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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를 휩쓰는 조선소 하청노동자 대행진을 기대한다

[워커스 22호 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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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조선해양이 또다시 위기에 봉착한 후 책임소재를 둘러싼 문제들이 등장했다. 9월 8~9일 이틀간 국회에서 ‘서별관 회의 청문회’가 열렸다. 지난해 10월 소위 ‘청와대 서별관 회의’에서 4조 원이 넘는 자금을 대우조선해양에 지원하기로 했고, 산업은행은 그에 따랐다. 정권의 ‘보이지 않는 손’만이 아니라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의 무능력, 대우조선해양의 조직적 분식회계 등 복마전 같은 구조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최경환 전 부총리, 안종범 청와대 수석, 홍기택 전 산업은행장이 빠진 이 청문회에서 위기의 원인과 책임소재가 제대로 밝혀질 수 없었다. 밀실 정책 결정, 나눠 먹기, 비리와 특혜 속에서 이익은 재벌과 밀실 정책의 결정권자들이 독점하고, 피해는 노동자들만 감당하는 현실이 반복된다.

조선업 전체가 침체한 상황에서 노동자를 해고하는 구조

조정이 시작됐다. 현대중공업은 2015년에 사무직 1,500명을 감원했고, 올해는 3,000명이나 되는 사무직 희망퇴직자를 모았다. 지금은 ‘분사’를 추진하면서 정규직 노동자를 외주로 돌리고 있다. 대우조선해양은 200명 관리직을 감원하고 2,000명 정규직 감원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통계 바깥에 더 많은 노동자가 해고된다. 2015년에 2만 명의 하청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올해 말까지 3만 명의 하청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통계수치들은 제멋대로다. 얼마나 많은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을 것인지 정확한 통계도 없는 것이다.

노동자가 집단으로 해고되는 것은 더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2008년 세계 경제위기로 중소 조선소들이 무너졌을 때는 이 인력 대다수가 해양플랜트로 흡수됐기 때문에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일자리를 잃는 노동자들은 갈 곳이 없다. 특정 지역에서 수만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으면 그것은 사회적 재앙이 된다. 우리는 이미 쌍용자동차 3,000명 정리해고 과정에서 26명의 노동자와 가족이 목숨을 끊는 비극을 경험했으며, 큰 사회적 비용을 치러야 했다. 그렇다. 대량해고는 ‘사회적 재앙’이다. 그러므로 노동자의 총고용을 보장하고, 설령 일자리를 잃게 되더라도 살아갈 방법을 마련하는 것은 이런 위기를 만들어낸 정부와 기업의 의무다.

그런데 구조조정의 흔한 레퍼토리처럼, 노동자들은 경제위기의 희생양이 되고 정부의 지원은 기업에만 집중된다. 주식을 미리 팔아치워 손해를 방지하고 사재출연 요구에도 머뭇거리는 재벌들은 여전히 책임에서 벗어난다. 노동자에게만 ‘일방적’으로 책임을 묻기 위해 정부와 기업은 ‘대기업 노동자들의 과도한 임금인상이 문제였다’고 억지를 부린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경영에 개입한 바도 없고, 정치권에 로비를 한 바도 없으며, 분식회계를 도운 일도 없다. 이명박 전 대통령처럼 자신의 사진사를 임원으로 내려보낸 바도 없고, 한해 수백억 원의 배당금을 챙겨간 일도 없다. 그런데도 노동자에게 산업 위기의 책임을 모두 물리는 이 비합리적인 구조는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노동자에게 책임이 있다면 이 비합리적인 구조에 맞서 싸우지 않은 것이다. 2000년 조선소 노동자 8만 명 중 정규직은 5만4,000명이고 하청은 2만6,000명이었으나 2014년 20만 명의 노동자 중에서 정규직은 7만 명, 하청은 13만여 명이었다. 노조라면 적어도 조선업이 잘 나갈 때, 물량팀 같은 왜곡된 고용구조로 비정규직만 확대하는 것을 문제 삼고 싸워야 했다. 정부와 결탁한 비리 구조, 재벌총수들의 전횡을 문제 삼아야 했다. 장기적인 조선업의 비전 없이 단기 이익에만 몰두하는 기업 경영에 맞서 싸워야 했다. 지금의 일방적인 희생 요구에 순응하지 않으려면 노조는 노동자의 고용과 임금을 지키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기업과 정부의 책임을 제대로 묻기 위해 싸워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따질 힘조차 없는 하청노동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원청이 하청업체에 주는 기성금을 낮추는 바람에 임금이 체납된 채로 쫓겨나는 하청노동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체불임금을 100% 달라고 농성했다는 이유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거제 조선소 하청으로는 취업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목숨을 끊어야 했던 하청노동자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했는가. 고용유지지원금의 혜택에도 포함되지 않는 하청노동자들, 정부가 체당금과 고용보험 지급 기준을 완화해도 여전히 대상에서 제외되는 물량팀 노동자들 모두 이제야말로 정부와 기업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해고 후 생계를 책임져라’, ‘고용을 책임져라’라고 요구해야 한다. 더 많이 모여 목소리를 내야 한다. 지금이 그럴 때다.

침묵하던 거제 조선소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지역 노조 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삼성중공업 하청인 천일 기업 노동자들은 원청인 삼성이 체불임금을 해결하라고 요구하며 서울 상경투쟁을 했다. 거제와 목포, 울산 조선소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매우 작은 흐름이지만 하청 노동자들이 모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변화다. 이 변화가 집단적인 조직화로 이어지고, 정부와 기업에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으려면 사회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거제 지역 하청노동자들은 조선업 대량해고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종교계 토론회에서 ‘비빌 언덕이 되어달라’고 했다. 시민사회단체들이 이 요구를 받아 9월 6일 ‘조선소 하청노동자 대량해고 저지 시민사회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10월 29일 거제 지역에서는 하청노동자의 권리를 이야기하는 ‘조선소 하청노동자 대행진’이 열린다. 얼마나 많은 하청노동자가 함께할지 알 수 없지만, 구조조정의 희생자이기만 했던 하청노동자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소중한 자리다. 이 자리에 더 많은 이들이 모일 수 있도록 힘을 보태야 한다. 하청노동자들에게 지금의 위기는 ‘당신들의 잘못이 아니’며 ‘우리가 함께한다’고 이야기해야 한다. 구조조정에 희생당한 이들이 기업과 정치권의 결탁, 비리와 전횡을 폭로하고, 책임 있는 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십수 년간 침묵해온 하청노동자들이 뭉쳐서 소리치는 날, 거제와 울산, 목포에서 하청노동자들의 권리가 외쳐지는 날이 바로 왜곡된 구조를 바로잡기 시작하는 날이다.
덧붙이는 말

김혜진 :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 집행위원, 세월호 416연대 상임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