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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대한 우리의 편견 2

[경제 무식자들(3)] 욕망을 넘어설 디딤돌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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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한국을 대표하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이자 공황론 전문가인 김성구 한신대 교수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내리막길에서 직면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문제들이 어떤 맥락에 놓여 있는 것인지를 살펴보려 한다. 경제 유식자가 들으면 화끈거릴 만큼 초보적이고 유치한 질문들을 낯 두꺼운 어린 양이 되어 뻔뻔하게 해 볼 생각이다.


[지난 이야기]
사회주의 사회로 가면 자산 소유에 근거해 이윤을 착취하거나 이윤의 분배에 참여하는 계급이 없어져요. 처음에 혁명을 해서 재벌 부문이 사회화되면 재벌 계급이 일단 없어지고, 그 다음 단계인 사회주의로 들어서면 자본가 계급이 없어져요. 그럼 성과 보상의 원리만 남잖아요. 소유 계급, 자산 계급이 없어지니까 불로소득이 없어지는 거예요. 자본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가 진정으로 공정한 사회죠. 하지만 사회주의는 아직 미래 사회로의 이행이 완료된 게 아니기 때문에, 성과 보상의 원칙이 아직 남아 있거든요. 노동자들의 생산에 대한 기여의 차이, 거기에 따른 보수의 차이, 불평등, 이런 걸 용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공산주의적 인간이 아직 아닌데 보다 높은 노동 성과를 내고도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보수를 받는다면, 생산 활동에 주체적으로 참여해서 기여하려 하지 않겠죠. 이 사람들에게 생산의 기여를 끌어내려면 그런 인센티브나 차이를 줘야 해요. 그래서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차이가 아직 남아 있는 거죠. 사회주의란 결국 한편에서 대중의 자발성을 동원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물질적 자극을 통한 성과 경쟁을 도모한다는 모순적인 방식의 결합 속에서 생산력 일층의 발전과 완전한 계획을 도모하는 거죠. 물론 전자의 방식이 고양되고 후자의 방식은 약화, 소멸되는 과정을 통해 공산주의의 높은 단계로 이행합니다.
공산주의의 높은 단계에 이르면 노동의 의미가 크게 달라집니다. 생산력이 고도로 발전하고 모두를 위한 풍요로운 사회로 이행되면, 노동은 단지 생존 수단을 넘어 그 자체가 생활의 일차적인 욕구가 된다고 하죠. 이제 노동이 인간의 기본 욕구라는 말입니다. 그때는 사람들이 공산주의적 인간으로 성숙해서 사회의 계획이라든지 사회적 재생산의 여러 문제들을 다 이해하고 사회 운영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자발적으로 협력해 갈 수 있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은 더 일하고, 개인적인 이익이 아니라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일을 마다하지 않는 그런 사회가 됩니다.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나 이기심은 없앨 수 없잖아요. 그런데도 공산주의 사회가 제대로 작동할까요?

보통 자본주의 변호론자들이 사회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체제를 대비하면서, 자본주의는 이기심을 통해서 아주 이상적인 시장 경제가 달성되는 것처럼 얘기하고 사회주의 계획 경제는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을 부정하고 인위적으로 제도를 창출하려 한다고 비판합니다. 그래서 사회주의가 실패했다는 거죠. 사회주의가 물질적 자극, 노동에 따른 분배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는 건 지난 호에서 이미 말했던 거죠. 이런 주장은 기본적으로 사회주의 이론을 잘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무식해서 그런 거죠. 그럼 공산주의의 높은 단계에서는 인간이 욕망과 이기심을 넘어설 수 있는가, 이게 문제겠죠.
마르크스가 그린 공산주의는 지금으로서는 상상 속에 있지만요, 상당한 현실적 토대를 갖고 있어요. 사회주의 생산력이 한층 더 성장하고 모두를 위한 풍요가 보장되면, 그리고 인간이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노동 시간이 단축되고 생산 과정에서 해방되면, 풍요 속에서 여유 시간을 개개인의 인격 발전에 사용하면서 공산주의적 인간으로 성장합니다. 그러면 욕망이나 이기심이 자리 잡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이런 풍요롭고 자유로운 세계에서는 개인이 필요한 것을 다 분배받을 수 있기 때문이죠. 오늘날 자본주의에서의 인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유형의 인간이 될 겁니다.

