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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에서 10월로

[러시아혁명 100주년] 자코뱅 온라인시리즈(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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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2월혁명은 좋은 혁명이었지만 10월혁명은 극단주의자들의 혁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이보다 훨씬 더 복잡했다.


1917년 11월 8일 소비에트총회에서 연설하는 레닌 [출처] Wikimedia Commons

리타 차더 도어(Rheta Childe Dorr)1)는 그녀의 책 ‘러시아혁명의 내부(Inside the Russian Revolution)’에서 러시아에 대한 자신의 첫인상을 이렇게 묘사했다.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한 첫날 아침 내가 처음으로 본 것은 청년 남성 스무 명 가량이 흰색 글씨가 적힌 주홍색 펼침막을 들고 호텔 앞 도로에서 행진하는 모습이었다.
“펼침막에 뭐라고 쓰여 있나요?” 내가 옆에 있던 호텔 수위에게 물었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고 쓰여 있습니다”하고 수위가 대답했다.
“소비에트가 뭔가요?” 내가 물었고 그가 짧게 답했다.
“지금 러시아에 존재하는 유일한 정부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이 구절을 보고 도어(Dorr)가 10월혁명 뒤 러시아에 도착했을 거라 생각할 것이다. 10월혁명 뒤 소비에트가 임시정부를 타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어는 러시아에 1917년 5월 말에 도착해서 8월 말에 떠났다. 그녀는 이 책의 원고를 10월혁명이 일어나기 전 출판사로 보냈다. 따라서 그녀의 책은 사후적인 평가나 편견 없이 1917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볼 수 있는 매우 유용한 목격담이다.

도어는 핵심 사실들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혁명 초기 러시아에 정부라고 할 만한 것이 있었다면 전국에 들불처럼 퍼져있는 소비에트, 다른 이름으로 병사·노동자 대표단[대의원] 위원회일 것이다.” 도어는 사회주의자였지만 독일에 맞선 제1차 세계대전을 열렬히 지지했고 따라서 그녀가 보기에는 그저 포악한 군중의 통치인 소비에트 통치를 매우 싫어했다. 그녀는 소비에트 통치가 차르 통치에 견주어 나을 것이 없고 어떤 점에선 더 나쁘다고 생각했다. 언론 검열 문제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썼다. “평범한 미국 여행객은 일간지 모두를 읽어도 정보를 많이 얻지 못할 것이다. 언론 검열이 차르 정권의 전성기와 다를 바 없이 매우 엄격하고 폭압적이다. 달라진 것은 다른 종류의 뉴스가 금지된다는 것뿐이다.” 러시아를 장악한 “이 위원회의 광기”가 어떤 것인지 알려주기 위해 그녀는 이렇게 비유했다.

예를 들어, 워싱턴 재무부 청사에 미국노동조합연맹 위원회가 찾아와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 보라. “우리가 당신들을 통제하겠소. 우리가 회계장부와 모든 비밀문서들도 작성하겠소.” 이것이 바로 러시아 정부 부처들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정부 부처가 노동자·병사 대표자 위원회의 노예가 아니라 오로지 유권자들을 책임지는 정부를 구성할 때까지 이런 일은 계속될 것이다.

도어의 진술은 일면적이다. 소비에트 권력은 1917년 내내 강력한 도전을 받았고 임시정부도 야심찬 의제가 있었다. 그녀가 남긴 기록들은 대다수의 역사가들에게 대수롭지 않은 사실들이긴 하지만 뜻밖에도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에는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이 새로운 전망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글은 가장 먼저 2월혁명과 10월혁명의 연속성을 보여줄 것이다. 그 다음에 어떤 종류의 혁명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볼셰비키 지도부 특히 레닌에 대해 살펴 볼 것이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는 혁명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구호다. 혁명의 시대 전체를 두고는 “자유, 평등, 박애”와 선두를 다투고 있다. 이 구호는 세 단어로 구성돼 있다. “вся власть советам(브샤 블라스트 소비에땀)” ‘브샤’는 ‘모든’, ‘블라스트’는 ‘권력’, ‘소비에땀’은 ‘소비에트로’를 뜻한다. 러시아 단어 ‘소비에뜨’는 단지 ‘조언’을 뜻하는데 여기서 ‘위원회’라는 말이 나왔다.

‘블라스트’라는 러시아어는 도전이라는 뜻이 더 강하다. ‘권력’은 여러 이유로 완전히 적절한 번역은 아니다. ‘블라스트’는 특정 국가의 주권이라는 뜻의 ‘권력(power)’보다 더 구체적인 뜻을 갖고 있다. ‘블라스트’를 갖기 위해서는 최종결정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고 실제 그런 결정들을 내릴 수 있고 또 결정이 집행되도록 감독할 수 있어야 한다. 영어에서는 종종 이런 뉘앙스를 표현하기 위해 ‘블라스트’가 일반적인 어법과는 달리 ‘The power(권력)’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나는 ‘블라스트’를 ‘권력’이라고 쓰겠다.2)

권력의 맹아

1917년[혁명]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들은 기본적으로 ‘2월혁명’과 ‘10월혁명’을 대비시킨다. 이 주제에 관한 책을 읽는 대중은 자유주의적 입장에 따른 대조를 접한다. 2월혁명은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좋은 혁명이고 10월혁명은 독재와 극단적인 유토피아주의에 따른 나쁘고 정당성 없는 혁명이라는 식이다. 좌파들도 비슷하게 대비시킨다. 하지만 이들이 가치를 두는 순서는 정반대다.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 대 “사회주의혁명” 식이다.

