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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3월의 제주를 아시나요

[노동의 시대] 제주 노동자 민중의 열망, 좌절과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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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혜의 절경을 자랑하는 아름다운 섬 제주. 삼다삼무(三多三無)의 고장.

삼다(三多)는 돌 많고[石多], 바람 많고[風多], 여자 많은[女多] 것을 의미한다. 삼무(三無)는 도둑 없고[盜無], 거지 없고[乞無], 대문 없는[大門無] 것을 의미한다. 언제부터 제주가 삼다삼무의 고장으로 불리었을까. 이원진의 탐라지(1653), 이형상의 남환박물(1704)에서 부분적으로 언급됐다. 누구보다 제주를 사랑한 곤충학자 석주명의 제주도 수필(1968)에서 지역 특성을 ‘삼다삼무의 섬‘으로 표현하면서 널리 불리게 됐다고 한다. 삼다가 유달리 어려웠던 제주인의 환경을 집약하고 있다면, 삼무는 갖은 고난에 대처하고 이를 극복한 제주인의 강인한 의지를 표상하고 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의 깃발은 삼다삼무기라 부른다.

[출처: 자료사진]

이 섬의 명칭은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불렸다. 탐라에서 제주목으로, 1946년 제주도로, 2006년 제주특별자치도로 행정구역상의 변화를 보였다. 역사적으로 수탈과 압제의 섬에서, 독립운동과 해방조국의 건설을 위한 열망의 땅으로, 4.3의 아귀지옥과 침묵을 강요당하던 아픔의 현장으로 존재해왔다.

대중적으로는 만주 순회 공연 도중에 만났던 독립군들의 향수를 그린 백난아의 ’찔레꽃‘과 혜은이의 ’감수광‘은 제주도가 배출한 대중가수들이 부른 시대의 애창곡이다. 이 노래를 만들고 부른 이들의 시대적 감수성 또한 같으면서도 다를 수밖에 없다.

현재 외견상 제주도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자연유산, 평화의 섬 등으로 불린다. 강정해군기지 건설을 둘러싼 저항은 ‘아름다운 섬 제주’의 이면으로 간주되고 있다. 현존하는 아픔이다.

필자에게도 대학 때 졸업여행지였던 추억과 함께 발전노조 순회와 각종 일로 인해 수없이 오갔던 제주의 실체는 다양하다. 공식 일정 사이사이 제주도민들과 4.3 유적지를 많이도 다녔다. 천혜의 자연경관과 시대적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복합적 실체의 섬.

이렇듯 중층적, 다면적 실체로 존재하며 오랜 세월 축적된 역사를 온몸으로 증언하고 있는 제주도.

[출처: 자료사진]

제주도의 아픔으로 표상되는 4월에 역사의 상흔을 찬찬히 살펴보기로 했다. 4.3유적지만을 집중적으로 돌아보는 ‘노동자역사 한내’의 4.3역사기행에 동참하면서. ‘기억을 기록하라’는 주제였다. 아픈 역사의 현장을 집중탐방하는 조심스러움과 ‘기록’을 전제하는 무거움이 있어서 동참 결심을 하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4.3제주민중항쟁의 발발원인과 전개과정에 대해 자료를 통해 파악하기도 하고 유적지를 수시로 방문하며 한계적이지만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려고 노력했다. 1948년 4월 3일 이후를 중심으로 더듬기 보다, 이번 역사기행을 통해 그 이전부터의 인과관계를 살펴보기로 했다.

관련해서 이번 글과 집담회 등을 포함해 서너 편의 글을 내년 이맘때까지 올려볼 참이다. 1947년 3월은 올해가 70주년, 1948년 4월은 내년이 70주년이니 더 미루기도 어렵다. 향후 1년간의 공정과정에서 자료 분석과 역사적 통찰의 부족은 오롯이 필자의 한계와 책임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며 사전 양해를 구한다.

일본 제국주의의 폭압을 벗어난 1945년 8월 15일은 이 땅 노동자민중들에게 진정한 해방이었나. 처음엔 일제의 패망과 새 조국 건설이 등치됐지만 곧바로 미군정과 분단, 전쟁으로 이어지면서 이에 대한 분석이 전혀 달라지는 것이 우리 현대사의 본질적 논점이다.