그럼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 상정하는 인간은, 주류 경제학이 전제하는 ‘이기적 인간’, ‘욕망하는 인간’과 다른 거예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선 기본적으로 인간은 경제 관계, 생산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계급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합니다. 물론 개별 인간에 따른 차이도 존재하고, 또 생산관계와 계급 관계에 의해 인간이 규정된다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자립적인 정신세계의 작용에 따른 차이도 존재하겠죠.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물질적 토대가 규정한다는 입장이죠.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물질적 토대와 생산관계가 바뀌면 인간의 유형도 바뀔 거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욕망이 타고난 부분도 있을 테지만, 기본적으로는 대중을 풍요로부터 배제하는 결핍의 문제 때문에 생기는 거거든요. 또 생산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사회 제도나 사회의 운영 원리에 의해서 영향을 받습니다. 소유의 지배나 계급 지배를 지양해서 선진 자본주의같이 풍요로운 생산력을 국가가 대중을 위해서 사용하기 시작한다면, 인간의 욕망 문제가 많이 해결될 수 있어요.
저도 미국에 가 보지는 않았는데, 정말 풍요로운 사회라고 해요. 미국의 빈민층은 사는 게 그렇게 열악한데, 보통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 너무 많은 상품과 서비스가 흥청망청 넘쳐흐른대요. 피자 한 판, 콜라, 그런 것들을 조금 먹다 버리고, 가난한 사람들은 거기서 배제되고. 빈곤한 사람들의 욕망이 없을 수 없죠.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렇게 풍요로워도 그 풍요로운 사람들이 더 많은 부와 자산을 욕망하거든요. 인간의 본능이라기보다는 사회 제도의 영향이 더 크죠. 자본주의 시스템은 경쟁과 이윤 원리에 입각해 있고, 이 때문에 부의 증대와 집중을 추구하니까요. 그 시스템 속에서 사람들은 더 큰 부를 축적하려고 해요. 그게 마르크스가 얘기한 자본 축적의 기본 법칙이에요.

사회주의 시스템이 된다고 그런 욕망이 사라질까요?

그 욕망을 끊임없이 추구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 자본과 경쟁, 이런 것을 철폐하고 자본주의에서 발전된 높은 생산력을 국가가 집단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방식으로 사회 제도가 바뀐다면 어떨까요? 그럼 사람들이 그렇게 각박하게 살려고 하지 않아요. 국가가 교육도 시켜 주고 일자리도 다 마련해 줘서 먹고살 수 있고, 주택도 해결해 주고 노후도 보장해 주면, 사람들이 뭐 때문에 그렇게 더 많은 돈을 벌려고, 자기 욕망을 추구해 나가려고 아등바등하겠어요.
문제는 원초적인 본능이냐 인위적인 계획이냐가 아니라, 욕망의 문제들이 발생하는 사회 제도적인 토대를 바꿔 나가는 거예요. 그 위에서 생산력의 발전이 가져온 성과를 같이 향유하면, 미래 사회는 지금하고 정말 다른 사회가 될 수 있어요. 공산주의 사회라는 건 확실히 그런 모든 문제가 완전히 없어진 사회여서 유토피아적 측면이 있지만, 사실 그게 유토피아인지 아닌지는 모르죠. 다만 사람들의 의식이라든지 생활 태도, 인생관이라든지 가치관, 이런 게 전부 획기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본주의 사회에서조차도 사회 복지가 확립된 서방 국가들을 보면, 우리처럼 경쟁이 아주 심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자란 사람들하고 많이 달라요. 그런데 하물며 자본주의를 넘어서 공산주의 사회에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바뀌겠어요.

인간이 본성에 좌우되기보다 생산력의 토대가 확보되면 바뀔 수 있다는 건가요?

생산관계와 생산력이죠. 인간의 욕망이 이윤 추구로 나타나는 건 자본주의하에서입니다. 인간의 본능, 권력 추구, 이런 건 봉건 사회에도 있었지만, 거기는 자본주의 사회하고는 조건이 달라요. 영주의 수탈이 있지만, 공동체에서는 경쟁보다는 연대와 부조가 지배했어요. 다만 생산력이 낮은 상태라서 그 사회에서는 결핍의 문제들이 부각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력이 더 발전하면서도 자본의 이윤 원리가 전 사회를 지배하니까 욕망을 극단으로 추구하게 돼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풍요로워지면서도 욕망의 지배를 당하는 거죠. 대중은 배제되는 측면이 있고요. 여기도 결핍의 문제가 있는 거고. 그러면서 또 경쟁의 원리는 더 강화되고요. 인간의 욕망이나 본능을 부정하는 게 아니에요. 다만 바꿔 나갈 수 있는 여지가 크고, 설령 남아 있더라도 공산주의 사회가 되면 그렇게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을 거라는 겁니다.

