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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의 여성들

[러시아혁명 100주년] 자코뱅 온라인시리즈(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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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은 러시아혁명을 점화했을 뿐 아니라, 혁명을 전진시킨 원동력이었다.

1917년 2월 23일(구력) 세계 여성의 날 네브스키를 가득 매운 여성들이 전시 배급량을 올려달라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출처] 상트 페테르부르크 중앙 영화·사진·음성기록 아카이브

1917년 세계 여성의 날, 페트로그라드 비보르그 지구의 여성 섬유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다. 공장을 떠난 수백 명의 여성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공장으로 돌아다니며 다른 노동자들도 파업에 동참하기를 호소했고 경찰ㆍ군대와 폭력적으로 충돌하기도 했다.

불결하고 건강에 해로운 노동 환경에서 하루에 12~13시간을 일하던 저임금 미숙련 여성 노동자들은 연대를 외치며 남성들도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이 여성들이 동참하라고 요구한 남성들은 특히 공업과 금속 공장에서 일하는, 가장 정치적으로 의식화됐고 그 도시에서 가장 사회적 영향력이 있었던 숙련노동자들이었다. 여성들은 공장 유리창에 막대기와 돌, 눈뭉치를 던졌고, 전쟁을 끝내고 전선에 나간 남자들을 돌려보낼 것을 요구하며 작업장들로 밀고 들어갔다.

2월혁명을 불붙인 여성 노동자들

동시대의 많은 논평가들과 역사가들에 따르면, 빵을 위해 폭동을 일으킨 이 여성들–순수하게 경제적 요구를 좇으며 예로부터 전해온 ‘원시적’ 방법으로 투쟁한, 이론적으로 준비됐다기보다는 감정에 의해 움직인–은 차르 체제를 쓸어버린 폭풍을 우연하게 촉발했다고 한다. 이들은 나중에 남성 노동자 군대와 남성 중심적인 정당들의 뒤로 사라졌다.

하지만 2월 파업은 시작할 때부터 전쟁에 반대하는 정치적 구호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여성들은 그들의 대담함, 결단력, 그리고 전략들을 통해 그들이 느낀 문제의식의 뿌리와 노동자들이 단결해야 할 필요성을, 또한 혁명을 수호하려면 차르 국가를 지키려는 군인들이 혁명을 지지하도록 설득해야 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트로츠키는 훗날 이렇게 기록했다.

여성 노동자들은 노동자들 그리고 군인들과의 관계 내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들은 남성들보다 더 대담하게 저지선 위쪽으로 올라가 소총을 잡고, 간청하고, 거의 명령했다. “총검을 내리고 우리와 함께합시다.” 군인들은 흥분했고, 부끄러워했고, 당황에 찬 눈빛들을 교환했으며, 망설였다; 누군가 나서서 마음을 정했고, 총검들은 전진하는 군중들의 어깨 위쪽으로 다소곳하게 전달되었다.

2월 23일이 끝나갈 때, 전차 차고를 경비하고 있던 군인들은 합류하라는 여성 전차 노동자들에게 설득됐고 전차는 경찰과 대치하는 바리케이드로 사용되었다. 군인들을 설득하는 것은 군대가 전쟁에 대해서 지는 부담이 더 커져서도, 군대가 투쟁의 ‘자발성’에 전염돼서도 아니었다. 여성 섬유 노동자들은 1914년부터 주로 소작농으로 구성돼 있었던 많은 페트로그라드 군인들과 연결돼 있었다. 막사의 남성들과 공장의 여성들 중에서 같은 지역에서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은 서로 대화하며 관계를 형성했다. 이런 관계들을 통해 노동자와 군인 사이에 그어진 경계가 흐려졌고, 여성 노동자들은 무장 세력의 지지를 얻어야 할 필요성을 명확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여성 노동자들은 차르 체제의 붕괴라는 결과로 끝난 2월 혁명의 최전선에 단호하게 서있었다. 그들은 단지 혁명을 점화시키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혁명을 전진시킨 동력이었다. 많은 남성 노동자들과 혁명 세력이 처음에는 염려했지만 말이다.