간과되고 있는 건 2월혁명과 10월혁명 사이의 강력한 연속성이다. 1917년 봉기는 2월 그 시작부터 부르주아에 맞서는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보아야 한다. 소비에트 권력은 사실 2월에 선언됐다. 10월혁명의 역할은 소비에트 권력이 평화적으로 사라지지 않겠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소비에트라는 이 새로운 권력-주권 뒤에 있는 기본적인 세력은 인민들, 노동자들, 병사들, 농민들, 대중들(지배자들의 반대말로서), 센소바이키들(tenzoviki 재산있는 계급들), 교육받은 집단들이었다. 소비에트 혁명의 중심 목적은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개념으로 표현된 광범위한 개혁 강령들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농민들에게 토지를 주어 포메슈체키(pomeshchiki)라는 토지소유 귀족 계급을 청산하는 것과 잔인하고 의미 없는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다.

동시에 러시아혁명은 몹시 반(反)부르주아적이었다. 비록 이런 분위기가 사회주의를 단기간에 또는 중기적으로 실시해야 한다는 강령적 요구로 나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놀라운 사실은 혁명의 사회적 토대나 반(反)부르주아적인 가치라기보다는 차르 정권이 무너지자마자 거의 동시에 광범위하게 대중적 지지를 받는 성공 가능한 주권 수임기구가 창출됐다는 것이다.

종종 ‘역사적 권력’이라 불리며 장기간 권력을 잡았던 로마노프 왕조가 2월 해체되자 러시아는 사실상 기능하고 있는 권력이 없는 상황이 됐다. 즉 일반적으로 주권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 권력이 없었다. 2월 27일 혁명적 사건들 속에서 1917년 일 년 내내 지속되는 기본적인 노선들이 곧바로 형성됐다. 이날 다음과 같은 상황들이 발생했다.

1. 러시아를 수백 년 동안 지배하던 차르 권력이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무너졌다. 차르정권은 권력(블라스트)이라는 단어가 가진 뜻 그대로 완전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군대와 경찰 등] 무장력을 통제했고 강력한 정당성과 사명(mission), 사회적 기반을 갖고 있었다.

2. 사회주의 지식인들이 공장의 노동자들에서 그리고 바로 뒤 병사들에게도 자신들의 대표를 선출하라고 호소해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를 창출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소비에트 명령1호를 발표하여 권력의 가장 필수적 요소인 무장력에 대한 통제를 확립했다. 병사위원회를 구성하고 군대를 민주화하라고 주장하면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노동자들의 충성과 신뢰를 얻었다.

3. 자유주의 지배층 정치인들이 임시정부를 구성했다. 비록 임시정부가 자신들이 이전 권력을 물려받아 권력을 법적으로 승계했다고 주장하며 일종의 정당성을 갖추려 시도했지만 임시정부는 기본적으로 소비에트 설립에 대한 대응이었다. 따라서 처음부터 지배계급들은 실제 작동하는 소비에트 권력이라는 예상치 못한 장애물에 직면했고 세력균형상 열세였다. 임시정부는 다행히 소비에트의 온건한 사회주의자 지도부와 동맹을 맺을 수 있었다. 소비에트 지도부는 보다 진보적인 지배층 세력들을 혁명 편으로 유지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주권, 궁극적인 권력을 갖고 있었지만 이 단계에서는 권력을 갖고 있다고 명시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선출된 노동자와 병사 대표단[대의원]이었다. 그 구성에서 병사 대표단이 포함된 것이 1905년과 다른 핵심적인 차이였다. 이 권력을 행사하는 데는 두 차례 중요한 계기가 있었다. 첫째 임시정부는 기본적인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 사실은 그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소비에트 강령의 핵심 부분을 수용하기로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소비에트] 명령 제1호로 소비에트는 (알고 한 것은 아니지만) 모든 권력의 핵심 속성인 즉 강제의 궁극적 수단인 군대에 대한 통제력을 얻게 됐다. 임시정부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핵심 강령들을 이행하겠다고 약속한 것과 무장 세력들이 임시정부가 아니라 소비에트에 충성했다는 이 두 가지 사실이 1917년 나머지 시기의 정치 과정을 결정지었다.

1917년을 경과하며 소비에트 권력이 겪은 우여곡절은 겉으로는 계속된 정치 위기들로 표현됐다. 하지만 그 우여곡절 속에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진정한 권력의 핵심적인 속성을 획득하게 되는 보다 개별적인 과정들이 벌어졌다.

