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언론 참세상

문화대혁명의 기억과 중국의 노동 정치

워커스 12호 인터내셔널

메뉴보기: 클릭하세요. V


최근 중국 당국은 기존의 투자, 소비, 수출 중심의 수요 촉진 정책만으로는 더 이상 경제 성장을 이끌 수 없다고 판단했다. 중국은 작년부터 과잉 생산 구조를 해결하기 위해 시장 중심 개혁과 산업 경쟁력 강화를 주축으로 강력한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강조해 왔다. 이러한 ‘공급측 개혁 ‘이 노동에 주는 의미는 기업의 혁신과 구조조정에 따른 대대적인 해고다. 시진핑 판 신자유주의적 개혁이다. 중국은 향후 기업의 과잉 생산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석탄 부문 노동자 130만 명, 철강 부문 노동자 50만 명을 감원할 예정이며, 정리 해고자 당수가 석탄, 방직, 기계, 군수 시설 분야 종사자이다. 향후2~3년 안에 5대 산업 500~600만 모의 노동자가 해고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경기 하락과 함께 주요 원자재 가격이 하락하면서 대규모 석탄, 철강 기업이 밀집한 동북3성의 경우 경제 성장률이 전국 하위권으로 떨어졌다. 헤이룽장성의 경우 2015년 GDP가 -0.29%로 이미 경제 경착륙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에 따라 이 지역 노동자 임금과 연금 등 각종 사회 보험 체불 현상은 일상이 되었다. 룽젠 광산 기업의 경우 노동자 임금이 이미 40% 삭감되었고 6개월간의 임금과 2년간의 사회 보험비가 지급되지 않았다. 최근 노동자들의거센 반발과 항의가 빈번하게 일어났고, 지역 주민들의 민심은 바닥에 떨어졌다. 이를 잘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올해 홍콩 매체를 통해 보도된 헤이룽장 쐉야산 룽메이 그룹 노동자들의 시위이다.

룽메이 그룹은 헤이룽장성 4개 지역에서 25만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대표적인 석탄 기업이지만 2011년부터 지금까지 석탄 가격이 60% 하락하면서 2015년 9월 구조조정과 함께 10만 명 감원 계획을 발표했다. 감원 계획을 발표하기 전인 2015년 4월 이미 수천 명의 노동자가 임금 체불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였고 당국은 시위 주동자를 체포하고 구금했다. 이러한 성난 민심에 불을 붙인 것은 루하오 성장이다. 루하오는 올해 개최된 전국인민대표회의(전인대) 기간에 “룽메이 그룹의 노동자들은 지금까지 한 푼의 월급도 적게 받은 적이 없다”고 발언했고, 이러한 성장의 발언에 분노한 쐉야산의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이 3월 10일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루하오는 노동자 시위 대책 회의를 주관하면서 보고에 문제가 있었다고 인정했고 임금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광산 노동자들은 2014년부터 임금이 체납돼 현재까지 거의 반년 치 임금을 받지 못했고 매달 800위안의 생활 보조금만 받는 실정이다. 이들은 ‘루하오가 눈 뜨고 거짓말을 한다’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를 행진했다. 사실 국유 기업 개혁은 20년 전인 1997~2002년 사이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통해 이루어진 바 있고, 당시 4천만 명의 국유 기업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다. 특히 동북 지역에서는 2002~2003년 노동자들이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내걸고 대규모 시위를 벌였으며 잠시 독립 노조도 설립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자들의 저항은 당국에 의해 진압되고 주동자는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번 쐉야산 지역 노동자 시위에서는 “우리는 살고 싶다, 밥을 먹고 싶다”라는 구호 외에도 “부패 범죄 분자를 타도하자”, “공산당은 돈을 돌려 달라”라는 플래카드가 등장했다. 거의 모든 노동자가 분노해서 거리로 나가 항의하며 공산당에 책임을 물었고, 과거와 달리 관료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현지 주민들도 대부분 이번 시위를 지지했다. 이 지역에서 공산당은 완전히 민심을 잃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최근 내륙 지역 노동자들은 ‘문화대혁명(문혁)’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고 있다. 시장화 개혁 이후 당국은 효율 우선과 경영자 중심의 개혁을 추진했고, 이러한 과정에서 노동자의 사회 경제적 권리도 축소해 왔다. 문혁 시기 조반을 주동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혔던 노동자들도 1990년대가 되면 대부분 석방되는데, 이들은 출옥 뒤 과거 마오쩌둥이 그렇게 피하고자 했던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에 좌절감을 느낀다. 1)이들은 대부분 1950년대 출생자이자 문혁을 직접 체험한 도시 노동자들로, 1990년대 중후반 국유 기업 구조조정으로 해고되고 도시의 빈곤 계층으로 전락해 연금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중요한 자원은 문혁 담론이다. 이들은 2000년대 들어 인터넷으로 서로 연결되면서 다양한 활동을 통해 문혁 시기를 그리워하고 현 정세 논의를 위한 모임을 한다. 이들의 목표는 한마디로 “자본주의 반대, 사회주의 복귀”이다. 이들의 주요 이론과 경험은 마오쩌둥의 ‘무산 계급 독재 아래 계속 혁명 이론’과 문혁의 실천에서 나오며, 이러한 임무를 실현하는 주력군은 사회주의 노동 계급이고 혁명의 대상은 관료 자본가 혹은 자산 계급이라는 것이다. 마침 이들이 활동을 넓혀 가던 시기는 국유 공장의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한창 진행 중이던 때라 임금과 연금 지급, 국유 기업 민영화 등의 쟁점을 두고 시위가 빈번하게 일어나던 때였다. 이들은 노동자 해고나 관료 부패 등과 같은 사회 문제의 원인을 개혁 개방 그 자체에서 찾았으며, 문혁 당시 주자파와 특권층 비판이라는 계급적 관점과 정서를 가지고 단결된 행동으로 결집했다. 문혁의 기억은 이들에게 사회주의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며 노동 계급의 의식을 형성하는 중요한 자산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노동자가 기억하는 문혁은 어떤 문혁일까? 노동자들은 정책 노선의 변화를 가장 먼저 자신의 삶과 일터에서 민감하게 감지하는 사람들로, 이들에게 문혁은 단순히 권력자에 대한 우상 숭배나 홍위병 투쟁의 이미지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노동 현장에서의 경험으로 남아 있고 이러한 기억은 현재의 현실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선 이들이 기억하는 문혁은 당내 주자파로 상징되는 권력에 대한 자유로운 비판이 허용되고, 공장 관리자의 특권과 권위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통해 일종의 해방감과 주인으로서의 민주적 의식을 체험한 시기였다. 이는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폭력적이고 비민주적인 문혁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다.