2월 혁명은 대개 ‘자발적’이었다고 묘사되며, 어떤 점에서 그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혁명 세력에 의해서 계획되거나 실행되지 않았다. 하지만 자발적이었다고 해서 정치적 의식이 부족했다는 말은 아니다. 노동자로서, 또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몇 시간 동안 줄을 서서 기다려야만 하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페트로그라드의 공장들을 휩쓸어버린 이 여성들의 경험은 빵이라는 ‘경제적’ 요구와 전쟁을 끝내라는 정치적 요구 사이의 구분을 무너뜨렸다. 물질적 조건들이 배고픔과 빈곤에 대한 분노를, 그 분노를 촉발한 지점으로 정확히 향하도록 이끌었다. 전쟁 그리고 전쟁을 실행하는 정치인들에게로 말이다. 이런 요구들은 엄청난 규모의 정치적 변화로만 충족될 수 있었다

여기에 덧붙여, 여성 볼셰비키들도 이 파업의 중심에 있었다. 당시 볼셰비키 내부의 남성들은 여성들을 조직하는 일을 차르 체제와 싸우는 데 방해가 되는 일, 또는 계급투쟁과 거리가 먼 중산층 페미니스트들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일 정도로 치부하는 태도를 취하곤 했다. 여성 볼셰비키들은 남성들의 이런 부정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저숙련 여성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해 수년간 애썼다.

혁명 운동에 몸담고 있었던 많은 남성들은 세계 여성의 날 시위를 미숙하다고 보고 있었고, 숙련된 노동자들이 결정적인 행동을 취하기 전까지 여성 노동자들은 행동을 자제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전쟁과 인플레이션에 대해 토론하기 위해 비보르그 지구에서 만날 것을 주장한 사람들은 소수의 여성 당원들과 세계 여성의 날에 전쟁 반대 시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 여성 활동가들이었다. 이들 중 하나는 볼셰비키이자 2월 혁명 이후에 군인아내연맹을 시작한 공장 노동자, 아나스타샤 데비앗키나였다.

혁명의 역사에서 지워진 존재

1917년 2월 이후 혁명의 전개 과정에 대한 해설들에서는 여성들의 역할이 사라지곤 했다. 사라지지 않은 여성들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나데즈다 크룹스카야, 이네사 아르망 같은 탁월한 여성 혁명가 몇 명뿐이었다. 이 여성들에 대한 설명에서도, 아내나 연인으로서의 사생활이 종종 이들이 해낸 실천 활동이나 이론적 기여만큼의 비중으로 이야기되곤 했다.

여성들은 차르 체제의 잔재로부터 출현한 행정부에는 거의 들어가지 못했다. 몇몇은 제헌 의회나 소비에트 의원으로, 마을 의회 의원으로 선출됐다. 공장위원회 구성을 위한 선거는 남성들이 주도했고, 심지어 여성 노동자들이 다수인 산업에서도 남성들이 대표를 맡곤 했다. 이 같은 일들은 이중적이며 서로 연결된 이유들 때문에 일어났다. 여성들은 궁핍한 환경 속에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임무를 떠안고 있었다. 높은 수준의 정치활동을 하기 위해 앞장설 수 있을 정도로 교육받거나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한 이 여성들은 정치적 자신감 역시도 부족했다. 몇 세기 동안 러시아의 일하는 여성들이 살아온 방식과 그들이 직면한 억압의 물질적 현실은 이 여성 노동자들이 실제로 정치에 관여하면서 자신의 정치의식을 의문의 여지 없이 발전시킬 수 있는 조건이 됐다.

1917년 이전의 러시아는 가난한 농민이 대부분인 사회였다. 차르의 전제 권력은 교회에 의해 강력하게 지지받고 보호받았으며 가족 제도에 반영됐다. 결혼과 이혼은 종교적 통제 아래에 있었다. 여성들은 법적으로 종속된 상태였고, 인간 이하의 재산 취급을 받았다. 러시아의 흔한 속담에 담긴 정서는 이렇다. “나는 두 사람을 본 줄 알았는데 (두 ‘사람’이 아니라) 한 남자와 그의 아내였다.”

가정 내에서는 남성 권력이 모든 것을 결정했고, 여성들은 아버지에서 남편으로 이어지는 잔혹한 상황 속에서 수동적일 것을 요구받았으며 러시아의 가족제도 안에서 용인되는 폭력에 자주 노출되었다. 여성 농민과 노동자들은 극도로 힘든, 살인적인 수준의 노동을 해야만 했다. 이 노동에는 밭과 공장에서 하는 노동뿐만 아니라 출산 자체의 위험성과 영아사망률이 높으며 피임법도 존재하지 않았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상당한 수준의 아동 돌봄과 집안일까지 포함됐다.