당시에 대한 몇몇 볼셰비키 관찰자들에 따르면, 2월에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권력의 맹아였다. [권력의 맹아라는 표현은] 정말 적절한 비유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떠오르게 한다.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진정 독립적인 권력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실질적인 권력은 적어도 아래와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

1. 사명감 - 우리가 내적 정당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
2. 타당하며 충성을 획득할 수 있는 정당성의 선언 - 외적 정당성
3. 합법적인 강제 수단에 대한 독점
4. 모든 적대세력을 제거할 수 있는 능력
5. 당시 핵심적인 국가 문제들에 대처하는 광범위한 분야의 강령
6. 차르 러시아 시절 귀족계급이 수행하던 구실을 할 수 있는 광범위한 정치계급
7. 중앙 권력(블라스트)의 의지를 전국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 행정기구

이것들이 권력이 작동하기 위한 핵심 요소들이다. 2월 설립된 맹아적 소비에트 권력은 사실상 이것들 가운데 몇몇을 갖고 시작했다. 그리고 1917년과 내전을 거치면서 다른 모든 요소들을 점차 실질적으로 획득했다. 예를 들면, 소비에트는 3월 말 전러시아 소비에트 회의와 두 차례 소비에트 총회(6월과 10월)를 거치며 전국적 기구라는 형태를 획득했다. 반대로 임시정부는 시작할 때 갖고 있던 핵심 요소들조차 잃고 점점 더 유령처럼 되어갔다. 1917년 가을이 되자 임시정부는 심지어 온건한 소비에트 지도부의 지지도 받지 못하는 유령권력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소비에트와 임시정부의 지배층 개혁가들의 관계를 보여줬던 계속된 정치위기들을 살펴보자. 1917년 정치투쟁은 소비에트 다수파가 강령과 인사에 관련된 문제들을 최종 결정한다는 불문법에 따라 진행됐다. 처음에 알렉산더 케렌스키가 소비에트 대표로 임시정부에 들어갔다. 다른 이유들과 더불어 이것 때문에 초기 ‘이중권력’ 시기와 나중의 협력 시기를 대비시키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5월 초 소비에트는 더 많은 소비에트 대표자들을 임시정부에 배치해달라는 임시정부의 요청에 동의했다. 소비에트가 얼마나 많은 대표자들을 임시정부에 파견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와 상관없이 소비에트 다수파의 분명한 의사를 거슬러서는 어떤 주요 정책도 진행될 수 없다는 사실은 여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17년 벌어진 여러 정치위기들은 모두 소비에트 당국이 자신의 확고한 입장을 드러내면서 종료됐다. 왜냐면 소비에트가 강제력에 대한 최종적인 통제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1917년 10월뿐만 아니라 3월, 4월, 7월, 8월에도 그랬다.

물론 소비에트 권력은 처음에 매우 강한 도전을 받았다. 반혁명도 2월부터 그 뿌리가 생겨났다. 갈등의 핵심은 당시 권력의 위기(krizis vlasti)라 불렸던 것으로 쟁점은 다음과 같았다. 이중권력(dvoevlastie), 이중주권은 말 자체가 모순적이다. 책임이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다면 누가 정말 중요한 궁극적 결정을 내릴 것인가? 따라서 ‘이중권력’은 ‘다수권력’과 똑같은 말이고 ‘다수권력’은 ‘권력 없음’과 같은 말이다. 정부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러시아는 모두가 인식하고 인정하며 강인한, 단 하나의 권력이 필요했다.

이 시점[5월]에 의견들이 갈리기 시작했다. 이 생각을 처음 내놓은 자유주의 카데츠당은 따라서 ‘소비에트가 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이 논쟁에 재빨리 뛰어든 볼셰비키는 따라서 ‘모든 권력은 반드시 소비에트로!’라고 말했다.

소비에트 기구가 직면한 존재 자체에 관한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소비에트의 강령이 개혁주의 지배층들과 선의의 협력관계라는 수단을 통해 수행될 수 있을까? 지배세력과 인민(narod) 사이에 전쟁, 토지, 경제 규제와 같은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입장 차이가 너무 크지 않은가? 볼셰비키는 계급 간의 동맹을 추구하는 시도를 ‘소그라샤텔스트보’라고 했다. 이 개념은 종종 영어로 ‘화해’라고 잘못 번역됐는데, 보다 직접적인 의미는 ‘합의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소비에트 기구 앞에 놓인 문제는 ‘합의주의가 현실성이 있는가’였다. 그렇다. 지배자들에 맞서는 것보다는 함께 일하는 게 더 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혁명이라는 목표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해서는 안 된다.

이제 막 시작된 반혁명의 관점에서 보자면, 소비에트 체제를 제거할 두 가지 가능한 전략이 있었다. 강성 쿠데타와 연성 쿠데타다. 강성 쿠데타는 8월 말 코르닐로프 장군이 시도했다. 하지만 처음 계획부터 어긋난 이 모험은 1917년 정치의 강력한 사실, 군대의 소비에트에 대한 궁극적인 충성이라는 사실에 맞부딪쳤다. 연성 쿠데타는 다른 전략에 의존했다. 전국적 지지를 받는 광범위한 대안 권력을 창출해 계속 소비에트에게 스스로 물러나라고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런 전략에 따라 그해 가을 전러시아민주주의총회3)와 제헌의회4)[예비의회라고도 불림]와 같은 시도들이 있었다. 제헌의회가 소비에트 권력을 퇴장시키기 위한 연성 쿠데타의 중심이 됐다.

소비에트는 이 문제에 대해 9월 초 결정을 내렸다.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새로운 다수파가 ‘합의주의’에 반대하고 정부 전체가 소비에트로 구성돼야한다는 입장에 지지를 보냈다. 10월 열릴 예정이었던 제2차 전(全)러시아 소비에트총회에서도 같은 노선을 채택할 것이 확실했다. 그래서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병사들의 소비에트 지지라는] 불문율이 계속 지켜질까? 새로운 소비에트 다수파가 옛 소비에트 다수파가 했던 것과 똑같이 정부의 정책과 인사들을 결국 통제할 수 있을까? 일반적인 이야기는 10월은 소비에트가 임시정부를 타도한 때다. 우리 입장에서는 임시정부가 소비에트를 타도하는 데 실패한 때다.