둘째, 공장 관리 측면에서 육체 노동과 정신 노동 간의 괴리를 극복하자는 취지에서 노동자의 경영 참여가 시도되었고, 이론과 현실을 유기적으로 접목하려는 ‘생산과 교육의 결합’이 시도되었다. 이는 생산 과정에 대한 통제권을 상당 부분 노동자들에게 부여하는 것으로 이러한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느끼는 주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심리적, 정신적 충족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개혁 이후 당 관료와 기업 경영자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진행된 기업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노동자가 철저히 배제되었다는 상실감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셋째, 노동자라는 직업과 신분, 지위에 대한 자부심이다. 사회주의 시기 노동자는 단순히 자신의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 가는 직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의 영도 계급이라는 정치적 지위와 공장의 주인이라는 상징적 신분이 함께 부여되었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피와 땀으로 국가 공업화와 건설을 위해 부를 창출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고, 따라서 공장에 대해 상당히 강한 귀속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자신에게 돌아오는 몫이 공평한지에 대해서도 엄정하게 평가했다. 사회주의 노동자라는 정체성은 개혁 이후 임금 노동자로 전락한, 급변하는 경제 구조 변화 속에서 무기력하기만 한 자신의 처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이처럼 문혁에 대한 노동자들의 기억은 권력층에 대한 비판, 민주적인 생산 체제의 경험, 노동 계급으로서의 정체성 및 자부심과 관련이 있다. 물론 문혁이 질서의 단계로 들어선 이후(1969년 이후) 공장 관리의 혁명적 실험은 주로 당의 주도로 이루어졌고, 따라서 정세의 변화에 따라 급박하게 종결짓게 되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에게 문혁은 사회주의 체제를 환기시키고 공산당에게 이러한 방향으로의 매진을 끊임없이 촉구하는 하나의 역사적 매개체와 같은 것이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으로 체득해 온 경험을 통해 문혁의 경험을 사회주의와 잇고 있다. 문제는 문혁에서 이루고자 했던 민주적 의사 결정과 복지 제도, 평등한 관계 실현의 시도가 하나의 대안적인 사회주의적 가치로 얼마나 일반 대중에게 확장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문혁 역사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기억의 투쟁 ‘이자 현재 조건에 기반한 ‘계급 투쟁 ‘이라고 볼 수 있다.

