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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AI)의 시민사회적 상상력을 발명하라!

[기술문화비평] 워커스 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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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홍진훤

알파고 흥행이 국내를 휩쓸면서, 인공지능(AI)이 가져올 미래에 관한 가상 시나리오가 우리 사회에 미친 듯 흘러넘친다. 주요 언론들은 아주 짧은 시간에 이제까지 인간이 수행하던 노동을 인공지능 기술이 빠르게 대체하거나 대부분의 직업군을 완전히 소멸시킬 것이라 진단한다. 과학기술자 집단은 기계 지능이 인간을 지배하는 ‘초인공지능’의 미래가 머지않았다는 으스스한 경고까지 내고 있다. 기업가나 혁신가는 인간이 할 일을 알아서 해주는 인공지능이 가져올 자동화된 미래 풍요에 열광하느라 여념이 없다. 우리의 인공지능 논의는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요란하고 부산스러워 보인다. 한반도 핵 재앙과 재난에 대해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근시안의 우리임에도, 수십 년 후에나 다가올 인공지능의 미래를 거의 매일같이 이렇게 저렇게 점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의 기술사를 되돌아보자. 이미 1980년대에도 기술의 상상력은 넘쳤다. 당시 개인 컴퓨터(PC) 출현을 마주했던 이들에게 테크노피아 혹은 테크노포비아의 미래 사회 상상력이 여럿 등장했다. 예를 들어, 컴퓨터 잡지나 만평, 신문 기사 등은 빅브라더 감시 사회를 예측하거나 모든 것이 자동화된 장밋빛 세계를 그려냈다. 1990년대도 마찬가지다. 인터넷이 대중화하면서 그것이 가져올 ‘전자 민주주의’의 정치적 유토피아의 믿음에 대한 언론과 학계의 상찬이 대단했다. 게다가 인간 정신의 전자 네트워크 바다, 즉 사이버공간이 구질구질한 현실과 대비되면서, 빌 게이츠 같은 글로벌 기업가는 인터넷의 발달로 모든 자본주의의 모순과 적대가 사라질 것이라며 ‘마찰 없는 자본주의’의 미래를 예언했다. 이제 모두 다 과도한 상상의 산물로 판명 났고 그 모든 주장은 소리 소문 없이 역사의 뒤안길에 묻혔다.

우리는 오늘 또 인공지능을 보면서 가상 시나리오의 과잉을 반복한다. 이번엔 정부가 앞서고 언론이 나발을 불어댄다. 이에 신난 과학기술자와 기술 혁신론자들이 그 뒤를 따른다. 줄곧 시민 대중은 길 위의 구경꾼 신세다. 구글이 주도한 알파고의 흥행과 제4차 산업혁명의 쓰나미는 더욱더 인공지능의 현실과 가능한 미래를 우리의 입장에서 살필 여유를 없애고 있다. 이들은 인공지능의 실재하는 물질적 조건에 대한 큰 물음 없이 장차 그것이 이러저러하게 쓰이고 압도할 것이라는 단언이나 예측만을 내놓는다. 대중의 건강한 사회적 상상력은 부재하고 여전히 정부와 기업의 기술 엘리트주의와 언론의 미래 예측이 우리 시야를 뒤덮고 있다. 우리의 미래는 무책임한 흥행사들로 인해 눈뜬장님 꼴이다.

기업형 인공지능
인공지능의 미래 예언으로 시중에 떠도는 소위 과학자들의 주장을 여기에 거칠게 옮겨 보자. 이들 과학자는 먼저 인공지능이 ‘약한 인공지능’과 ‘강한 인공지능’이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구글의 알파고나 IBM의 왓슨과 같이 인간의 지능을 흉내 내거나 특정 계산 등 한두 가지 수행성만 높은 경우에 ‘약한 인공지능’에 속한다. 반면 도래하지 않은 기술이지만 인간과 같은 직관적 판단과 창의 능력을 지닌 기계라면 ‘강한 인공지능’이라 할 수 있다. 수행성 측면에서 보면, 알고리즘 선택과 처리 과정에 대해 인간의 개입과 통제가 클수록 약한 인공지능이고, 사물로 객체화되어 자동화 기제에 크게 의지할수록 강한 인공지능이라 볼 수 있다. 더불어 ‘초지능’이란 말도 있다. 이는 인간종을 뛰어넘는 완벽체로서 신과 같은 능력을 지닌 인공지능이다. 인간 위에서 인간을 조정하는 기계신의 우울한 미래를 상정한다. 이들 과학기술자의 비관적 가정에 따르면, 오늘의 인류는 현재 다양한 형태의 약한 인공지능에 둘러싸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불과 20여 년 후에 강한 인공지능으로 질적 변환이 이뤄지는 시점, 즉 기계 지능 폭발의 ‘특이점’(singularity)이 올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기도 하다. 그때가 되면 기계가 ‘초지능’이 되어 인간을 노예로 부리거나 인류를 절멸에 빠뜨릴 수도 있다는 주장이 더해져 우리의 미래 공포감을 더 크게 자아낸다.