‘일장기가 내려간 곳에 성조기가 오르고’, 일제의 잔혹한 식민지 정책을 벗어났지만 미군정과 이승만 친일독재정권이 연이어 기다리던 시대의 선각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해야 했으며 할 수 있었을 것인가?

제주도. 일제 강점기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섬에서 맞이한 1945년 8월 15일.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했거나 일제의 박해를 받았던 사람들이 돌아오고 새 시대를 열기 위한 각종 모임과 조직이 결성되던 열정의 섬은 왜 처참한 도륙의 땅, 피바다가 됐을까?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인 1947년 제28주년 3.1절 기념 대회. 전국적으로 개최된 이날 제주대회는 제주도 인구가 30만이 채 안되던 시절에 3만이 모였다. 당시의 교통과 통신 수단 등을 고려했을 때 엄청난 열기가 아닐 수 없다.

미군정 반대, 자주독립국가 전취를 위해 집회와 시내행진을 했다. 이때 관덕정 앞에서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 소년이 치였으나 치료나 사과는커녕 그냥 가버린 것이 대중적 분노의 도화선이었다. 성난 군중들이 미군정의 기마경찰을 따라가던 중 망루에서 지켜보던 경찰의 발포로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당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총에 맞아죽은 사람은 아이 업은 엄마도 있었고, 대부분 총소리에 놀라 도망가던 중 등에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오랜 일제강점기를 벗어난 기쁨의 축제와 기념의 행사가 되어야 할 3.1절 기념대회는 한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제주도민들이 충격과 분노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하고 남을 지경이다.
분노한 제주도민들의 저항은 3월 10일 전무후무한 민관총파업으로 폭발했다. 제주도 전역에서 관공서, 민간기업 등 전체 직장의 95%이상(166개 기관 및 단체)이 참여한 총파업이었다. 유례가 없는 민관 총파업투쟁이었다.

1945년 9월 미군정이 시작된 후, 1946년 9월 총파업과 대구 10월 인민항쟁에 이어 1947년 제주의 3.10총파업 및 제주인민항쟁으로 이어진 것이다. 3월 15일 중문지서 응원경찰대는 수감자 석방을 요구하는 군중에 발포해 다시 8명의 주민이 부상당하게 된다. 도지사와 군정의 핵심들이 외지사람들로 교체되고, 경찰과 잔학한 서청단원들이 대거 입도하면서 검거작전이 전개된다. 3월 22일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은 전국적인 24시간 총파업을 전개했다. 이 파업으로 전국에서 2,716명이 검거, 제주에서도 230명이 다시 검거됐다. 또 제주에서는 검속 한 달 만에 500여명이 체포되고 1년 여 동안 2500명이 구금됐다. 폭행과 구금, 발포가 이어졌던 제주도의 1947년은 이미 암흑천지였다.

1948년 4월 3일부터 시작해 마지막 유격대원 오원권이 체포된 1957년 4월 2일까지 만9년의 과정만 기록한다면 이는 결정적 오류를 범하는 이유이다. 일제강점기와 1945년 8월 15일 이후의 제주, 특히 1947년 3월 1일 이후의 제주를 건너뛰거나 두루뭉술 넘어가면 인과관계에 입각한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지 못하며 구성의 오류를 면치 못한다.

[출처: 서북청년단 주둔소 [출처] 자료사진]

제주인들의 분노를 무자비하게 진압하기 위해 동원한 경찰과 서북 청년단 등이 자행한 탄압은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의 비인간적, 반인륜적 만행이 비일비재했다. 민심폭발의 원인에 대한 규명없이, 통사적 접근없이 실체적 진실과 일련의 과정에 대한 규정은 역사 기록의 전제가 틀어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지난 세기에 일제의 패망과 원치 않는 미군정, 친일독재정권으로 이어지던 한반도의 시대적 상황에서 노동자 민중들의 열망과 좌절, 저항의 기록은 제주도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1945년 8월 15일, 1946년 9월 총파업, 대구 10월 인민항쟁, 1947년 제주 3월 민관총파업 및 인민항쟁으로 염원과 분노가 표출되었음을.

학살과 항쟁의 섬 제주의 곳곳을 둘러보며 독립조국의 열망이 학살과 분단, 전쟁으로 이어지며 좌초하게 된 과정을 아프게 복기했다. 1947년 3월의 현장인 관덕정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며 내린 소결은 이렇다. ‘제주는 1947년 3월을 빼고 1948년 4월을 말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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