키는 원인이 됐다. 그리고 이런 취약성으로 인해, 그 후 일본이 100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을 일시에 인출하면서 한국 경제를 휘청거리게 만든 '결정타'가 됐다.

당시 일련의 사태를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자. 1997년 1월 23일 노동법개악 정국 한 복판에서 한보철강이 부도 나면서 경제위기의 첫 테이프가 끊어진다. 한보철강의 부도설은 이미 1996년 7월부터 주식시장 주변에 유포되고 있었다. 다만 9월부터 그해 연말까지 시중은행들이 4,000억 원을 지원한 데 이어, 1997년 1월 초 다시 1,200억 원을 긴급 지원해 간신히 연명하고 있던 터였다. 당시 한보철강의 총부채는 6조 6,000억 원에 달했다. 이를 발단으로 관련된 권력형 금융 부정과 특혜 대출 비리가 드러나게 된다. 이 사건이 전 국민적인 관심을 모은 이유는, 한보그룹에 천문학적 금액이 대출되는 과정에서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과 정계, 금융계의 핵심부가 서로 유착하여 엄청난 부정과 비리가 행해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대통령 아들 김현철도 정태수와 비리 관계가 있었음이 드러나게 된다.

보통 기업 부도 이후에 실사를 해보면 자산은 줄고 부채는 늘어 부실 규모가 당초보다 커지기 마련인데, 한보도 마찬가지였다. 한보의 부채는 여기저기서 튀어 나와 늘어만 갔고, 그에 따라 한보의 채권금융기관들도 부실화돼갔다. 특히 주채권은행인 제일은행은 사실상의 지급불능 상태에 빠져버렸다. 국내 은행들 가운데 가장 탄탄했던 제일은행이 갑자기 부실덩어리로 전락한 것이다.

이런 부도 사태는 현재 법정관리에 들어간 한진해운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11월 말 법원은 한진해운의 청산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데, 지금처럼 물류대란조차 대처하기 힘든 정부의 무능력과 권력공백 사태에선 청산으로 결정 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런데 물류산업의 특성상 연계산업이 많아서 해운산업의 공황 상태는 다양한 방향으로 퍼질 것으로 보인다. 다만 주 채권자가 정책금융기관인 산업은행이기에 1997년처럼 민간은행들로 피해가 곧바로 확산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금융권이 아닌 다른 연계산업이 타격을 입으면서 이 사태가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충분히 보인다.

당시도 한보사태의 여파는 한 은행에만 그치지 않았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은행들은 자금 회수에 나서게 되었고, 부채비율이 높고 단기성 채무가 많던 기업들부터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1997년 3월 13일 삼미특수강이 부도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당시 재정경제원은 한보철강 부도 이후 대기업의 부도를 막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한번 악순환에 접어든 금융시장은 정부의 기대와 달리 자금경색 쪽으로 치닫고 있었다. 결국 3월 19일 삼미특수강 등 삼미그룹 5개 계열사는 최종 부도 처리됐다. 또한 3월 말에는 진로그룹이 부도 위기에 몰리고 만다. 삼미특수강에 비해 진로그룹은 그 규모가 엄청나게 컸다. 정부는 채권단인 시중 10개 은행에 ‘부도유예협약’을 맺어 대기업들의 부도 사태를 막고자 했다. 간신히 인공호흡기를 달아줬으나, 기업의 부도 사태는 멈추지 않았다. 5월 대농그룹, 6월 부산 태화백화점, 태성기공, 금강피혁이 부도유예협약에 들어가게 되면서 이들에게 돈을 빌려줬던 금융권은 커다란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다.

결국 은행들은 기아차에 대한 자금회수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는데, 부도 당시 기아차의 총 차입금은 6조 6,000억 원으로서 자기자본의 2.5배나 됐다. 기아차가 부도사태를 맞게 된 데에는 기아차 내부 문제도 있었지만,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 부재 속에서 정부가 신속히 개입해야할 타이밍을 놓쳐버린 데 있었다. 당시 한보비리 사태는 청문회로 이어졌는데, 대통령 아들 김현철마저 연루돼 징역형을 선고받으면서 1997년 하반기 김영삼 정권에 대한 국정지지도도 급락했다. 이런 권력공백 속에 위기관리 능력이 갈수록 떨어졌던 것이다. 심지어 그해 9월 17일 가까스로 마련한 정부, 채권단, 기아그룹 간의 3자 합의마저도 기아그룹의 돌출 행동으로 인해 불과 5일 만에 휴짓조각이 되면서 사태 해결은 물거품이 됐다. 이후 채권단과 기아그룹 간 줄다리기가 벌어졌고, 약 한 달 후인 10월 28일 무디스의 국가신용등급 강등을 계기로 외환위기가 쓰나미처럼 닥치게 된다.

1997년 전체를 돌이켜보면, 노동법개악 사태, 한보그룹 부도와 여기에 얽힌 재벌과 정관계 부정부패, 대통령의 측근 비리로 폭발한 민심, 그리고 위기관리 능력 상실로 인해 제대로 손도 못쓰고 벌어진 기아차그룹 부도 사태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국면과 매우 유사하다. 한진해운 법정관리, 대통령과 측근들이 얽힌 비리 사태, 위기관리 능력 상실로 인해 조선해운산업 대책 마련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외국계 컨설팅 회사에 숨어서 우왕좌왕 하는 모습이 그러하다.

그런데 아직 몇 가지 더 따져볼 부분이 있다. 만약 모든 문제의 출발과 해결이 우리 내부에만 있었다면 IMF에 국가가 돈을 빌려야 하는 상황까지 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어찌됐든 정부가 최종 해결사로서 역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7년엔 그럴 수 없었다. 외환위기는 정부의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성격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닮은 듯 아닌 듯한 1997년과 2017년의 평행이론을 더 살펴보기 위해선, 1997년 여름부터 불어 닥쳤던 동아시아 외환위기 정세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중앙은행간 글로벌 위기 관리 체제를 서로 비교 분석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20년 만에 부채 구조가 서로 완전히 뒤바뀐 기업과 가계의 상태를 짚어보고, 앞으로 우리에게 닥쳐올 위기의 형태가 무엇일지 살펴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계속) (워커스 2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