그래도 마르크스주의에서 언급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든가, ‘독재’라는 말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들어요. 박근혜 정부도 독재라고 비판받잖아요. 독재는 나쁜 거 아닌가요?

프로레타리아 독재와 박근혜 독재를 동일 선상에서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박근혜 독재는 부르주아 독재죠. 야권에서는 파시즘이란 의미로 박근혜 독재를 운운하는데, 그건 잘못된 주장입니다. 박근혜 정권은 파시즘이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입각해 있습니다. 하지만 파시즘이든 부르주아 민주주의든 모두 부르주아 독재 유형입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든 부르주아 독재든 계급 독재를 말하는 거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지배하는 기간이 반드시 필요해요. 혁명 후 노동자 계급이 권력을 장악해도 자본가 세력이 물질적인 토대를 많이 가지고 있거든요. 사회주의로의 이행기나 사회주의 사회의 초기 국면이라는 건 노동자 계급이 국가 부문과 재벌 부문을 장악한 것밖에 아니거든요. 광범위하게 중소 부르주아들도 남아 있는 사회고, 러시아 같은 경우도 소농 계층이 인구의 다수였죠. 그러니까 시장 경제와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토대들이 광범하게 있는 상태에서 사회주의 경제 부문을 장악해도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기 사회는 굉장히 취약한 체제라고 볼 수 있어요. 이 체제에서 국가 부문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사회로의 이행을 준비하는 겁니다. 그 단계에서는 일단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소자본가들, 자본 관계를 지양해야 해요. 또 소농들은 협동조합으로 전환시켜서 집단화함으로써 집단적인 소유 형태로 만들어 나가야 하는 거죠.

소농을 협동농장으로 전환시키면 반발하지 않을까요?

반발이 심할 거예요. 오히려 재벌을 장악하는 건 간단한 일이죠. 독점 재벌은 대중의 지탄과 원성을 받던 수탈, 착취 계급들이니까요. 또 재벌은 인구 구성상 얼마 되지도 않잖아요. 이건 간단하게 할 수 있는데, 소자본가, 특히 소농 계급은 대중이거든요. 이들은 사회주의의 주체로서 성장해야 할 그런 대상이에요. 여기서 자발성의 동원과 물질적 자극이나 성과 경쟁을 결합해야 하는 사회주의의 어려운 과제가 제기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단계에서는 상품 경제와 자본 관계의 온존에서 비롯되는 자본의 저항도 위험한 요소가 됩니다. 이런 상태하에서 사회주의적 경제 토대를 창출하려면, 그 반발도 진압을 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사회주의 권력은 유지가 안 돼요. 이행기에 사회주의의 물질적 토대를 창출하는 것도 필요하고, 이를 위해 정치적인 지배권을 장악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지요.
사회주의 단계가 확립되면 이제 자본가 계급이 지양되지만, 이 시기도 여전히 공산주의로의 이행기입니다. 상품과 화폐 범주 속에 자본 관계의 흔적이 남아 있을 뿐 아니라 구 소련의 붕괴나 현재 중국 사회주의의 자본주의로의 역이행에서 보는 바와 같이 새로운 자본 관계가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사회주의에서도 자본 관계, 계급 투쟁의 문제가 남아 있는 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도 여전히 불가피한 거죠. 공산주의의 높은 단계에 이르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도 소멸됩니다.

[오늘의 경제 무식자 공부 요약]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인간의 욕망을 부정하는 건가
아니다. 다만 욕망을 끊임없이 추구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 자본과 경쟁, 이런 것을 철폐하고 자본주의에서 발전된 높은 생산력을 국가가 집단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방식으로 사회 제도가 바뀐다면 그런 본능을 바꿔 나갈 수 있는 여지가 크고, 설령 남아 있더라도 공산주의 사회가 되면 그렇게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을 거라고 보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꼭 필요한가
혁명 후 노동자 계급이 권력을 장악했어도 자본가 세력이 물질적인 토대를 많이 가지고 있다. 자본의 저항 같은 위험한 요소 아래서 사회 경제적 경제 토대를 창출하려면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지배하는 기간이 필요하다.

[워커스 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