자, 이런 상상의 미래 시나리오를 일단 접고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 보자. 아직 우리는 ‘약한 인공지능’ 어디쯤에 살고 있다. 따져 보면 인공지능 기술은 주로 닷컴 기업들의 수익을 올리는 데이터 알고리즘의 원리 속에서 움직인다. 데이터 수집의 출처는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들 자신이다. 스마트폰과 스마트기기에 얽매인 대중 스스로 무수한 비정형의 감정과 정서 데이터들을 매 순간 전자 네트워크에 쏟아낸다. 이 천문학적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특정 결과를 얻기 위해 구글과 페이스북 등 다국적 닷컴 기업들은 알고리즘이란 기술적 기법을 구동시켜 인간의 행동과 패턴을 예측한다. 여기서 알고리즘이란 우리가 쏟아내는 데이터에 대해 원하는 결과치를 얻으려 프로그래밍한 소프트웨어 명령어를 지칭한다. 동시대 인공지능의 기술 수준으로 보자면 당분간 데이터 알고리즘을 짜는 일은 인간 개발자들이 주로 맡겠지만, 필요에 따라 그 판단을 자동화하고 외부 기계에 대상화하려 할 때가 올 것이다. 여기서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인공지능의 기술적 진화 과정이란 자신의 불완전함을 극복하는 기술적 과정이 아니라, 인간의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해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자본주의 기업의 물질적 필요조건과 자장 안에서 움직인다는 데 있다. 기업의 질서를 언급하지 않고 인공지능 기술의 미래 가능성과 위험을 고민하는 일은 그래서 공허하다.

인간 vs 인공지능의 선문답
기계와는 다른 인간만의 본질이 무엇일까? 기업의 욕망과 달리 요새 부쩍 인공지능에 위협을 느끼는 철학자, 인문학자, 예술가 등이 던지는 고민거리다. 현실의 인공지능과 공상과학(SF) 영화에 등장하는 사이보그 로봇이 인간의 외양을 띄면서 인간과 기계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에 대한 인간 실존적 물음이 연신 던져지고 있다. 무엇보다 이들에게서 기계가 인간을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라는 인간 우위론이나 인간 고유론이 제기된다. 즉 이들 인간중심주의자는 기계와 인간의 차별성을 인간 고유의 특징, 즉 인간의 ‘마음’을 기계가 온전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점을 가장 큰 인간다움의 전제로 내세운다. 즉 인간 ‘마음’에는 감성, 지성, 의식, 지향, 창의, 지능 등 수많은 인간적 특성이 존재하는데, 기껏해야 인공지능의 기계적 상상력이란 것이 인간 마음의 아주 작은 일부, 지능만을 다루고 이를 기술적으로 넘어서려는 수준이란 점을 지적한다. 이처럼 인간중심주의자들의 인간 우위론 혹은 인간-기계 차별론은 강한 인공지능의 기술이 도래하더라도 인간 고유의 영역은 결국 신성불가침인 것으로 남아 있으리란 주장에 기대고 있다. 미래 기계가 주는 두려움을 벗어나려는, 인간 주인 대 기계 노예의 오래된 신화에 영향을 받고 있다.