올해 문혁 50주년을 맞이하여 인터넷에서는 갖가지 목소리가 뜨거웠다. 문혁은 이미 1981년 개혁파에 의해 <역사결의>로 정리된 바 있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높아지는 문혁에 대한 역사 평가 요구는 ‘결의’ 방식으로는 다 담아내지 못하는 ‘역사’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는 명백하게 과거 자체에 대한 평가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 각자의 계급적 입장과 목표와 관련된다. 자유파에게 문혁은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고 언론과 인권을 탄압한 봉건적인 우상 숭배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들은 권력의 지나친 집중 때문에 문혁이 일어났다고 본다. 당내 개혁파는 문혁의 책임을 주로 조반파에게 돌리고 문혁 과정에서 등장했던 대중 운동의 폭력성과 혼란을 경제 파탄과 연결지으며, 언론 매체를 통해 조반파로 상징되는 대중 운동을 지속적으로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마오좌파 노동자들에게 ‘개혁 ‘은 한 계급이 한 계급을 뒤엎는 ‘우파 쿠데타 ‘였으며, 문혁은 지속적인 시장 확대 과정에서 권력과 자본에 저항하는 생존 투쟁의 중요한 기억의 자원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이들 각자가 문혁을 다시 불러오는 목적은 분명하다. 자유파는 우상 숭배 현상의 재현을 방지하기 위해 ‘헌정’을 실현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고, 당내 개혁파는 문혁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통해 개혁을 추진하는 동시에, 문혁의 폭력적 이미지를 조반파에게 덧씌워 노동자를 탄압하려 한다. 마오좌파 노동자들은 문혁을 저항의 자원으로 활용해 주자파 관료들을 타도하고 사회주의 노선으로 가는 중요한 투쟁의 근거로 삼고자 한다. 중국에서 문혁은 ‘역사에 대한 기억 투쟁’으로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이는 과거에 대한 평가를 넘어 현재에 대한 정세 평가와 미래에 대한 전망의 투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공산당이 힘으로 누르고 감추고 회피한다고 해서 문혁 역사에 대한 기억 투쟁은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각자의 입장과 지역과 울타리 안에서 때론 왜곡되고 확장되며 재해석될 것이다.

경제 위기가 오자 다시 권력의 압박과 자본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러우지웨이 재정부장은 최근 중국 경제 성장 하락의 원인 중 하나로 높은 임금 수준을 지적하며 <노동계약법> 수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노동 보호를 발전 지체의 주범으로 몰고 노동자의 희생을 통해 경제를 구하려는 구태도 다시 반복하고 있다. 2016년 강력한 구조조정을 앞두고 중국 노동자들은 20년 전의 상황과 다른 해법을 보여 줄 수 있을까. 이러한 과정에서 문혁에 대한 노동자들의 기억은 어떠한 자산으로 결합할 것인가.

<hr>

1) 문혁이 끝나자 개혁파는 “문혁 중 조반을 일으켜 출세한 자, 파벌 의식이 심각한 자, 문혁 중 파괴하고 약탈한 자”를 일컬어 ‘삼종인’이라고 지칭하며, 이들에 대한 정리를 선포한다. 그러나 “가장 위험한 자는 문혁 삼종인”이라는 지침과 함께 덩샤오핑은 “노간부들이 문혁 중에 한 발언은 본심에서 한 말과 행동이 아니기 때문에 삼종인이라고 할 수 없다”라고 발언하며, 새로운 갈등의 원인을 제공한다. 즉 문혁파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노동자가 주도한 조직에 대해서는 철저히 조사하고 탄압한 반면, 노간부나 문화 엘리트에 대해서는 대부분 복권이 이루어진다. 이렇듯 삼종인 정리는 당시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다는 것이었지만, 당권파의 자의적인 기준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조반에 가담했던 대부분의 노동자들에게는 당권파에 의한 일종의 정치적인 계급 보복이었다.
덧붙이는 말

장윤미 : 연세대 강사. ‘시장화 개혁 시기 중국의 노동 정치 ‘라는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고, 주로 중국의 정치 사회 분야를 연구하며 연구와 강의를 업으로 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