[이 때] 소비에트의 정치적 지도력은 볼셰비키에게 있었다. 소비에트의 이 선택은 소비에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보다 근본적인 결정을 불가피하게 함축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볼셰비키가 소비에트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고 또 그럴 능력이 있는 유일하게 조직된 정치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사회혁명당 좌파도 충분히 그럴 의지가 있었지만 아주 미미해 조직된 정치 세력이라고 볼 수 없었다) 1918년 1월 제헌의회 해산으로 소비에트 권력을 평화적으로 중단-자발적 해산-시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사라졌다. 이 문제는 전투를 통해 정리됐다.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총회: 10월혁명에서 10월의 의미

불문법에 따르면, 주기적으로 선출된 대표단이 참석하는 소비에트 총회가 전국의 소비에트를 대표해 혁명 정부의 인사와 정책들을 결정할 권리와 의무를 가졌다. 10월 25일과 26일 개최된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총회5)가 바로 그런 기구다. 우리는 종종 볼셰비키 내부의 극적인 논쟁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군사혁명위원회가 조직한 ‘무장봉기’에 빠져 1917년 가을에 전국의 소비에트 기구에서 새로운 다수파가 존재했다는 기본적인 정치적 사실을 잊곤 한다.

무장봉기는 이 사실을 고려해볼 때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무장봉기 없는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총회를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총회 없는 무장봉기는 상상할 수 없다. 트로츠키가 이 총회에서 말했듯이 “이 봉기의 정치노선은 소비에트 대회를 통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였다. 저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대회 개막을 기다리지 않고 봉기를 일으켰다고. (...) 우리 당은 소비에트 대회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진짜 가능케 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이에 맞춰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총회의 진행과정을 보면 10월혁명에서 10월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즉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총회 전체가 다수파와 소수파 모두 포함해 무엇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불문법에 따르면, 정당하게 선출된 소비에트 총회가 혁명 정부의 인사와 정책들을 결정할 권리를 가졌다. 이것이 핵심이었다. 총회에서 누구도 이를 반대하지 않았다. 심지어 볼셰비키의 가장 격렬한 반대자들도 말이다.

대신 이들은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총회의 정당성을 다양한 다른 방법으로 깎아내리려 했다. 첫째 이들은 퇴장전술을 통해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총회의 정족수 문제를 제기해 결정을 방해하려 했다. 둘째 거리의 무장 전투와 ‘내전’으로 소비에트 총회 활동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반(反)볼셰비키 사회주의자들은 임시정부 각료들에 대한 체포에 저항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사회주의자 장관들에 대한 처리문제에 대해서 저항했을 뿐이고 그조차도 장관이라는 그들의 지위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당의 임무를 수행하던 당의 동지들이었기 때문에 분노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비에트 총회가 새 정부를 구성하고 심지어 소비에트에 참가하지 않는 정당들을 배제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이들은 새 정부의 권력은 모든 소비에트 정당들을 대표해야 하고 심지어 모든 민주 세력들을 포괄해야 한다고 그래서 멘셰비키 내 마르토프파와 좌파 사회혁명당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렇게 광범위한 연합은 비현실적인 몽상이었다. 따라서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총회에서 그 누구도 [소비에트가 정부 정책과 인사를 결정한다는] 불문법에 반대하지 않았다.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총회는 새 정부에 어떤 강령들을 제시했나? 이틀간의 총회에서 세 가지가 제시됐다. ‘민주적 평화’를 위한 정부의 공식 제안,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귀족영지 폐지, ‘노동자-농민 정부’의 건설이었다. 이 세 가지 모두 당시로는 기본적으로 ‘민주적’인 것으로 공식 슬로건과 볼셰비키의 연설들은 이런 민주적 성격을 크게 강조했다. 레닌의 아주 유명한 발표문-아마도 최초로 새로운 권력을 선포한-은 이렇게 선언했다. “인민들이 투쟁했던 대의, 즉각적인 민주적 평화 제안, 귀족의 토지소유 폐지, 생산에 대한 노동자 통제, 소비에트 정부 건설을 이제 획득했다”

레닌은 초안에 “사회주의 만세!”라고 썼다가 그 문구를 지워버렸다. 이 사실은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총회에서 벌어진 논쟁의 또 다른 특징을 알려준다. 말로든 개념으로든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 사실 최종 목표로 사회주의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는 있다. 하지만 볼셰비키는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총회가 채택한 실제 강령을 사회주의적인 것이라고 방어하지 않았고 가장 분명하게도 볼셰비키를 공격했던 이들도 러시아에 사회주의를 실현하겠다는 비현실적 시도를 했다고 볼셰비키를 비판하지 않았다. ‘사회주의’는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총회에서 쟁점이 아니었다.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총회의 역사적 의의는 이전에는 불문법이었던 것을 이제 공식적으로 러시아의 법률로 확인한 것이었다. 2월에 탄생해 노동자와 농민의 연대에 기반을 두었고 혁명 강령에 전념했던 권력의 맹아가 권력으로서 생존해 번창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전 세계에 선포한 것이었다.