하지만 1917년 일어난 여성들의 정치적 개입은 허공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러시아는 모순 그 자체였다.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이 심각한 빈곤·억압·폭정을 견뎌내고 있었던 반면, 1905년까지 10년 동안 러시아 국가경제는 급성장했다. 엄청난 숫자의 현대적 공장들이 무기와 옷을 생산했고 빠르게 성장하는 지역들이 철도로 연결됐으며 유럽발 투자와 기술들이 철강과 석유 생산량을 크게 증가시켰다.

이 극적인 경제적 변화는 1차 세계대전 이전 몇 년 동안 일어난 큰 규모의 사회적 전환의 동력이 됐다. 점점 더 많은 빈농 여성들이 도시의 공장으로 이동했다. 이 여성들은 가난 때문에 이동하기도 했지만, 이 이동은 기계를 도입해 저숙련 일자리를 양산하고자 했던 ‘순종적인’ 노동자를 선호하는 자본가들의 독려 때문이기도 했다. 이는 린넨·실크·면·울·도자기·종이 생산에 있어서 여성 노동이 크게 성장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여성들은 러일전쟁 징병에 반대하는 시위, 1896년 섬유공장 파업, 그리고 결정적으로 1905년 혁명에 관여하고 있었다. 1905년 혁명 동안에 섬유·담배·설탕 공장의 저숙련 여성 노동자들은 가사·세탁 노동자들과 함께 파업했고 거대한 혁명의 일부로서 그들만의 노동조합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1차 세계대전의 여파는 여성의 경제적·정치적인 비중을 증가시키는 데 결정적이었다. 전쟁은 가족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했고 여성들의 삶을 뒤집어 놓았다. 수백만의 남성들이 전선에 나갔고 부상당하거나 죽어서 없는 상태였으며, 이런 상황에서 여성들은 스스로 땅을 일궈야 했고 가정을 책임지는 도시 노동력으로 유입됐다. 1914년 여성들은 전체 노동력의 26.6%를 차지했으나 1917년에는 거의 절반(43.4%)에 달했다. 심지어 숙련 분야에서도, 여성들의 참여가 급증했다. 1914년 여성들은 전체 금속 노동자 중 겨우 3%를 점하고 있었다. 1917년 그 숫자는 18%까지 커졌다.

2월혁명 이후 이중권력 상황에서도, 여성들의 저항은 사라지지 않았고, 노동자들의 지지가 임시정부에서 소비에트로, 소비에트 내부에서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온건 사회주의자 지도부로부터 9월에는 볼셰비키로 변화하는 과정의 일부였다.

차르 체제가 붕괴하면 그들의 삶이 나아질 것이라는 노동계급 여성과 남성들의 기대는 무너졌다. 임시정부와 소비에트 지도부가 전쟁을 지속했기 때문이었다. 5월, 반전 시위대가 첫 번째 임시정부를 해체시켰지만 맨셰비키·사회혁명당 지도부는 자유주의자들과 연합정부를 꾸려 전쟁을 계속 이어갔다. 노동자들의 환멸은 파업들로 이어졌고 다시 한 번 여성들이 이 파업들을 주도했다. 4만 명 규모의 세탁노동조합 여성들이 볼셰비키 소피아 곤차스카야1)의 지도를 따라더 많은 급여와 하루 8시간 노동, 더 나은 노동조건–작업장 위생 개선, 모성 보호(여성 노동자들이 임신 사실을 숨기다가 공장 바닥에서 아이를 낳는 일이 흔했다), 작업장 내 성적 괴롭힘 금지-을 요구하며 파업했다. 역사학자 제인 맥더미드2)와 안나 힐리어3)는 이렇게 묘사했다:

곤차스카야는 노동조합의 다른 여성활동가들과 함께 여성 노동자들에게 파업에 동참할 것을 설득하며 이 세탁공장에서 저 세탁공장으로 움직였다. 그들은 오븐에 물을 끼얹어 꺼뜨리기 위해 양동이를 찬물로 채우기도 했다. 한 세탁공장에서, 공장주가 곤차스카야를 쇠지렛대로 공격했다; 그녀는 뒤에서 붙들어준 세탁부 덕분에 살 수 있었다.