인공지능에 대한 오늘날 인간중심주의자들의 두려움은 기계의 의인화나 이의 생물학적 유비에서 크게 비롯한다. 하지만 인간, 정확히 닷컴 기업이 인공지능으로 만들어낼 기계들이 과연 자신을 닮은 인간종의 모습일까도 의심스럽다. 실제 인공지능은 사람의 닮은꼴이라기보다 인간 전체 모습 가운데 특정 기능의 닮은꼴이다. 그렇다면 굳이 인공지능이 인간의 모든 면을 다 닮아야 할 이유는 없다. 인간을 훨씬 압도하는 강한 인공지능의 출현에서조차 그 기계는 인간보다 총명하더라도 인간과 닮지 않은 전혀 이질적 존재로 등장할 공산이 크다. 예를 들어, 우리가 비행기를 고안할 때 파닥거리는 새와 유사하지만 이를 그대로 본 떠 모델화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는 끊임없이 미래 기계를 의인화하고 인간에 이르지 못하는 인공지능의 한계를 지적하지만, 인공지능은 인간이 부여한 자기 목표 설정을 위해 끊임없이 정보를 수집하고 주위의 장애물을 제거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기업형 비생물체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사실이 이와 같다면 인공지능에게 인간과 닮은꼴이란 그리 중요하지도 필요치도 않은 모습일 것이다.

인공지능 논의의 공백
앞서 본 테크노피아 혹은 테크노포비아적 전망에서, 우리는 시민 대중이 주도하는 기술의 사회적 상상력을 어디에서도 확인하지 못했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그랬듯이 인공지능의 미래 또한 과학자, 기술자, 기업가, 정부, 개발자, 철학자 등 기술 엘리트 계급의 미래 시나리오 안에서 서성거린다. 기계의 지능폭발, 기계의 인간 대체론과 인류 생존위기와 절멸의 초지능 출현, 그리고 마지막 한 가닥 남아 있는 인간성의 기대와 믿음 등 미래 공수표를 날리는 예언자들이 넘쳐난다. 이들에게선 진지하고 현실 비판적인 사회적 상상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인공지능의 미래 시나리오는 결국 오늘의 사회적 조건에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앞으로 다가올 인공지능의 기술을 마치 숙명이나 운명처럼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외려 현실의 상황 변수에 기댄 기술의 ‘시민사회적’ 상상력에 근거해야 한다. 인공지능 기술의 지능폭발을 제어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오늘을 사는 우리 사회와 문화적 정세로부터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예컨대, 인간의 미래나 인공지능의 미래 상상력은 마치 SF소설에서 잘 쓰는 기법처럼, 그 무대는 상상력 속 미래 어느 곳이지만 우리가 현재 발 딛고 있는 지금의 사회적 현실을 끼워 넣는 ‘외삽법’(extrapolation)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아니면 우리의 상상력은 근거 없는 테크노포비아와 테크노피아 양단의 상상력 사이에서 진자할 수밖에 없다.

인공지능의 기술 진화 방향은 사실상 개별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현실 인간 사회의 조건과 권력의 강렬도나 성질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인공지능에 대한 인간 우위론, 테크노피아, 테크노포비아의 시각들은 과학기술 혁신의 주요 동기인 경제적 대체 노동비용과 효율성의 시장 논리를 의외로 크게 고려하지 않는다. 실제 자본주의 기술의 미래는 가장 현실적인 이해 당사자의 이윤추구 행위로 좌우된다. 이제까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적과 최상의 과학기술이 채택된 적은 없었다. 주로 경제적 관심사와 사회적 맥락에 의해 기술의 디자인이 생성됐다는 얘기다. 마찬가지로 착하거나 혹은 악한 인공지능의 윤리의식을 점치는 행위 또한 결국 현존하는 인간의 사회 민주화 수준이나 시민사회의 자유도를 반영한다. 이렇듯 인공지능의 미래 모습은 동시대 기술의 정치경제에 달려 있다.

그러다 보니 인공지능 논의에는 일반 시민의 실천적 역할은 없다. 정부 관료와 과학기술자만이 전망하는 인공지능의 미래에서 시민 대중은 무능하고 비가시적 존재다. ‘특이점’의 순간은 인간이 만든 기술이 인간의 통제력을 벗어나는 때를 상징하지만, 또한 대중의 기술 상상력을 배제하고 기술적 실천을 무시했을 때 도래할 불운한 인류의 미래 기점이기도 하다. 산업기계와 정보기계의 시대 마냥 시민 대중은 그저 인공지능을 위해 단순 노동과 데이터를 제공하는 노예와 같은 무기력한 존재인 듯 보인다. 가면 갈수록 인간의 미래가 시민 대중의 집합 지성에 의존한다고 본다면, 인공지능 논의 또한 시민 대중의 기술 개입에 관한 사회적 상상력이 적극 삽입될 필요가 있다. 미래의 진단이 그저 학자연하는 기술 엘리트계급의 가상 시나리오가 아니려면, 인공지능의 미래를 논할 시민의 기술정치학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