어떤 종류의 혁명인가?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총회와 그 강령을 살펴보면 질문이 생긴다. 1917년 혁명은 어떤 종류의 혁명인가? 당연하게도 여러 면에서 러시아의 노동자-농민 혁명은 확실히 ‘사회주의’적이다. 궁극적 목적이 사회주의 사회 건설인 열성적인 사회주의자들이 혁명을 이끌었다. 사회주의 정당들이 인민으로부터 완전히 독점적인 지지를 받았고 소비에트 체제를 대변했던 것도 사회주의 정당들이었다. 더욱이 볼셰비키들은 [러시아에서 그들의 활동을] 자신들이 머지않아 올 거라 믿었던 유럽 전체의 사회주의 혁명의 일부로 배치했다. 이와 반대로 우리가 1917년 소비에트 권력이 채택한 실제 강령들을 살펴보고 소비에트 기구에 볼셰비키가 매일매일 발표한 실제 성명들을 보면 우리는 ‘민주주의적’ 요구들이 거의 완전히 ‘사회주의적’ 요구를 밀어냈었다는 발견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이항대립은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오래된 것이다. 이러한 긴장은 20세기 초에 이르러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1906년 칼 카우츠키는 ‘러시아 혁명의 추진세력과 전망’이라는 제목의 중요한 글을 썼다. 이 글은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을 기쁘게 해 셋 모두 이 글에 대한 논평을 썼다. 심지어 1917년 혁명 뒤에도 카우츠키의 이 글이 볼셰비키 혁명 전략의 고전적 설명이라고 레닌, 트로츠키, 심지어 카를 라데크6)도 인정했다.

여기서 카우츠키는 이렇게 주장했다. 러시아는 “고전적 의미의 부르주아 혁명도 아니고 사회주의 혁명도 아닌 매우 독특한 과정을 지나고 있다. 이 과정은 부르주아 사회와 사회주의 사회의 경계선에서 발생하고 있다.” 카우츠키는 과거와 미래의 러시아 혁명은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부르주아 혁명이 아니지만 프롤레타리아와 동맹을 맺은 농민들이 아직 사회주의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지 않기 때문에 사회주의 혁명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모든 러시아사회민주당원들은(트로츠키를 포함해) 판을 뒤집는 유럽 혁명이 없다면 러시아 농민들이 사회주의적 전환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데 동의했다.

이런 점들을 볼 때, 1917년 러시아혁명은 반(反)부르주아지 민주주의 혁명으로 이해하는 게 적절할 것이다. 소비에트 권력을 창출하고 방어한 혁명은 그 계급적 구성과 강령 둘 모두에서 민주주의적이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수도의 노동자들과 병사들이 만들었다. 즉 소비에트 권력은 처음부터 ‘노동자-농민의 권력’7)이었고 그 성격을 버리지 않았다. 1917년 모든 이들이 받아들였던 마르크스주의 담론의 법칙에 따르자면, 농민들의 이해관계가 들어있는 혁명은 따라서 민주주의 혁명이다.

또 1917년 소비에트 혁명은 그 강령에서도 민주주의적이었다. 오늘날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사상이 있다. 소비에트 권력을 이해하려는 시도에서 “혁명의 사회주의적 성격”이 논리적으로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검토해보면 이 생각은 근거가 미약하다. 사실 1917년 레닌과 트로츠키 자신이 [이런 생각을] 강력하게 거부했다. 어쩌면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자들 가운데는 ‘단지’ 민주주의 혁명은 보잘 것 없는 개혁들과 쥐꼬리만한 ‘최소강령’이라고 무시하는 경향도 있을 것이다. 볼셰비키는 아주 다른 태도를 취했다. 볼셰비키는 급진적 민주주의 창출, 농민에게 토지 분배, 토지소유 귀족계급의 청산, 삶의 모든 측면에서 근대화와 같이 러시아에서 민주주의로의 전환은 매우 야심차고 보람있는 임무였다. 더욱이 이것은 오직 열정적인 사회주의자들만이 수행할 수 있는 과제였다.

이 점은 러시아 혁명을 정의하는 두 번째 부분과 관련이 있다. 고전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과 반대로 러시아혁명은 시작부터 반(反)부르주아지 혁명이었다. 첫째 카우츠키가 지적한 바로 그 이유로 자유주의자들이나 ‘부르주아지’ 내 어떤 세력도 아닌 사회주의자들이 혁명을 주도했다. 둘째 소비에트의 두 축인 노동자와 농민들은 부르주이[부르주아의 러시아어] 가치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셋째 러시아혁명은 시장 시스템의 실패가 가속화되는 가운데 발생했다.

시작부터, 즉 2월부터 소비에트는 좁은 의미의 부르주아인 산업 소유자들과 넓은 의미의 부르주아인 첸조비키(일정 자산 이상을 소유해 투표권을 부여받은 교육받은 지배층을 모욕하는 말), 비엘로루키(하얀 손), 그리고 다른 부정적인 명칭들로 불리던 교육받은 지배층들에 적대적이었다. [지배층 개혁세력들과] 실질적 협력관계에 대한 희망이 높았던 이 시기에도 부르주아는 의심의 대상이었고 사실 [인민에게는] 자동적으로 위선을 떠올리게 하는 대상이었다. 사회주의라는 제도에 대한 긍정적인 헌신보다 부르주아 개인과 부르주아 가치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가 훨씬 더 강력했다. 이런 반(反)부르주아적 방향은 사회주의 지식인들의 이상에서뿐만 아니라 소비에트 권력으로부터 조직적으로 생겨났다.