8월 코르닐로프 장군의 혁명 분쇄 시도에 직면한 여성들은 페트로그라드 방어를 위한 바리케이드를 치고 의료지원활동을 조직했다. 10월 볼셰비키 당의 여성들은 의료지원을 맡았고, 페트로그라드 봉기를 조직하는 데 있어 중요한 다른 지역들과의 연락을 담당했다. 그리고 여성들은 [봉기 때 군사 공격을 책임졌던] 적위대 대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맥더미드와 힐리어는 10월 볼셰비키 여성의 개입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전차 운전사인 A. E. 로디오노바는 임시정부가 7월의 나날들 이후 노동자들을 무장 해제시키려 했을 때 자신의 차고에 소총 42정 등의 무기들을 숨겨두었다. 10월 그녀는 [봉기 때] 겨울궁전 공격을 위해 차고에 남아있는 전차 두 대를 기관총으로 무장해 확보해야 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녀는 [봉기를 통한 볼셰비키의] 권력 획득을 위해 적위대가 도시 전역의 요지에 배치될 수 있게끔 10월 25일 밤부터 10월 26일까지 전차 운영을 장악해야만 했다.

혁명의 궤적은 전쟁을 그들 자신이 겪는 고통의 원인으로 인식하고 해가 지날수록 평화를 강하게 주장했던 노동계급 여성들과 전쟁을 계속해서 지지했던 페미니스트들 사이의 차이를 크게 벌려놓았다. 사회 개혁을 위한 법적 권리와 교육에서의 평등을 주장한 대부분의 중산층 자유주의자 페미니스트들에게 그 목표는 자신들이 새로운 정부에 충성스럽고 전쟁에 총력을 기울였다는 점을 증명함으로써 얻어질 것이었다. 애국주의를 증명하는 것은 협상에서 유리한 지위를 점하기 위한 일부였다.

삶의 조건이 일깨운 혁명 정치

2월혁명은 페미니스트들을 보통선거권이라는 새로운 구호로 이끌었다. 보통선거권은 그것이 부여됐던 7월에는 중요한 진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궁핍과 장시간의 노동 속에 가족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성 대부분의 삶은 선거권이 주어졌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콜론타이는 1908년 이렇게 썼다:

페미니스트들의 요구가 겉보기에 얼마나 급진적이든, 페미니스트들이 그들의 계급적 위치 때문에 여성해방이 이뤄지지 않은 현재 사회의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 싸울 수 없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대부분의 노동계급 여성들과 농민 여성들에게, 억압과 평등에 대한 의문들은 추상적인 차원으로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남편과 아이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싸움의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떠올랐다. 명백하게 정치적이며 더 활동적인 사람들은 대개 볼셰비키 당원이었고, 그들은 전쟁과 정치인들에 반대하는 시위에서, 빈곤·전쟁·지주에 초점을 맞춘 행동에서 한 몸처럼 움직였다. 로버트 서비스가 논증했다.

늦가을,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붕괴가 정점을 찍었을 때, 볼셰비키의 정치적 기획은 노동자 집단과 병사들 그리고 농민들에게 더 매력적인 것으로 입증됐다. 그렇지 않았다면 10월혁명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여성 노동자들, 농민들, 병사의 아내들은 그들의 남성 파트너와 함께 이것들을 전적으로 경험했다. 여성이 대부분이었던 페트로그라드 저숙련 노동자들의 집단적 지지가 없었다면 10월의 반란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볼셰비키를 향한 지지는 맹목적이지 않았다. 그것은 트로츠키의 말을 옮기자면 여성과 남성 노동자들 수백만 명이 이룬 ‘신중하고도 고통스러운 의식의 발전’ 결과였다. 10월까지 다른 시도들도 있었다. 임시정부와 맨셰비키는 그들을 배신했고, 시위는 더 나은 삶을 향한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제한적 성과나 탄압으로 이어졌으며, 결정적으로 코르닐로프의 쿠데타 시도는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명확하게 했다. 한 걸음 더 전진하거나, 박살나거나. 한 노동자는 그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볼셰비키들은 언제나 ‘당신들을 설득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삶 자체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 볼셰비키들은 승리했다. 왜냐면 삶이 그들의 전략이 옳았음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볼셰비키가 여성들의 문제의식을 그들이 해온 만큼 진지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여성들이 심각하게 과소대표 됐다 하더라도, 여성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교육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볼셰비키가 다른 사회주의 정당들보다 여성 노동자들과 연결되기 위해서 더 많은 것들을 했다는 사실은 여성 권리에 더 많이 헌신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맨셰비키와 볼셰비키는 둘다 노동계급의 일부로서 여성들과 연관맺어야 할 필요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볼셰비키가 정부와 전쟁에 반대하는 계급적 행동에 기반한 전략으로 여성과 남성 사이의 평등을 위한 싸움을 통합시킬 수 있었던 반면, 전쟁을 지속하고 특권 그룹과 고용주들과 거래하는 일에 연루된 다른 정당들은 여성의 삶을 억압하는 물질적 조건에 대한 구체적 대안 없이 여성들의 파업을 보도하거나 여성의 정치적 권리에 대해 말하는 일 이상을 할 수 없었다.

