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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조운동 정신, 어떻게 되살릴까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민주노조운동의 역사와 현재’를 주제로 포럼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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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파업연대기금이 24일 저녁 ‘민주노조운동 28년과 민주노총의 역사, 그리고 현재’란 주제로 12차 사파포럼을 열었다. 12차 사파포럼은 이날 저녁 6시께 민주노총 13층 대회의실에서 양규헌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마지막 위원장과 1995년 민주노총 준비위원회 집행위원장을 지낸 허영구 민주노총 전 부위원장을 토론 패널로 초청했다.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이 24일 저녁 ‘민주노조운동 28년과 민주노총의 역사, 그리고 현재’란 주제로 12차 사파포럼을 열었다.

사회를 맡은 사회적파업연대기금 권영숙 대표는 두 패널에게 노동자 대표성과 내부 운영의 민주성이 위협받고 있는 오늘날 노조운동의 위기론에 대해 입장을 물었다. 이에 허영구 전 부위원장은 “한국의 노자관계에서 자본은 매우 계급적으로 움직이는데 노동은 계급적 연대도 안 되고 방향도 상실해 실리주의에 빠져 버렸다”고 밝혔다. 양규헌 전 위원장은 “매시기마다 진보적 지식인들이 노동운동의 위기론을 들고 나왔는데, 그분들의 결론은 대부분 전투적 조합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귀결돼 투쟁을 억제하는 역할을 해왔다”고 전제한 뒤 노동운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자주성과 민주성, 투쟁성, 연대성, 변혁지향성을 갖춘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을 살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권영숙 대표는 “지금의 독립노조 운동은 민주노조의 최소한의 물질적 토대마저 붕괴된 상태”라며 “민주노조운동이 자신의 역사마저 잃어버린 채 몰이념의 혼란 속에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토론은 이날 주제에 맞게 87년 시기로 이어졌다. 허영구 전 부위원장은 “87년 이후 전노협을 거쳐 민주노총 초기까지 노동운동의 고양기였지만 내부에선 이미 실리주의가 돋아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양규헌 전 위원장은 “87년 이전1980년 한국노총 점거투쟁과 사북투쟁, 거슬러 올라가면 70년대부터 민주노조운동은 싹트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권영숙 대표는 “그동안 진보진영은 민주화 요구로 대체로 수렴됐지만 노동자들은 6월항쟁의 자유주의적 열린 공간을 틈타 그해 7,8,9월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한국 사회에 노동자를 호명해내면서 자유주의를 넘어선 ‘계급’이란 이름으로 터져 나왔다”고 말했다. 권 대표는 “자유주의 민주화 운동인 6월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은 시기를 달리해 터져 나오면서 분명히 계급적 운동을 지향했는데 노동운동 진영은 그 역사적 의미를 정확히 깨닫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권영숙 대표는 “전노협은 이런 계급적 노동운동에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며 두 패널에게 전노협의 역할과 의미를 물었다. 양규헌 전 위원장은 “지역의 다양한 노동자 투쟁이 모여서 전노협을 만들었다”며 “전노협 활동에서 지역별 전노협 선봉대의 활동이 매우 주효했다”고 말했다. 양 전 위원장은 “전노협은 자기 소속 노조가 아닌 KBS노조나 현대중공업노조가 파업으로 탄압받을 때 연대파업했다”며 “전노협은 이들 노조에 대한 탄압이 곧 노동계급 탄압이라고 보고 적극 연대하는 비타협적 투쟁노선을 견지했다”고 밝혔다. 허영구 전 부위원장은 “전노협과 같은 시기에 제조업을 제외한 대부분의 노조는 ‘업종회의’로 묶여 있었다”며 “전노협이 최전선에서 싸웠기 때문에 사무직과 공공부문 노조 등을 묶은 업종회의는 그나마 조직을 온전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업종회의는 출판노련 등 극히 일부분을 제외한 대부분이 전노협에 가입하지 않았다. 권 대표는 “전노협과 업종회의, 대기업노조의 삼분할은 당시 민주노조운동의 성과이면서 동시에 한계였다”고 지적했다.

전노협은 기업별 노조체제였지만 기업별 조합주의에 젖어 있진 않았고 총자본에 맞서는 총노동 전략으로 선도투쟁과 노조탄압에 적극 연대했다. 양규헌 전 위원장은 전노협 가입 노조가 적었던 이유를 소개하면서 “전노협 탄압을 위해 정부는 3자 개입 금지와 노조 회계에 대한 업무조사라는 악법 조항을 이용했기에 전노협 가입 자체가 특단의 각오 없인 쉽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권영숙 대표는 “당시 민주노조가 비타협적 투쟁을 했지만 내부에서 지형과 입장이 다른 대기업의 실리주의가 싹트는 등 대오가 조금씩 흩트려지고 있었다”며 “노동운동 진영은 전노협의 한계를 산별노조를 통한 전국적 노총 건설로 수렴됐다”고 지적했다.

토론은 산별노조를 등에 업고 건설한 민주노총의 조직적 명분과 그 실천 정도로 옮겨갔다. 허영구 전 부위원장은 “전노협 말기에 전노협 내부가 많은 노선으로 갈라져 있었다. 이 시기에 ‘민주노조 총단결’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민주노총을 건설했다”고 말했다. 허 전 부위원장은 “지금 와서 보면 민주노총 조합원 80% 이상이 산별노조로 모였는데 투쟁은 훨씬 떨어져 사실상 무늬만 산별노조가 됐다”며 계급적 연대의 약화를 지적했다. 결국 ‘민주노총 조기 건설’과 ‘산별노조 건설’ 전략은 현실에서 실패했다. 허 전 부위원장은 “민주노총은 당시 무너져가던 독일의 산별노조를 지나치게 신격화한 점도 있다”고 설명했다.

민주노총 건설 과정에 대해 양규헌 전 위원장은 “민주노총은 ‘건설’된 게 아니라 전노협과 업종회의, 대기업노조 등 있던 노조를 ‘재편’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무리한 대산별노조 건설도 보였다”고 지적했다. 양 전 위원장은 “산별노조는 교섭단위를 일치시킬 전망이 있어야 하는데 특수고용직과 정규직 대공장 노조가 하나의 산별노조로 묶인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허영구 전 부위원장은 “민주노총 초기까지 총파업 땐 실제 파업하는 노조를 중심으로 전략과 전술을 짰는데, 지금은 산별대표자회의가 중심이 돼 논의한다”고 지적했다. 허 전 부위원장은 “연대만을 고민하는 산별대표자가 주요한 결정을 하기 때문에 종종 중집과 대의원대회 결정이 뒤집어 지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96-97년 노개투 총파업 이후 민주노총에 대해 허영구 전 부위원장은 “96-97년 총파업 당시 민주노총 집행부는 신자유주의에 대응하는 투쟁이라고 미처 깨닫진 못했다”며 “그 파업 이후 민주노조 운동이 계속 하강국면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광범위하게 늘어났는데 노동운동 진영은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고, 노동자계급 내부의 격차도 점점 커져 갔다. 양규헌 전 위원장은 노개투 총파업 이후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었다. 양 전 위원장은 “투쟁이 사라지고 2000년대 들어 기간제법 입법 때 금속노조 등 조직 노동자들이 큰 감흥이 없었다”며 “진보정당은 기간제법 입법 저지를 위한 천막농성장에 나타나 보좌관을 통해 통닭을 전해주는 수준에 그쳤다”며 잘못된 정치세력화의 한 단면을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