부르주아 계급과 시장 제도, 중간계급 가치 같은 것들은 1914년 시작된 러시아 ‘재난의 시대’를 지나며 파괴됐고 이를 회복하고자 하는 사회적, 정치적 의지는 없었다. 따라서 러시아소비에트연방에서 사회주의는 부르주아와 자율적인 시장, 그리고 부르주아 다원주의가 없는 위대한 현대국가 건설을 자신의 내용으로 삼게 됐다. 무엇보다 소비에트의 이런 반(反)부르주아적 방향이 단기적으로는 사회적 세력관계와 장기적으로는 혁명의 경제적 결과를 결정했다.

볼셰비키 ‘헤게모니’: 농민을 지도하는 사회주의자들

왜 다른 정당이 아닌 볼셰비키가 소비에트 권력의 지도력을 획득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야를 더 넓혀 1917년 이전 볼셰비즘을 규정했던 소위 헤게모니 전략을 살펴보아야 한다. ‘헤게모니’는 다양한 맥락에서 여러 의미를 갖는다. 볼셰비키들이 이 용어를 러시아에서 계급 세력관계에 대한 자신들 입장을 요약하는 데 사용할 때,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의미는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농민들의 지도자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노동자와 농민의 공동 이익에 기반을 둔 혁명 권력을 창출하고 혁명을 중단시키고 퇴보시키려는 자유주의 개혁주의자들의 시도를 거부해 혁명을 ‘끝까지’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쟁 이전부터 이런 헤게모니 전략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볼셰비키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고 마침내 제2차 소비에트총회에서 다수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들은 상황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그리고 소비에트기구에서 노동자와 농민(출신) 병사들의 지지를 얻고 그들이 지배층 개혁주의자들과의 그 어떤 합의주의도 거부하도록 설득하는데 굳이 레닌이 필요하지 않았다. 카메네프와 스탈린은 임시정부가 결국에는 혁명 강령을 수행할 수 없으며 금방 반혁명적 성격을 드러낼 것이라 확신했다.

이런 모든 점에 비춰볼 때, 농민과의 연대가 문제의 핵심이었다. 레닌이 돌아온 뒤 4월에 볼셰비키 토론 대부분은 혁명에서 농민의 핵심적 구실에 대해 모든 이들이 합의토록 하는 데 모아졌다. 그래서 일부 볼셰비키들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끝나지 않았다-다른 말로 농민이 여전히 혁명적 동맹”이라고 주장했다. 레닌은 어떤 “사회주의적 조치들(예를 들어, 은행 국유화)”도 농민의 이해와 지지 없이는 실행되지 않을 것이라고 응답했다.

이렇게 사회주의 지도부가 근본적으로 농민을 고려했던 것이 1917년의 승리뿐만 아니라 내전에서도 볼셰비키가 승리한 이유였다. 신경제정책이 실행되기 전인 1920년에 에브게니 프레오브라젠스키8)는 ‘중농’을 ‘혁명의 핵심 세력’이라고 묘사했었다.

내전의 모든 시기에 걸쳐, 중농들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발걸음을 확실히 맞추지 않았다. 이들은 특히 새로운 조건들 새로운 부담에 직면해서 한 번 이상 흔들렸다. 한 번 이상 자기 계급의 적들 쪽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노동자-농민 정부는 농민 80%와 확고한 동맹을 만들었고 이 사실만으로도 러시아 국경 내에 권력을 다투는 다른 어떤 경쟁자도 없었다.

적군이 헤게모니의 구현체였다. 농민[출신] 병사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정치적 지도력, 전문 역량을 발휘하지만 정치적 영향력은 없었던 장교들, 이들 모두가 함께 노동자-농민 권력을 유지하고 방어하기 위해 싸웠다. 심지어 멘셰비키 표도르 단(Fyodor Dan)9)조차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단은 1920년 폴란드에서 농민에 기반을 둔 적군이 패배하는 것을 목격했는데 이것이 단지 군사적 실패만은 아니었다고 1922년에 썼다.

지주가 돌아와 땅을 다시 가져가는 것에 맞서 적군 농민 병사는 가장 영웅적으로 가장 열정적으로 싸울 것이다. 독일과 영국, 그리고 프랑스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는 대포와 탱크에 맞서 맨몸으로 나갈 것이고 그의 혁명에 대한 열정에 가장 훌륭하고 규율 있는 군대조차도 영향을 받고 파괴될 것이다.

하지만 볼셰비키의 공산주의 사상은 농민 적군들의 마음에는 매우 이상하고 거부감이 드는 것이어서 그들 스스로 이 사상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이 사상으로 다른 농민들의 마음을 얻을 수도 없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를 공산주의 사회로 바꾸는 전쟁에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이것이 볼셰비키를 따르는 폴란드 적군이 가진 한계다.

단은 “볼셰비키의 공산주의 사상”에 대해 엉뚱하게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의 지적은 러시아혁명에 대한 두 가지 핵심 문제를 보여준다. 첫째 러시아혁명은 농민의 이해관계와 조화를 이룰 때 강력했고 그 한계를 넘어서면 취약해졌다. 둘째 (단은 몰랐던 것인데) 도시 지역 인민에 기반을 둔 정치정당의 정치적 지도를 받지 않았다면, 농민들은 힘 있는 투쟁 세력이 될 수 없었다.