볼셰비키, 여성 활동가들에게 배우다

볼셰비키는 여성들의 조직화와 정치화를 위해 점점 더 많이 나섰다. 이들은 2월의 폭발적 시작으로부터, 또 볼셰비키 여성 당원들의 꿋꿋함으로부터 배웠다.

콜론타이, 크룹스카야, 아르망, 콘코르디아 사모일로바4), 베라 슬루츠카야5)와 같은 볼셰비키를이끄는 여성들은 볼셰비키가 여성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정치적으로 교육하는 데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다른 당원들과 길게 논쟁했다. 그들은 남성 동지들에게 저숙련 여성 노동자들이 중심이 될 수 있으며 수동적이고 보수적인 혁명의 방해물이 아니라는 점을 확신시키기 위해 싸웠다. 1914년 처음 발행되고 1917년 5월 재발간된 볼셰비키 신문 라보트니차(Rabotnitsa·여성 노동자)에는 탁아소, 놀이방, 여성들을 위한 작업장 보호 조치에 대한 기사들이 실렸고 평등에 대한 요구와 “여성 문제”가 모든 노동자들에 의해 지지받아야 한다는 점을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여성 노동자들이 2월에 한 역할과 페트로그라드 노동계급의 일부로서 그들의 지속되는 중요성이 볼셰비키 남성들로 하여금 여성 문제에 집중하는 것은 페미니즘이 활동할 영역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혁명은 숙련도가 높고 가장 정치적으로 의식화된 (남성) 노동자들이 주도해야 한다는 관점을 수정하도록 했다. 물론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4월 콜론타이가 당 내부에 여성 부서가 있어야 한다고 제안했을 때, 레닌이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심각하게 고립됐다. 레닌의 4월테제 역시도 볼셰비키 지도부에게서 많은 지지를 받고 있지는 않았다. 콜론타이 역시 중앙위원회에서 레닌의 유일한 지지자였다.

그러나 그 후 몇 달이 지나 소비에트의 힘으로 혁명을 이끌어야 한다는 레닌의 주장과 혁명의 동역학 속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매우 중요하며 그들이 혁명을 전진시킬 수 있다는 콜론타이의 주장 모두가 옳다는 점이 입증됐다. 라보트니차 이외의 볼셰비키 신문들도 심각한 성차별적 태도들이 계급 단결을 위험에 빠뜨린다는 점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또한 당 언론들은 당이 공장위원회에서 여성들이 대표로 선출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며, 여성 노동자들을 위험요소로 간주하는 남성들의 태도에 도전해 남성들이 여성에게 투표하도록 – 특히 최근 떠오르는 산업 분야에서 – 설득해야 하고, 동료 노동자·대표자·동지로서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6주 뒤 10월혁명 때, 결혼은 시민 등록으로 대체됐고 이혼이 가능해졌다. 이런 조치들은 1년 뒤 여성을 법 앞에 동등한 주체로 세운 가족법에 담겼다. 종교적 통제는 폐지됐고, 수세기 동안 제도화된 억압들은 단박에 제거됐다. 이혼은 별도의 이유 없이도 일방의 요구에 의해 가능해졌다. 여성들은 자신의 돈에 대한 권리를 갖게 됐고 양 파트너 중 누구도 서로의 재산에 관여할 수 없게 됐다. 불륜 개념은 뿌리 뽑혔다. 여성이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면, 그녀의 모든 이전의 성적 파트너들이 아이에게 집단적 책임을 지게 됐다. 1920년 러시아는 여성의 요구에 의한 임신 중절을 합법화한 최초의 나라가 됐다.