볼셰비키는 노동자-농민 동맹에 매우 철저했으며 그 때문에 본질적으로 ‘민주주의’ 혁명에 철저했다. 레닌은 그의 마지막 저작들에서야 명시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가 농민 다수를 지도해 사회주의로 나갈 수 있다는 사상을 전개했다. 어떤 면에서 이런 전망은 헤게모니에 대한 원래 입장과는 단절한 것이기도 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회주의자가 농민을 지도한다는 핵심 사상이 그저 좀 더 확장됐다는 것이다.

볼셰비키 지도자 레닌

10월 소비에트 권력은 볼셰비키 당의 지도를 받았다. 이런 관점에서 사건들을 살펴보면 볼셰비키 당 내 레닌의 지도력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고 레닌의 지도력에 대해 뜻밖의 특성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우선 레닌이 1905년 혁명 전후 앞에서 말한 헤게모니 전략을 발전시키고 옹호한 핵심 당사자라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1915년 10월 레닌은 그의 시나리오를 가다듬어 노동자-농민 권력이 혁명의 2단계에서 차르에 반대하지만 방어주의적인 [전쟁지지] 정권에 반대해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이 볼셰비키의 기본적인 전략 방향이 됐다.

레닌이 10여 년의 망명생활 끝에 4월 러시아로 돌아왔을 때, [볼셰비키 당내에는] 거대한 불협화음과 혼란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었다. 4월에 레닌이 빼어났던 점은-볼셰비키 당원들과의 의견교환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그가 당원 동지들의 의견을 경청해 무엇이 가장 우선이고 무엇이 그 다음인지를 정하고 레닌 지지 세력과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 세력들 모두의 오해를 불식시킨 능력을 발휘한 것이었다. 레닌이 지역 활동가들로부터 배웠던 것을 사소하지만 아주 잘 보여주는 사례가 하나 있다. 러시아로 돌아오기에 앞서 스위스에서 보낸 ‘먼 곳에서 보낸 편지’에서 레닌은 계속 ‘노동자 소비에트’라고 썼다. 프라우다 편집자들은 이 편지를 게재하며 이 문구가 나올 때마다 [레닌에게 말하지 않고] 알아서 ‘노동자와 병사 소비에트’라고 고쳤다. 귀국하자마자 발표한 4월테제 초안에도 레닌은 여전히 이 부정확한 명칭을 사용했다. 동지들로부터 이 문제를 지적받고 레닌은 곧바로 근본적으로 농민-노동자 동맹의 중요한 상징이었던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로 명칭을 바꿨다.

또한 레닌이 유명한 세 어절 구호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예기치 않게 채택했던 것도 칭찬받아 마땅하다. 이 구호는 4월테제에도 나오지 않았고 4월 29일 끝난 볼셰비키 당대회 결의문에도 없었다. 이 구호를 최초로 사용한 것은 기록상 4월 21일 반정부 거리 시위에 등장했던 한 펼침막으로 보인다. 레닌은 이 구호가 등장한 것을 기록해두었다가 5월 2일 <프라우다>의 한 기사에 인용했다. 익명의 펼침막이나 개인이 작성한 기사가 아니라 이 구호를 공식적인 당 문서에서 최초로 사용한 것은 5월 7일이었다. 명민하게도 레닌은 이 구호를 보고 그 가능성에 주목했던 것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증거를 볼 때, 이 구호를 발굴해 볼셰비키 선동의 핵심으로 만든 것은 레닌이었다.

7월의 나날들이 지나며 레닌은 [소비에트 결정권이라는] 불문법이 폐지됐고 당시 소비에트 체계가 더 이상 권력을 행사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나중에 인정했듯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가 좌파적 탈선이라며 철회하고 싶어 했다. 다행히 당 내 다른 지도자들이 이 구호를 유지시켰다. 그리고 이 구호를 유지했기 때문에 가을 소비에트 체계가 새로운 활력을 얻어 솟아오를 때 볼셰비키가 그 분출구가 될 수 있었다. 이 사건이 보여주듯이 레닌이 능력 있는 지도자였던 것은 그가 개인의 실수를 수정해 주었던 집단의 일부였기 때문이었다.

레닌이 10월에 동료 볼셰비키들에게 봉기를 수행해야한다고 열변을 토하는 드라마를 볼 때 그의 핵심 주장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전국의 소비에트가,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농민들도 모든 종류의 ‘합의주의’를 거부하고 있었고 이것은 사실상 완전한 소비에트 권력을 선포한 것이었다. 무장봉기는 의심할 바 없이 좋은 생각이었지만 무장봉기 그 자체가 소비에트 권력을 창출한 게 아니었다. 무장봉기는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총회와 이 총회가 불문법을 성문법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지켜낸 것이었다.

레닌은 단결된 당의 강력한 지도자였다. 하지만 레닌이 강력한 지도자였기 때문에 볼셰비키 당이 단결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노동자-농민 권력을 건설하는 사회주의자들의 지도력이라는 기본적인 전략을 중심으로 볼셰비키 당이 단결했기 때문에 레닌이 강력한 지도자일 수 있었다.

1917년 혁명을 다시 정의하며

2월에서 10월까지 사건들의 진행과정을 되돌아보면 소비에트 권력이 불가능하기도 했으면서 동시에 불가피하기도 했다는 것에 놀랄 것이다. 10월은 세 가지 매우 특수한 상황이 결합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전 권력의 완전한 붕괴, 실질적인 군대의 충성을 즉시 획득했던 노동자와 농민에 기반을 둔 기구의 탄생, 앞 선 두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전국적 구조와 준비된 강령을 가진 비합법 정당의 존재가 바로 그것이다.

이 모든 특성들이 차르 정부 몰락 몇 시간 안에 확연하게 부상했다. 그 뒤 10월[혁명]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러시아 인민의 열망과 지배층 사회 사이에 매우 깊은 골이 패여 있는 상황에서 합의주의는 막다른 길이었다. 이것이 분명해지자 소비에트 기구에게 유일한 대안은 볼셰비키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집중하자는 볼셰비키의 강령이었다. 반혁명조차 대안이 될 수 없었다. 반혁명세력은 소비에트를 탄압하기 위해 권력을 장악할 준비가 돼있지 않았다.

따라서 1917년은 전투 결과를 확인하는 해였다. 1917년 건설된 노동자-농민 권력은 이후 내전에서 살아남았지만 큰 대가를 치러야했다.

그 대가 가운데 하나가 전쟁 전에는 볼셰비키의 주요 목표였던 정치적 자유가 완전히 폐지된 것이었다. 하지만 초기 러시아 소비에트는 몇몇 핵심적인 측면에서 확실히 ‘노동자-농민의 권력’이라고 할 수 있다. 지주계층 전체가 폐지돼 지주계급이 해체됐고 교육받은 옛 지배계층들이 권력에서 완전히 제외됐다. 새로운 정부 기구에 점점 더 많은 노동자와 농민들이 일하게 됐다. 새 정부 정책 다수는 이 계급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것들이었다. (예를 들어, 대규모 문맹퇴치 운동) 노래와 이야기들에서 노동자와 농민들은 계속 찬양 대상이었다. 널리 퍼져 있는 대중들의 가치평가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대규모 불관용 정책[정치적 자유 억압정책]조차 어떤 점에서는 ‘민주적’ 성격을 가졌다.

1917년 2월 태어나 볼셰비키 지도력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1917년 10월 살아남은 소비에트 권력은 그 스스로 좋든 나쁘든 전 세계에 걸쳐 강력한 세력이 되었다.

[원문] https://www.jacobinmag.com/2017/05/russian-revolution-power-soviets-bolsheviks-lenin-provisional-government
[필자] 라스 리는 몬트리올에 살고 있는 학자다. 저서로는 <러시아에서 빵과 권위 1914-1921>, <레닌 재발견: 맥락으로 본 ‘ 무엇을 할 것인가’> 등이 있다.
[옮긴이] 최용찬 | 수년간 공공운수연맹 등 노동조합에서 정책 및 대외협력(국제) 사업 담당자로 일했다. 옮긴 책으로 <좀비자본주의>(공역, 책갈피), <세계화와 노동계급>(공역, 책갈피) 등이 있다.


[각주]
1) 리타 차더 도어는 1868년 네브라스카주 오마하에서 태어난 미국의 여성 언론인이자 운동가였다. ‘뉴욕이브닝포스트(New York Evening Post)’에서 일하다 1906년 그만둔 뒤 유럽을 여행하며 당시 성장하고 있던 여성참정권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됐다. 잠시 미국 사회당원이었던 그는 ‘더서프러지스트(The Suffragist)’의 첫 번째 편집자로 활동했다.
2) 필자는 본문에서 영어인 power 러시아어인 vlast 등을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고 다른 몇몇 단어들도 영어와 러시아어의 영어식 표현을 종종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어 번역에서는 그 의미를 확연히 달라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단순한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영어/러시아어/러시아의 영어식 표기 등을 일일이 나열하지 않고 이에 상응하는 한국어 단어 하나만 적었다.
3) 전러시아민주주의총회(All Russian Democratic Conference)는 1917년 9월 14일부터 22일까지 열렸다. 혁명 물결을 저지하기 위해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주도하여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 예비의회를 선출했다.
4) 제헌의회(예비의회)는 1917년 10월 20일 개최됐으나 1917년 11월 7일 볼셰비키가 해산시켰다.
5)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총회는 318개 지역 소비에트를 대표하는 649명의 선출된 대표단이 참가했다. 390명이 볼셰비키였고 좌파 사회혁명당 약 100명, 사회혁명당 60명, 멘셰비키 72명 등으로 구성됐다. 505명이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양하는 데 찬성했다.
6) 1917년부터 러시아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 칼 라덱은 독일사회민주당(SPD)에서 활동했는데 1913년 개량주의적 지도부에 의해 독일사회민주당에서 제명된 적이 있었다.
7) 병사들의 절대 다수가 농민이었기 때문에 ‘노동자-병사 소비에트’를 그 구성상 ‘노동자-농민 소비에트’로 볼 수 있다는 저자의 분석이다.
8) 에브게니 프레오브라젠스키는 1886년 볼코프에서 태어난 러시아 혁명가다. 볼셰비키 중앙위 멤버로 활약했고 빈농이 가득한 러시아에서 국가 소유의 중공업을 통해 급격한 산업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었다. 1920년대 트로츠키의 좌익반대파에서 활동했었다. 1932년 당에서 추방됐고 1937년 스탈린의 대숙청 때 삶을 마감했다.
9) 표도르 단은 1871년 상트페테르스부르크의 유대인 가정에서 출생했다. 멘셰비즘의 창시자중 한 명이다. 1947년 망명지인 미국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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