1917년 혁명은 여성들에 의해 시작됐고 그 형태를 잡아갔다. 혁명 후 몇 년 동안 여성을 재산으로, 후방으로, 열등하고 수동적인 존재로, 보수적이고 자신감이 없으며 약하다고 생각해 온 많은 오래된 관념들이 바로 이 여성들의 정치적 결단과 행동에 의해 도전받았다.

하지만 러시아혁명은 남성 지배를 없애지도 여성을 해방시키지도 않았다. 내전으로 인한 심각한 궁핍과 지속적으로 타락한 소비에트 정부는 여성 해방을 불가능하게 했다. 불평등은 계속 남았다. 극소수의 여성만이 정부 당국의 지위를 점했고, 아주 적은 숫자의 여성들이 행정부에 선거로 임명됐으며, 성차별적 관념들은 10월에 뒤이은 심각한 역경을 거치는 동안 절대로 사라질 수 없었다.

혁명 기간 동안 여성들의 참여와 기여가 남성들과 동등하거나 특출나게 높았던 것은 아니지만, 여성들은 자신들이 놓인 삶의 조건 안에서 저항했고 혁명 과정을 만들어 갔다. 맥더미드와 힐리어가 말한 것처럼 말이다.

성별 분업은 실제로 계속 남았다. 우리는 여성이 남성 지배에 도전하는 데 실패했다고 결론내리기보다, 그들이 전통적인 분위기 안에서 어떻게 움직였는지, 또 그것이 혁명의 과정에서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고려할 수 있다.

여성들은 1917년 혁명에 필요불가결한 존재였으며, 남성들과 나란히 역사를 만들었다. 수동적 관중이나 정치에 무관심한 하찮은 사람들이 아니라 용감한 참가자들로서 말이다. 여성들의 참여 는 그 자체로 강고한 억압을 향한 거부를 보여주는, 의미 있는 일이었다. 여성의 눈을 통해 혁명을 보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가장 변혁적인 역사의 순간에도 여성의 삶에는 무엇이 남는지 더 풍부하게 해석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원문] https://www.jacobinmag.com/2017/05/women-workers-strike-russian-revolution-bolshevik-party-feminism
[저자] 메건 트루델 |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에 대해서 광범위한 저술을 했고, 지금은 1919년 이탈리아를 연구하고 있다.
[옮긴이] 이규리 | 대학생이고 페미니스트이다.


[옮긴이 주]
1) 1889년 태어나 1905년 혁명 때 오데사에서 활약했다. 망명 중인 1911년 미국에서 러시아사민당에 가입해 1917년 러시아로 돌아와 볼셰비키 활동에 참여했다. 1917년 10월혁명 후 내전 시기에는 우랄 지방에서 적군의 정치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73년 삶을 마쳤다.
2) 사우스햄프턴대학의 역사학 명예교수다. 19세기와 20세기의 영국ㆍ러시아 역사, 특히 젠더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안나 힐리어와 함께 '혁명의 산파: 1917년 여성 볼셰비키와 여성노동자들(Midwives of Revolution:Female Bolsheviks Women Workers In 1917)' '1880~1930 러시아에서의 여성과 노동(Women and Work in Russia, 1880~1930)'을 썼다.
3) 사우스햄프턴대학에서 제인 맥더미드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러시아 출생으로 현재는 영국에 거주하고 있다. 맥더미드와 함께 여러 책을 썼다.
4) 1876년 종교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르쿠츠크와 시베리아에서 사제로 있었다. 대학생이던 1897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처음으로 시위에 참여했다. 결국 그녀는 1901년 대학에서 쫓겨나 몇 달간 수감생활을 했다. 마르크스주의 공부를 위해 파리로 떠난 그녀는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당 볼셰비키에 가입한다. 1912년에는 ‘프라우다’의 편집을 맡기도 했다. 1902년부터 1913년까지 4번 체포된 경험이 있다. 1918년 11월 제1회 전러시아여성회의가 열렸을 때는 이네사 아르망,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클라비디아 니콜라에바와 함께 의장단석에 앉았다. 1921년 콜레라로 삶을 마감한 그녀는 볼셰비키에 대한 가득찬 신념으로 한 때 ‘나타샤 볼셰비코바’라는 가명을 쓰기도 했다.
5) 1874년 태어난 볼셰비키 혁명가. 두마 의원으로도 활동했었다. 임시정부를 타도한 이후인 1917년 12월 퇴각하던 케렌스키와 그의 호위대가 쏜 포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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